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4:17-24)
경건은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생활을 예배출석, 기도, 성경읽기와 같이 관찰 가능한 종교 행위들만으로 측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외적인 측면에서의 생활들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만으로 충분하게 여긴다면 종교 형식주의에 머무는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없겠으나, 목회실제에 있어서는 종종 이러한 외적 생활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다소 안도를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1. 경건생활의 토대: 그리스도를 배워가며 본받음
본문 엡 4:17-24이 주는 경건생활의 교훈은 분명히 영적이며 또한 도덕적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의 토대와 출발은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로 요약이 됩니다.
목사의 으뜸가는 책임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설교는 성경을 풀어내는 것이어야 하며, 꾸준하게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를 불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롬 8:29)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갈 4:19)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2. 이방인이 사는 것 같이 살지 말라
그리스도를 배운 자들에게는 변화가 요구되며 또한 기대가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가졌던 이방인들과 같은 생활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삶이란 17절에 말하듯이 “허망한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요약이 됩니다. 썩어질 것, 결국 사라질 것, 그 자체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 사는 생활 입니다. 이러한 생활에 대하여 18절에서 보듯이 성경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임을 밝히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19절에서 이들이 분별력이 없이 감각을 잃은 자들처럼 방탕함에 빠져 온갖 더러운 것들은 끊임없이 갈망하며 살아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자들이 비참한 모습은 한마디로 이성이 없는 짐승과도 같은 상태와도 같을 뿐입니다. 이러한 생활에서 떠나기를 요구하면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믿음의 지식을 상기시킵니다. 즉 그리스도를 배웠을 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비하여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가 되었을진대, 이방인이 사는 것 같이 예전 생활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사도는 21절에서 그리스도를 배운 사실을 다시 풀어 명령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옛 사람이란 죄를 짓도록 속이는 욕망으로 인해 부패한 심령을 좇아서, 회심 이전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자아를 뜻합니다. 반면에 새 사람이란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태도가 달라진 자들을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진리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생활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여 살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류 가운데 하나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본문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영적 도덕적 상태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질 때에라야, 또한 새 사람을 입는 변화를 통하여 비로소 신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은 은혜의 복음이 가르치는 바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오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인 만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은 구원에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잘못된 이해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상태의 변화가 단지 구원의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가적인 것으로 여기며 변화를 요구하는 명령을 구원받은 자가 받을 상급을 위한 것으로 그릇되게 가르칩니다.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또 “새 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이 명령이면서도 또한 결과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주목하는 데에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여부에 따라 구원을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애초부터 배워 알지 못하므로 이방인과 같이 살 뿐이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명령이 무엇인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행할 일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부가적인 선택도 아닙니다. 본문의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상태의 변화를 일깨우고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미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은 즉 옛 사람이 아니며, 새 사람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분의 변화에 따라 합당한 결과, 곧 상태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일진대, 변화된 새 사람에게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옛 사람의 상태를 벗어 버리라”고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4.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 문제는 대체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와 거룩한 생활로 이끌어 가는 성화의 은혜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이와 관련하여 명확하게 설명을 합니다.
먼저 70문답에서 의롭게 하심에 대하여 이르기를 “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받아주시고 간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죗값의 속상” 때문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교훈합니다.
또 75문답에서는 성화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들의 전 인격의 새롭게 됨을 받으며,” “더욱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요컨대 의롭게 하심이란 진노의 대상인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며, 거룩하게 하심이란 이러한 신분의 변화를 주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사람이 되도록 영적, 도덕적 상태를 바꾸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단일한 구원의 은혜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되거나 어느 하나가 없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그에 합당한 상태의 변화는 분리될 수가 없으며 반드시 함께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7문항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밝혀 줍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일은 의롭게 여기시는 일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여기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는 것이고, 거룩하게 하실 때는 성령의 은혜를 주입하시며 그것들을 실행할 수 있게끔 합니다. 전자에서는 죄를 용서받으며, 후자에서는 죄를 억누릅니다. 전자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똑같이 면제를 받으며,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며, 결코 다시 정죄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후자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똑같지는 않으며,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되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단지 온전함에 이르도록 자라갈 따름입니다.”
성화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생활로 죄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의 노력과 이를 위한 은혜의 간구가 없는 불경건한 사람은 신자라 스스로 칭할지라도 구원의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성화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또한 유념하여야 합니다. 자신에게 발견되는 죄의 모습, 곧 옛 사람의 모습으로 인하여 성급하게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 단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8문항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성화는 불완전하다는 사실과 그 까닭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죄가 그들의 각 부분마다에 남아 있으며, 육체의 지속적인 정욕이 성령을 거슬리기 때문에” 신자라 할지라도 성화는 불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종종 넘어지고, 많은 죄에 빠지며, 영적인 봉사를 행함에 있어 방해를 받게 되고, 그들이 행하는 최선의 일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고 교훈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은 구원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구원을 받은 자에게 부가적으로 상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를 반영하는 명령입니다.
비록 신분적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가 각 부분에 남아 있기 때문에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명령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의 새로움을 증진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사는 설교를 통하여 신자의 경건생활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도록 권면을 하고 경책하며 경계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