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04 11:30
[1]미래교회를 위한 설교-내러티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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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1,788  
미래교회를 위한 설교-내러티브 설교
김운용(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사람들은 그들이 듣고 말하는 이야기들,
그들이 보고 연출하는 드라마들, 
더 나아가 자기들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흡수되고 있는 그 사회와 문화의 신성한 이야기들,
바로 이러한 것들에 의해 
삶의 가장 깊숙이 내면적 경험을 형성한다.
-스티븐 크라이테스(steven crites)1) 

들어가는 말: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

미래학자이자 경영전략가인 피터 슈워츠(peter schwartz)의 inevitable surprises(피할 수 없는 놀랄 일)가『이미 시작된 20년 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2)이 책에서 저자는 2030년까지 어떤 놀랄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를 예측하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2030년의 세계는 어떠할까? 세계는 대규모 인구 이동을 경험하게 될 것인데 중국 청년들은 일자리와 신붓감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고, 이슬람 청년들은 유럽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유럽 주요 국가는 대규모 이슬람 사회가 형성되게 되지만 이들은 유럽 사회에 융합되지 못하고 새로운 게토를 형성하여 대부분의 유럽 도시는 이슬람 사람들로 붐비는 빈민굴로 전락할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법과 질서의 국제적 토대가 형성되면서 번영을 누리게 되겠지만 또 다른 많은 나라는 테러, 종교분쟁, 정치부패, 인종갈등, 마약, 에이즈 등에 시달리면서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파키스탄 등에서는 이슬람의 반란이 예상되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종교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멕시코는 마약전쟁, 아프리카는 에이즈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또한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며, 생명공학의 발달로 70대도 젊은이처럼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컴퓨터가 매우 영리해져서 인간의 능력을 앞서게 되는 특이점(singularity)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며, 인류는 역사상 “세 번째 대변혁의 시기”로 접어든다고 전제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일 일도 잘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향후 30년 후에 일어날 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 슈워츠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래의 뿌리는 바로 오늘의 경향과 흐름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는 2001년에 일어났던 미국의 뉴욕 무역센터 빌딩의 테러를 예로 든다. 그날의 테러 공격은 역사상 가장 잘 예측된 것이었지만 미국 지도자들이 그것을 무시함으로 초래한 비극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주장한다. “당시 세계의 지도자들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장기적인 생각을 했다면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불황, 수백만 명의 죽음, 반세기에 걸친 세계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미래가 열릴 것인가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지도자의 통찰력과 판단력이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가에 따라 미래는 전혀 다른 세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변화의 흐름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놀라움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에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좀 더 멀리 내다보면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다. 

호화 여객선인 퀸 메리호를 방문한 손님이 선장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 배가 완전히 정지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 질문에 선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완전히 브레이크를 걸고 난 후에도 약 2km 정도는 더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참 위험하겠는데요?” 그 질문에 선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배의 선장 정도 되려면 최소한도 2km 이상 앞을 볼 수 있어야 되겠지요.”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변화에 대한 판단과 적절한 대처 능력이다. 

파괴자들 틈바구니에서-“영광과 나약함을 지닌 교회”

로마의 성베드로 사원, 중앙 회중석에 커다랗게 쓰인 라틴어 글귀가 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를 기념하여 세워진 그 영광스런 장소에 쓰인 글귀는 그의 처절한 실패를 기억나게 하는 충격적인 글귀이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보라 사단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눅 22:31-32, 공동번역) 왜 이렇게 영광스런 자리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연약한 교회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인가? 

