작성일 : 14-12-13 12:44
형제교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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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943  

형제교회에 관하여

 

형제교회? 

1. 재침례파 


재침례파 (再洗禮派, Anabaptist), Rebaptizer라고도 하며, 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파 혹은 좌파 운동에 참가했던 집단이다. 재침례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세례 대신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주장하며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츄리히에서 쯔빙글리와 같이 개혁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서 그레벨(Conrad Grebel), 만쯔(Felix Manz), 후프마이어(Balthasar Hubmeier)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쯔빙글리의 온건한 개혁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특별히 유아 세례의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는데, 처음에 쯔빙글리도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어서 유아세례를 지지하였다. 

1525년 1월 18일 주정부에서는 모든 아동들에게 유아세례를 행하라고 한다. 

만쯔, 블라우록, 그레벨등의 세사람이 주축이 되어 유아세례를 정면으로 반대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재세례파의 시작으로 보인다. 여기에 참석한 세 사람은 모두 금방 죽게 된다. 

결국 재침례파는 시작되자마자 주정부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들은 카톨릭에서도 탄압을 받았지만, 개신교에서도 비난을 받았으며 캘빈도 이들을 싫어하였다고 전해진다. 

2. 재침례파의 확산 

그후 재침례파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리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나간다. 

예를 들면, 스위스의 형제단, 남부독일의 후트파, Sattler파, 후터파, 메노파, 신비주의.... 상당히 많은 분파의 양상을 보였으며, 그들 중에는 다소 급진적 개혁성향을 가진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는 보수적이며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도 있었고, 그러나 때로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적 교리를 가진 자들도 있었고, 또 그들만의 패쇄된 집단공동체를 유지하면서 공동사유재산을 부정하기도 하였고,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이 국가제도를 거부하거나 군대를 거부하고 세금을 거부하는 반사회적인 분파들도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재침례파를 한마디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현재 캐나다와 미국에 몰려있는 재세례파교회란, 역사적으로 계승된 재세례파가 아니라, 새로 재세례파라는 이름아래 형성된 교회들로 보인다. 

어쨋든 현재도 재세례파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재세례파의 양상이 너무나 다양하여졌기 때문이다.


3. 형제교회(brethren church) 
형제교회, 퀘이커교회등이 모두 재세례파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재세례파와 매우 유사한 점을 갖고 있었다고 보며, 재세례파 중에 일부분은 형제교회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1827년경, 기독교형제단이란 단체가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성공회 목사로 사역하던 존다아비(John Nelson Darby)이 형제교단의 지도자들과 합세하게 된다. 
이들의 첫째 특징은 만인제사장의 원칙에 의하여 성직제도(목사제도)가 부정되어야 하며, 그들의 모임은 오직 성령에 의하여 인도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이 어떤 강단의 설교나 봉사를 기다리지 않고 주님께서 선하게 생각하시는대로 우리 자신들 중에서 아무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설교 사역을 하자는 것” 
지금도 형제교회는 목사제도를 부정하고 회중에서 성령이 인도하여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스스로 설교사역을 한다. 
이러한 결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개념이 실제 성령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이름 아래, 인도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되는 결과가 초래하여, 결국은 교리와 사상문제로 교회가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해진 교리와 신학적 체계가 없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다양한 교리와 신학을 허용함으로서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의 형제단은 교리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이들 중에서는 존다이비와 같이 매우 배타적인 교회도 있고, 다소 개방적인 교회(뮬러, 크레이크)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는 내세가 훨씬 중요하므로 영혼구원은 현실적인 사회, 정치문제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보는 성향이 있는 곳도 있었고, 또 이들 중에는 문자적이며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특히 이들의 특징은 예수의 재림을 강조하며, 매우 강력한 선교활동을 펼친다. 
일반적으로 형제교회는 크게 분류하여 두 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흔히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로 알려진 그룹과 또 하나는 배타적인 형제교회(Exclusive Brethren)로 알려진 그룹이 그것이다. 
“개방적이다” 혹은 “배타적이다”라는 용어의 의미는 타교단과의 외부적인 교제권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여준다. 배타적인 형제교회는 오직 자신들의 교리만을 주장하는 심한 교리주의에 잡혀 있다. 
또 그러한 배타적인 곳일 수록 주로 이단적인 교리를 믿고 있다. 
최근 몇년간 영국 일간지에 실린 공식적인 보고에 따르면 제반 사업체나 전문직 연합회, 그리고 대학교 등에 진출해 있던 배타적인 모임 출신의 성도 수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개방적인 형제 교회는 한 마디로 중앙 통제기관이 없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들은 영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 대륙과 아프리가 대륙, 그리고 아시아 여러 국가 등에 널리 퍼져 있으며, 각 지역마다 많은 수의 교회 혹은 모임을 구성하고 있다. 
실상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각 지역 교회는 그 운영에 있어 독립적이다. 그들은 어떤 총회나 노회 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간에는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와 강한 결속력을 형성하고 있다. 

