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3-27 10:49
신약교회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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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944  

신약교회의 배경

 

 

 

 사도시대는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한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령강림절 (오순절=>그리스도교에서 부활절 후 50일 되는 날, 즉 제7주일인 오순절(五旬節)날에 성령이 강림한 일(사도 2장)을 기념하는 축절) 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직제자(直弟子)인 사도들이 살아서 활동하던 시대, 즉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의 최초의 한 시기를 말한다. 연도상으로는 30~33년, 또 33~100년경까지인데, 이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신약성서의 《사도행전(使徒行傳)》과, 여러 서간문들이 있다.

 

  

 

신약교회(新約敎會) 의 배경(背景)
 

 

그리스도교의 역사.

 


넓은 의미로는 천지창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종교적 발달사가 포함되며,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오순절(五旬節)의 성령강림(聖靈降臨)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말한다.

 

 


교회사는 교회의 기원과 성장, 그 기복성쇠(起伏盛衰)를 연구 ·조명한다. 
또한 교회사는 그리스도교의 외적인 팽창과 축소, 선교와 박해의 역사, 교회행정과 기강의 유형적인 조직, 교리와 신학의 발달, 예배, 다양한 예배의식과 예식, 기도문, 성시(聖詩), 성가, 경건의 표시, 윤리, 자선단체의 활동 등 모두를 포함한다. 

 

교회사는 곧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사탄의 세력과 그 영향력에 의하여 펼쳐진 투쟁의 기록이며, 교회의 발자취이다. 교회 자체의 역사는 사도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 고대 】 그레고리우스(그레고리오) 1세(590)까지의 처음 6세기 동안이다. 이를 다시 세분하면, 
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도시대 
② 박해시대와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와 니케아 공의회(325) 
③ 교회와 국가연합시대, 교리의 공식화와 전(全)교회 공의회가 있는 시대(590)가 된다. 
   이 시대는 유대 땅에서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정복하고 전세계화되는 단계이다. 
   이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사도(使徒) 바울로이다.

 

 

 

【 중세 】 중세의 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大帝)로부터 M.루터의 종교개혁까지(590∼1517)이다. 
① 그레고리우스 1세부터 그레고리우스 7세까지(590∼1050)의 선교시대:
   교회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켈트족 ·슬라브족 ·튜튼족 사이에 퍼지고, 이슬람교가 일어나 흥성하는 한편, 큰 분열이 동방과 서방 교회 사이에 일어난다.

 

 


② 절대교권자인 그레고리우스 7세부터 보니파티우스(보니파시오) 8세까지(1050∼1294):
   십자군 원정,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와 스콜라 철학의 대두, 대학과 고딕 건축양식의 발생, 이 단 종파의 발생과 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성행된 시대,

 


③ 교황권의 쇠퇴와 종교개혁의 징조가 보인 보니파티우스 8세로부터 M.루터의 95개조 논제가 나오기까지(1294∼1517):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교황의 분립, P.콘스탄스의 등장, 바젤에서의 개혁회의 개최, J.위클리프, J.후스, G.사보나롤라, 베셀 등의 활약,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와 타울러의 등장, 르네상스의 싹틈, 인쇄술 발달, 신대륙 발견 등이 있은 시대이다.

 


【 현대 】 종교개혁(1517)으로부터 현재까지이다. 신교와 구교에서 다양한 복음주의 교회들이 창설되었고, 독일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이신론(理神論) 등이 출현하면서 성서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고,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에 갈등이 생긴 시대이다.

 


① 종교개혁과 로마가톨릭의 반동시대(1517∼1648), 
② 비국교도와 주관적 신앙심과 투쟁한 스콜라 철학의 논쟁적 고백주의 시대(1650∼1750), ③ 합리주의와 종교적 부흥과 교회연합 시대(1750∼현재)로 구분된다. 
 

 


디아스포라 (Diaspora) 

 


팔레스타인 외역(外域)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즉 ‘이산(離散) 유대인’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이산’을 뜻한다. 역사적인 서술에서 이 단어는 헬레니즘 문화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통해 그리스 근역(近域)과 로마 세계에서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키고 있다.

 

 

 

【 역사적 배경 】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바깥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BC 8세기 후반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이 BC 734∼BC 721년의 아시리아 침입으로 멸망하여 아시리아 영토에 편입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이 고향을 떠났다. 

 

또 BC 598∼BC 587년 사이의 바빌로니아인(人)의 침략으로 남쪽의 유대 왕국이 멸망하자 비슷한 이주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개척자 같은 정신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다른 지역, 특히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그 후, BC 4세기 초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자, 근동에서는 그리스인(人)의 통치에 의해서 파급된 그리스 문화에 실려 문화적인 혁신을 겪게 되었다.

 

 


또 교역과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한데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던 탓으로 유대인의 이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매우 능동적으로 반응하여, BC 1세기 말엽에는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에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나타났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2장 9∼11절에도 바르티아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키레네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언급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 제국의 3대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다. 
안티오키아에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은 BC 150년 이후였으며, 로마인은 그보다 더 늦었는데, 규모가 크고 부유하였으며 영향력이 강하기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신약시대의 디아스포라 학자 필로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만도 100만 가량 있었던 것 같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어서 헤브라이어와 아람어를 사용하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상용(常用)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도시들에서 주로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하던그들은본토 유대인들보다 높은 수입을 올렸으며, 그들이 행하는 무역의 증요성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원주민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의 시민권이 제국(帝國)의 여러 곳으로 넓혀질 때, 바울로 사도처럼 그 시민권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 문화적 영향 】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적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70인역(譯)’이라고 불리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역본을 출간하여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그들 중에서 많은 학자 ·저술가가 나왔는데 필로가 가장 유명하였다.

 

 


그리스 문화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지도력으로 생각하여 예루살렘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성전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야훼(하느님)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예루살렘(성전)에서만 거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종교적 회당(會堂) 즉 시나고그가 디아스포라에서 생겨났으며, 그것은 팔레스타인으로 역수입되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나고그를 통해서였으며, 이 회당 조직이 사도 바울로의 전도여행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목할 것은,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최초로 반(反)유대인적 풍조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성, 경제적 번영, 특권들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가 퍼졌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체사레아 등지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났고, 법정에서는 유대인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끊임없는 반목이 계속되어 결국 칼리굴라의 박해로 이어져, 학자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로마 법정에 박해의 중지를 호소하였는데, 이 박해는 칼리굴라의 암살로 끝났다. 
반유대적인 편견(偏見)은 키케로, 페르시우스, 세네카, 퀸틸리아누스, 타키투스 등 로마의 문학가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2000년을 두고 전유럽과 중근동(中近東)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 집요하고도 비이성적인 반유대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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