실제적으로 그 말씀이 들려지던 때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장담만 하고 있었지만 ‘나는 결단코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만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어린 교회는 커다란 위기 앞에 놓여 있었다: 그대로 무너지느냐, 다시 일어서느냐? 그렇다. 교회는 키질을 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시골 출신인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농부들이 바람 부는 날에 밀알을 지푸라기나 먼지에서 가려내어 깨끗하게 하기 위해 키질을 광경을 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키질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한다. 첫째는 자신을 깨끗하게 할 가능성이며, 둘째는 자신도 날아 가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교회는 여러 시대를 거쳐 오면서 여러 번 키질을 당했다. 오늘도 교회는 영광스럽게 설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나약하게 무너져 내릴 것인가를 결정지을 거대한 도전 앞에 놓여 있다. 오늘날의 문화적인 흐름, 사회적인 변화는 교회에 심각한 위기로 와 닫고 있다. 시대의 도전과 위기를 경험하면서 교회는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함몰하여 날아 가버릴 가능성을 안고 있다. 시대정신과 풍조. 전자공학의 무한한 발전과 활용으로 인하여 생겨난 엄청난 힘, 특히 이미지와 음향의 대폭적인 진동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으로 국경과 문화, 계층과 영역간의 모든 경계선을 붕괴시키는 현상 전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현상이나 풍조가 오늘날 교회를 키질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화 사회적인 변동은 교회를 파괴할 수도 있고, 우리를 흔들어 깨워서 우리 신앙을 정화시키고 지평을 넓혀 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피에르 바뱅(pierre babin)은 오늘의 

교회는 “영광과 나약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교회”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도전 앞에서 여전히 영광스러운 교회로 설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인 설교는 이러한 문화 사회적인 변화 앞에서 크게 도전(키질)을 받고 있다. 오늘의 말씀사역을 갈수록 어렵게 만드는 시대적인 변화 앞에 설교자들은 서 있으며, 특별히 그러한 시대적인 변화는 오늘의 말씀 사역을 무력하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변화, 청중들의 인식과 메시지 받는 태도의 변화, 지적 구조의 변화 등은 이제 과거와 같은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구가하는데 적신호를 나타내고 있다. 실로 우리는 “설교의 파괴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설교자들의 경각심을 요구한다. 말씀의 해석자들로서 뿐만 아니라 시대의 해석자들로서 오늘을 보며, 바른 설교의 신학적 이해와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적인 방법론에 대한 재점검을 요구한다. 

여전히 중요한 사역, 그러나

우리는 설교가 얼마나 소중한 사역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과 함께 특별히 헌신된 사람들로 여기에 서있다. 오늘의 사역자들은 다양한 사역들을 감당해 가면서 각기 강조점을 달리할 수 있다. 교회를 개혁하는 것, 사회 정의를 세워가는 것, 치유사역이나 상담 사역, 복음 전도, 선교 등 교회의 모든 사역은 다 중요하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러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불러주심,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들의 삶 속에 비춰주심에 대한 복된 소식은 설교를 통하여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 정의가 우선적으로 선포되는 것도 설교를 통해서이다. 영육의 치유도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통해서이다. 삶의 변화와 인격의 변화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고 응답되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사건이다. 

우리는 설교에 의해서 은혜를 받아 형성되고, 모양 지워진 사람들이다. 우리의 신학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인 요한 칼뱅으로부터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신학자들은 그들 자신이 설교자였고, 그들의 신학의 모든 작업들을 설교의 임무와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이해했다. 칼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신학은 그 중심에 있어서 ‘설교준비’의 행위”라고 했다. 또한 조직신학자인 게하르드 포오드(gerhard o. forde)나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돈 드 브리스(dawn de vries)도 주장하기를 “신학을 말씀의 선포를 위해서 있다”(theology is for proclamation)고 주장한다. 