4. 형제교회(형제회)의 기원 

교회사적으로 볼 때 형제교회 운동의 기원은 주후 1825년부터 시작된다. 
물론 형제교회 자신들은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그 교회의 기원은 사도 시대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일 뿐이다. 
실상 이들의 목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려는데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초대교회는 형제교회와는 다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 무렵 여러 기독교 교단들에서 분리되는 일들은오늘날 형제 교회들이 직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형제운동의 개척자는 일단의 청년들로서 대부분 영국 더블린에 소재한 트리니티 대학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반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배와 교제를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중 어느 누구도 이같은 모임이 장차 큰 운동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실상 그들은 결코 새로운 교단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같은 시도야말로 그들이 함께 모이는 순수한 목적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그들중 일부는 전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남아 있었고, 그중 극소수만이 성직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같은 성직 수여 관행은 곧 비판을 받음으로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이 형제회 운동의 초기 인도자 중에 하나가 바로 존 넬슨 다비(주후 1800-1882)로 불리는 아일랜드 교회 신부였다. 그는 비상한 지적 능력과 성품의 소유자로서 각 교단 소속 교회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시기에 그리스도 교회의 연합을 증거하는 전세계적 협력을 꿈꾸었다. 
 
여하간 다비의 여러 견해는 개방적인 그룹보다는 배타적인 그룹에서 고수되었다. 
그리고 1848년 개방적인 그룹과 배타적인 그룹간의 분열이 일어났을 때 다비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게 '배타적인 형제회'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같은 형제회 운동은 더블린에서 시작하여 영국 전역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 
영국의 첫번째 형제 교회는 1831년 플리머스에 세워졌다. 그래서 이들에게 그 지명을 따라 플리머스 형제교회(Plymouth Brethren)란 낯익은 이름이 붙여졌다. 
플리머스에 세워진 형제 교회의 두 인도자는 사무엘 트레겔레스(Samuel P. Tregelles,1813-1875)와 그의 친척이 되는 벤자민 뉴톤(Benjamin W. Newton, 1807-1899)이었다. 뉴톤은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출간된 헬라어 신약성경역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책의 주편집자였다. 
또다른 형제 교회 가운데 중요한 교회는 브리스톨에 위치한 베데스다 예배당(Bethesda Chapel)으로서 스코틀랜드 태생 유대인 목회자인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 1805-1866)와 독일계 죠지 뮐러(George Muller, 1805-1898)가 공동으로 사역한 곳이다. 특히 죠지 뮐러는 브리스톨에 1836년에 고아원을 세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고아원을 운영한 사람으로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도 그가 시작한 고아원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 또한 바네이도 박사(Dr. T. J. Barnado)도 형제 교회 멤버로서 1870년에 영국에 죠지 뮐러처럼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교리와 신조 
사실상 성경 교리에 관한 한 개방적인 어떤 형제 교회들은 교회사에서 정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리를 그대로 믿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확고히 붙들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는 바로는 “믿음과 실천의 기반이 되는 절대 무오한 성경”에서 그 같은 교리와 믿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타락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복음 전파의 열망 때문에 그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순수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무리들과 기꺼이 합력해서 일하기도 한다. 실례로, 미국의 빌리 그래함 전도팀이 영국의 여러 섬에서 전도사역을 할 때 개방적인 형제 교회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그들과 합류해서 일하였다. 
 
이들이 지은 찬송가곡 중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비중을 둔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특정하게 주님의 재림 시기를 정하거나, 현실 생활의 도피를 가르치는 극단적 종말론주의자들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경건한 삶의 필요를 강조하고자 힘쓰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이 형제 교회들에서 발견하는 매력은 형제 사랑을 기반으로 한 풍성한 교제와 지적인 자유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물론 모든 형제교회가 다 성경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정통교리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실행(實行) 
형제 교회의 특징적인 요소는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이유 때문이다. 
개방적인 형제 교회 중에서 침례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 한에서 베풀어지고 있다. 그리고 침례의 방법도 물에 담그는 침수(浸水)를 지지한다. 이들은 매주일 아침마다(어떤 교회는 저녁 시간) 성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억하고 있으되, 이같은 주의 만찬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주님이 베푸신 것으로 믿는다. 
분명 이같이 매주일 드리는 성만찬이 형제 교회들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이다. 그리고 이들이 떡과 잔을 떼기 위해 모일 때 그들은 예배 참여자들을 미리 선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질서에 따른 참여로 인해 성만찬 시간은 경건하게 실행되고 있다. 이때 여러 형제들이 찬송가를 선택하여 부를 것을 제안하고, 기도와 감사로 회중을 인도하며, 그리고 성경 본문을 읽거나 문맥을 간단히 해석하면서 주님의 성품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찬송하면서 떡과 잔을 대한다. 
형제 교회에는 교단 등에서 위임한 목사(목자)을 두고 있지 않다. 
 
물론 교회내에는 성직자 개념으로서의 목사(목자)가 아닌, 은사로서의 목사(목자)를 두고 있으며, 이 은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해고시키거나 교회의 운영에 대해서 좌지우지할 수 없다. 주님께서 교회의 필요를 따라 친히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상 각국의 교회마다 복음 전도와 성경을 가르치는 상당히 많은 수의 전심사역자들이 사역하고 있다. 각 지역 교회는 장로들 혹은 감독들로 불리는 책임있는 인도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나, 이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벗어나서 타 교회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감당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장로들은 직분이나 권위보다는 본이 되는 삶을 통하여 성도들을 인도하기를 힘쓴다. 
중요한 문제는 형제교회가 워낙 분파가 많으므로 인하여 한마디로 그 성격을 말할 수가 없다. 또 그 교리와 신학이 매우 다양하다. 
 
어느 형제교회 분파는 우리나라에 구원파 사상을 전하였다고 보여진다. 
또 어느 형제교회 분파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현실도피적이며 체제와 국가를 적대시하는 분파를 초래하였고, 또 어느 형제교회 분파는 지방교회와 같이 삼위일체나 기독론을 부정하는 이단체제로 분파되었으며, 어느 형제교회 분파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주의의 종말론을 고수하고 있다. 
 
실상 많은 형제교회라고 불리는 집단들이 이단적인 교리와 사상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형제교회라고 불리는 일련의 집단은 구원파와 유사한 교회라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전문적이며 체계적인 신학을 공부하는 제도가 없음으로 인하여, 잘못된 사상과 견해에 빠져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한 잘못된 주관적인 오류가 성령의 사역이라고 잘못 판단되어지므로 인하여 비판을 받지 않는 것이다. 
소위 성령의 인도로 선포된 말씀이 이단적인 주장을 갖고 있음으로, 그 주장에 대해서 서로 논쟁과 비판을 가져오며 결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다. 
 
지방교회의 워치만니가 형제교회의 존 다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형제교회 중에서 배타적인 분파들은 일반교회를 사단과 음녀의 교회라고 배척하는데, 그 근본적인 첫 번째 이유는 그들만이 갖고 있는 이단적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교리와 사상이 일반교회와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배타적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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