개혁교회 전통은 “삼중의 하나님 말씀”을 주장한다. 첫째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둘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성경말씀이며, 셋째는 설교를 통해 새롭게 선포되는 말씀이 그것이다.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이 선언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형편없는 설교를 많이 듣게 되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것을 믿는다. 단지 그러한 형식이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온 것이거나, 우리 귀에 즐겁게 들리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일단 그것을 기대하면서 설교를 들을 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울려 퍼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듣는 것을 중단할 수가 없다. 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두신 그 하나님, 물질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원자와 같은 소립자들이 움직이는 것도 아시는 그 하나님이 인간의 말을 통해서 오늘도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설교를 듣는 것은 실로 황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설교 사역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가장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신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마틴 루터가 그의 노년에 말하기를 “나는 오래 동안 설교해 왔고, 설교에 대해서는 이제 아주 숙달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강단에 올라갈 때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갑니다”라고 했다.

로버트 듀페트 (robert g. duffett)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오늘의 시대를 조명하면서 오늘의 설교자들은 “아무도 듣지 않으려는 시대 속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말씀 전파(설교 사역)를 위임하시면서 “때를 얻든지 못하든지”(in season and out of season) 힘쓸 것을 명하셨는데(딤후 4:2), 그 말씀에 비추어보면 오늘의 시대는 점점 말씀을 전하기가 어려운 시대(out of season)가 되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모두가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인식하는 각 분야의 사람들은 어떻게 적절하게 변화에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1세기동안 영광스럽게 설교 사역을 감당해온 한국 교회도 자신하고 장담만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적인 변화를 읽으면서 준비하여야 할 때이다. 모든 시대는 언제나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21세기와 함께 한국 교회는 이전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context)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과거 500년 동안 경험했던 변화보다도 지난 50년 동안 경험한 문화 사회적(socio-cultural) 변화의 폭은 훨씬 컸다. 앞으로도 이러한 변화의 속도와 폭은 더욱 급격해 질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은 오늘의 설교 현장의 변화뿐만 아니라 청중들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청중들이 관심하는 것도 달라지게 했으면, 메시지를 받는 방식도 달라지게 했다. 뭔가 달라지지 않으며 설교의 영광을 계속하기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서 있다.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시대에서도 복음 설교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위임받은 설교자들은 오늘의 시대적 변화와 특징에 깊이 관심을 가지면서 그러한 시대에 적합한 설교의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오늘날의 설교가 “가장 비난하기 곤란한 소음”의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주장한다. 시대적인 변화와 청중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서의 설교가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지만 참아주는 수준에 머물게 되고, 다른 곳에서는 “나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외치며 비난하지만 오늘날 강단에서 행해지는 설교에 대해서는 가장 비난하기 곤란한 소음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마르바 돈(marva j. dawn) 역시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를 조명하면서 “오늘의 문화가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의 예배와 설교가 그러한 문화적인 특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물결은 설교 사역을 무기력하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향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중들의 관심과 혼을 앗아가 버리며,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벗어나 포스트모던 가치체계로 나아가는 문화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해체주의적인 경향을 띠면서, 말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구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성전은 이제 관광명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주일 예배 참석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 중심 선교국이었던 제 1세계, 혹은 2세계도 이제는 새로운 선교지로 재해석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종교 연감은 종교 선호도에서 1951년 조사치와 1991년도 조사치를 비교한 결과, 기독교는 16%가 감소했지만 다른 종교 선호도는 600%가 증가했고, 무종교에 대한 것도 450%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도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장은 둔화 혹은 감소 추세에 있으며, 반기독교적 정서로 점점 팽배해 가고 있다. 레저 문화의 발달, 종교 다원화 경향,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 등이 한국 교회의 성장을 둔화 시켰다면 이것들은 앞으로 더욱 강한 돌풍이 되어 밀려올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속해 있는 그 사회 속에서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다. 과거 한국 교회에서 설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삶의 자세를 위한 정보의 출처였으며, 설교자는 사회에서 선각자적인 위치를 누리며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대사회적인 영향력의 상실과 함께 “설교의 영광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화 사회적인 특징들은 현대 설교자들이 전적으로 다른 삶의 상황을 살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설교자가 변화하는 이 시대 속에서 이 시대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이며, 변화된 시대 속에 “어떻게” 말씀 사역을 감당할 것인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현대 설교학의 새로운 추구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지면서 월터 브르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제 기독교의 설교는 전혀 새로운 문화적, 인식론적(epistemological) 상황에서 이해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과거의 형식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설교가 행해질 상황은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교회의 신학적 절대 요소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기 때문보다는 그러한 절대 요소들이 설명되어지는 옛 방법들이 점점 신뢰받지 못하며, 제 기능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옛 방법들이 점점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의 도래는 설교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이와 같이 옛 설교 방법들에 대한 불신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설교 현장으로부터 기인되었으며, 전달되지 않는 설교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의 중심적인 주제는 “어떻게 들려지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설교일 수 없으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faith comes from hearing)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설교자들이 단순히 설교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말해야” 전달 될 수 있을 것인가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 설교학이 지난 30여 년 동안 가장 깊이 관심을 가져온 것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설교의 지속적인 사역을 위해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추구였다.

20세기 후반은 여러 가지로 강단의 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다. tv의 출현과 함께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의 감각 기관의 변화가 초래되었고, 지적체계와 다양한 시대적 흐름은 사회 제도와 기존의 권위에 대한 재해석이 불가피한 시대가 되었다. 또한 전통적인 종교의 언어가 과학시대 속에서 그 의미를 잃고 무기력해져 가는 시대에 서서,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70년대 북미의 설교학계를 중심으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점점 강줄기가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북미의 설교학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설교학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역시 복음주의 교회의 설교나, 로마 카톨릭교회 설교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이 1971년,『권위 없는 자처럼』이 출간되면서부터 였다. 3)이 책은 1971년에 출판된 후 수차례의 개정본이 나왔고, 지금도 가장 대표적인 설교학 교실에서 연구서로 읽혀지고 있는데, 이 책은 새로운 설교학 운동을 시작하게 한 발원지가 되었다. 이것을 유진 라우리는 이것을 “북미의 설교학계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현대 설교학에 있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그 동안의 설교학의 흐름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어놓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설교학계에 전혀 새로운 가지를 접목시킨 것은 아니지만 크래독은 정교하게 완성된 형태(gestalt)를 제시하면서 설교학에 있어서 새로운 사고를 가능케 했고, 그로 인해서 설교학계에서는 과거와는 다른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게 되었다. 크래독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는데, 그 추구와 영향력 때문에 흔히 이것을 “설교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일련의 설교학적인 관심과 연구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설교 방법과는 전적으로 다른 설교학적인 틀(paradigm)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별히 이러한 흐름은 설교학에 있어서 패러다임 변환을 동반하게 되었다. 논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전통적인 설교 형태에서 새로운 설교 방법론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여러 설교학자들의 설교신학과 현대 설교학에서의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집합적인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 형태로부터의 설교학적인 패러다임 쉬프트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설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수정 보완되면서 여러 줄기로 발전하고 있다. 

그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귀납적 설교를 지향한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헬라의 수사학에서 널리 사용되던 대표적인 방법론이었다. 전자는 보편적인 사실을 먼저 제시한 후 그것을 분석하고 설명해 나가면서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형태라면, 후자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보편적인 사실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연역법이 어떤 개념을 분석하여 전달하는데 효과적이며 좌뇌적인 특성을 따라 전개되는 방식이라면, 귀납법은 청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할 수 있는 강화(講話) 방식이며 주로 우뇌적인 특성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라틴어 어원이 갖는 의미처럼 연역법이 ‘무엇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de ducere; lead from)이라면, 귀납법은 ‘무엇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de inducere; lead toward)’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연역법은 말하려는 중심 주제가 서두에서 선명하게 제시되고 그것을 설명하고 해설해 가는 형식이라면, 귀납법은 설교의 끝 부분에서 드러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연역법은 전통적인 설교 방법에서 널리 애용되었던 방법론으로 여기에서는 먼저 설교의 중심 메시지가 정해진 다음, 그 주제를 설명해 주는 3-4개의 대지(point)로 구분된다. 그러한 대지들은 주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면서 그것을 교리화 해주는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자연히 여기에서는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며, 그러한 사실을 규명하는 구조를 갖기 때문에 언제나 논증적이다. 수사학적인 특성을 통해서 살펴보면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 변호사가 자기의 의뢰인(client)의 무죄를 규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증거와 사건에 대한 케이스 등을 통해 변증하는 형태와 유사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은 논리적으로 변론을 듣는 청중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심적인 목표가 된다. 이렇게 연역적인 구조를 가지는 설교는 보편적이고 명제적인 결론, 즉 설교의 주제나 중심사상이 먼저 제시된 다음에 그것을 몇 개의 대지 혹은 하위 주제들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예증하면서 권면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청중들의 삶의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어떤 주제나 교리에 대해서 명료하게 가르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귀납법은 전통적인 연역적인 방법과는 달리 인간의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의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갖는다. 다시 말해 “아하!”의 순간(aha-point)을 향하여 발전되어 가는 형태로 각 부분들을 결론을 향하여 집약적으로 세워져 나가는 작은 단편들 혹은 움직임들로 구성된다. 강의나 강연이 주로 연역적인 형태를 취한다면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귀납적인 형태를 취한다. 귀납적 설교는 덩어리로 묶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결론)을 향해 계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움직임(movement)을 가진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특성,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가는 과정 때문에 그 다음 과정을 기대하게 함으로 청중들로 하여금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귀납적인 설교는 청중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자신의 느낌을 느끼며, 그리고 자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기본적인 틀을 가진다. 그렇게 하여 청중들 자신이 메시지의 소유권을 갖도록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피동적인 위치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가진다. 

두 번째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성경의 대부분은 신학적인 윤리적인 명제들의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갈라진 바다를 통해 도망 나온 히브리 노예들의 이야기들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로마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흘 후에 살아나셔서 빈 무덤이 되었다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가장 근접하면서도 가장 잘 붙인 이름은 아마도 “성경은 거대한, 그리고 시대를 함께 연결하는, 그리고 복합적인 이야기”라는 제목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그 구조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귀납적인데,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움직임을 갖는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클라이맥스를 가진다. 이야기는 곤경상황과 함께 시작된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곤경상황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남자는 죽음 직전에 놓여 있다.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는데,  제사장이 그의 곁을 그냥 지나가버리고, 그리고 레위인도 그랬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미워하는 사마리아인이 그 남자를 들쳐 업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앞으로의 치료를 위해서 치료비도 다 지불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전달되는 중심 메시지를 듣게 된다. “이 셋 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더군다나 이야기는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커다란 힘을 가지고 진리를 전달한다. 현대설교학은 확신케 하고,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이야기의 힘을 신뢰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크게 드라마틱하고, 성경의 이야기들을 다시 들려주는데 있어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나 소설의 플랏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성경 외적인 이야기들을 성경본문에 함께 나란히 놓기도 한다. 이러한 설교에 있어서 가장 잘 수행한 사람은 챨스 라이스이다. 라이스와 같이 뛰어난 이야기꾼에게는 이러한 설교 형태가 아주 강력하게 될 수 있다. 또 다른 설교학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이야기식의 패턴을 따라 작성하려고 했다. 설교는 확대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retelling)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설교 형태는 이야기식의 패턴을 따라 처음의 긴장관계로부터 그것에 대한 해소하는 형식으로 움직여간다. 그러한 설교는 유진 라우리의 대표적인 책의 제목과 같이 “설교학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빗 버트릭에 의하면 설교는 신학적 분야를 통한 “플랏을 따라 구성된 일련의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설교자의 스토리텔링 기술을 보다 날카롭게 하도록 해주며, 그 이야기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해준다. 

세 번째는 경험(experience)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에 강조점을 둔다. 여기에서 설교의 목표는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다. 설교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며, 어떤 명제나 주제에 대한 진리를 청중들에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현대 설교학의 가장 중심적인 틀 가운데 하나는 설교의 목적을 말씀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설교의 구조는 주로 말씀에 관한, 혹은 교리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전해주는 정보 전달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현대 설교학은 주로 말씀의 경험에 주안점을 둔다. 어떤 신학적 명제나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적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을 설교의 주요 목적으로 삼던 전통적인 설교와는 달리 청중들이 복음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식적이고 명제적인 설교로부터 벗어나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의 형식을 내세운다. 여기에서 “경험”이라 함은 인간의 의식 속에 말씀을 깨닫게 되는 차원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것은 지적, 심미적, 감정적 차원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차원에서의 인식 작용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가령 드라마에서나 내용이 전개되어 가는 동안 어떤 드라마의 결론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깊은 감동을 맛보게 되는 차원이 바로 그 드라마가 제시하는 메시지를 경험하게 된 순간이 된다. 또한 수사극에서 a라는 인물이 범인인지, b라는 인물이 범인인지, 혹은 c라는 인물이 범인인지 궁금해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드라마가 전개되는 동안 여러 가지로 복선이 깔려 있던 사실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그 사람이 범인이었구나’ 외치게 되는 단계가 바로 경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단계이며, 어떤 사실을 전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의 특성은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적 개념을 받아 들여 설명한다면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해석학적인 경험”(interpretive experience)이다. 가다머는 그의 책, truth and method에서 “경험”에 대한 두 독일어 단어를 구분하여 설명해 주는데, erlebnis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 “이것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색에 의한 결론(speculation)과 경험론(empiricism) 사이에서 주어지는 결과”로 주어진다. 한편 erfahrung은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것으로서 주관-객관의 이분법의 주관성(subjectivity)은 극복되게 되며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 “사건”(event; geschehen)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이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은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것은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본문을 통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차원에 참여하게 되는 통합적인 사건(integrative event)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험의 차원은 erfahrung의 차원이며, “인간의 이해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인 철학적 성찰”로 이해했던 그의 해석학의 이해처럼 설교는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하는 철학적 작업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설교는 회중들이 전인적인 차원에서 설교자가 제시한 말씀을 통해 성경의 내러티브를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만남(encounter)을 경험하게 되면서 청중들의 직관적인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헨리 미첼은 “대리적인 만남”(vicarious encounter)이라고 칭한다. 즉 설교를 통해 성경의 사건과 말씀을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설교의 요점을 제시하는 것에서 단순하게 이야기의 구조로 대체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해 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주로 청중들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해석해 줌으로서 그 사건을 오늘 여기에서 대리 경험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청중들은 희망과 가능성의 마지막 경축적인 대단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치밀하게 구성된 이야기의 형식을 따라 설교는 진행되게 된다. 이렇게 현대 설교는 인식적이고 명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에 강조를 두면서 어떤 정보 제공이나 논쟁을 통한 설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이것은 청중들이 의미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이해의 사건”(event of understanding)이 된다.

네 번째는 설교의 형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동안 설교자들은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해 왔지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지를 못했다.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은 이러한 현상을 “설교 방법론에 대한 학대”라고 지적한다. 어떻게 듣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설교의 효과성을 높여 주지만, 설교 방법론에 대한 무관심은 설교에 있어서 지루함과 설교에 대한 권태감을 야기하는 주원인이 되어진다. 이것이 단순히 단조롭고 재미없는 설교자를 꼬집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루함과 권태감은 설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며, 믿음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항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되게 한다. 

설교의 형태는 마치 설교라는 그릇을 빗어내는 진흙 모형(shape)과 같은 것으로 “설교의 자료들이 조직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것은 설교 가운데서 무엇이 일어나게 할 것이지,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조직적인 계획(organizational plan)이며,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지배받아야 하는 요소이다. 설교의 내용(content)과 함께 설교의 형태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설교가 흘러가는 방향과 그 흐름을 결정짓는 강의 제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형태는 어떻게 설교가 보다 의미 있게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절대 필요한 요건이며, 설교에 있어 틀(shape)과 활력(energy)을 가져다주는 요소가 되어진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내용과 함께 설교 사역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설교 형태는 “무엇을 말하고 행할 것인가와 무엇을 연결시킬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조직적인 계획”이다.

설교자가 설교의 자료들과 내용을 어떻게 위치시키느냐는 설교의 형태와 관련된 사항인데, 오늘의 시대에서 설교의 힘은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설교의 구조를 어떻게 하느냐와 달려있다. 가능한 다양한 형태가 많이 있지만 설교의 목표를 어떻게 이루어가며, 어떻게 설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는 어떤 설교의 형태를 취하여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게 설교자가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설교는 지루함을 야기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오늘의 설교자는 변화하는 시대, 달라진 청중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할 것인가는 설교자의 지속적인 관심이 되어야 한다. 

설교 형태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도 보면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경우에 한 가지 설교 형태에 고착되어 있는 실정이다. 다양성은 거의 무시된 채, 단일 방법론을 고집하거나, 어느 한 형태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주로 대지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언제나 대지 설교만, 강해 설교자들은 강해설교 형태에만 고착되어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것은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효과적인가 비효과적인가의 문제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이었던 신약성경만 보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형태를 예수님을 사용하셨는가? 사화(史話), 시, 비유, 묵시, 찬송, 전설, 위인전, 비유적인 역사 내용, 내러티브, 논리적 교리, 편지 등 다양한 문학적인 표현과 구두적인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목록들은 오늘의 설교들에게 이어지면서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4세기 이전까지 고정된 설교의 형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청중들 개개인과 세대, 그리고 지역과 문화에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져왔다. 이러한 다양성을 외면한 채 1년 12달 늘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형식만 따른다면 우리는 스스로 말씀의 다양성을 놓쳐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설교의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설교자들은 주로 설교의 효과는 논리적으로 내용을 요약하고 배열할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증명하고 명료화하기 위해 명제와 많은 예화들을 사용하고 있다. 설교의 기본적인 구조는 주어진 중심 명제를 중심으로 3-4개의 대지로 구분하며, 명제와 관련한 정보를 제시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다. 그러므로 어떻게 듣게 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이것을 제시하며 전달할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말씀을 경험하게(experience) 하는 차원보다는 단순히 말씀의 정보를 전달하는(transmit)하는 관점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대부분의 설교는 주제나 본문이 가지는 의미를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설명함으로서 설교를 시작하는 연역적인 구조를 가지는데, 설교의 아이디어나 생각들을 조직하여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설교 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 이러한 연역적인 방법은 크래독이 주장한대로, 설교의 움직임(movement)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청중들이 메시지를 받는 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지루함과 메시지에 대한 익숙함을 느끼게 하여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설교의 틀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유진 라우리에 의하면 “짜 맞추는 것”(construct)이며, 이러한 틀을 따라 준비된 설교는 얼기설기 붙여놓은 “개집과 같은 설교”가 된다. 여기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형성되기(doing time)보다는 주로 주제를 설명하는 덩어리를 만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전해주는 공간적인 관점(doing space) 속에서 행해진다. 여기에서 준비된 설교의 자료는 전체 개요에 맞추어 끼워 넣는 것이며(assemblage)이며, 짜 맞추는 것은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이다. 이러한 설교의 틀에서는 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 개 혹은 그 이상의 작은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동하는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으며, 주어지는 메시지에 대해 새로운 감격을 가지고 듣게 하기에는 어려운 구조이다. 즉 ‘청중들이 이 설교에서 이 자료들을 가장 잘 듣게 할 방법은 무엇일까?’가 설교의 개요를 작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어떤 정보나 기독교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으나 설교의 역동성과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를 구성할 때 단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감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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