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1-20 10:08
성령신학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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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569  
성령신학요약

(지은이: 프레드릭 데일.옮긴이:김명용)

이 책은 주로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신약의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성서적증언을 통해서 오순절 신학이 범한 오류를 지적해 주므로 바른 성령신학을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1부에는 오순절 신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소개시켜 주고 있다.제 2부에서는 오순절주의에 의해 사용된 주요 성서적 자료들을 주석하고 적당한 신학적 비판을 제공하고 있다.그러면 주요 내용를 살펴 보도록 하자.


제 1부의 1.2장은 서론적인 내용이다.3장에서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성령에 대한 충만한 체험이나 오순절적 체험을 묘사할때 오순절주의자들은 보통"성령의(혹은 성령에 의한)세례"보다는 오히려 "성령안에서의(혹은 성령과 함께) 세례"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왜냐하면 모든 크리스챤들은 크리스챤이 될 때 행위자이신 성령으로 부터(of) 혹은 성령에 의한(by)세례는 받았으나(고전 12:13a) 그들 모두가 행위자 그리스도에 의한(by) 이 행위의 내용적 요소이신 성령안에서의(in) 세례나 성령이 머물러 있는(with) 세례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막 1:8,고전12:13b).다시 말해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이 모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지만(회개)그리스도가 모든 신자들에게 세례를 아직 성령세례(오순절) 주지 않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오순절 신학자 윌리암스는 다소 복잡한 이러한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은 동인이며 구속하시는 보혈은 그 수단이며 중생은 그 결과이다.또한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동인이며 성령은 그수단이며 능력입음은 그 결과이다".그렇다면 모든 크리스찬들은 성령에 의한세례를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안에서(in)라는 전치사는 회개 이후에 뒤따라 일어나는 특별한 오순절 성령세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들은 요한의 물세례와 구별하여 성령의 세례를 논하고 있다.

오순절주의는 성령세례를 받을 조건에 대해서 릭스는(Riggs) 4가지 조건을 말하고 있다.즉 중생,순종,기도,믿음이다. 도날드 기이 는 성례세례 조건으로 회개,세례,믿음을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오순절운동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세례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면 사도행전의 방언체험이 뒤따라야 한다.크리스찬들의 일반적인 믿음은 대체로 성령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왜냐하면 그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성령을 향한 것이 아니며 완전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일반 크리스찬들의 믿음과 오순절 믿음과의 차이점은 전자가 부족함의 고백이라면 후자는 완전성의 시도라는 것이다.전자는 단순하고 너무 얕다.반면에 후자는 복잡하고 심오하다.전자는 자기 파산을 고백하는 것이고 후자는 댓가를 지불한다는 믿음의로 생각한다.성령세례시에는 방언 증거가 필연적으로따르기 때문에 은사의 중심성에 있어서 방언이 시작 되었음에도 방언을 계속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이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믿음의 부족(막16:17)이나 순종의 부족(고전14:5)을 의미하여 비영적인 것이고 당연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제 2부에서 오순절 교리와 신약성서의 교리를 비교해 놓고 있다.성령론을 위해 오순절주의자들은 신약성서 중 대부분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을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1:8절의 성령의 권능의 약속은 즉 성령은"위에"오신다는 것이다.이말의 헬라어의 본뜻은 성령은 신의 선물이다.여기서 전치사를 고찰해보면 성령의 기원에 대한 방향은 -로 부터가 아니라 -위에 이며 그는 안으로로 부터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눅 24:49)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즉 성령은 받은 자의 감정적 혹은 영적 삶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즉 사람의 내적 상태에 의존하거나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성령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다.따라서 성령세례의 권능을 받는 결과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이다.성령세례의 위대함은 성령세례가 인간과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결합 이상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분명히 이 사건 자체라고 하는 것이다.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것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성령세례는 받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것,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으로 인간들과 그리스도를 결합시켜 준다.성령세례의 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도록 사람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결합시켜주는 능력이다.성령세례의 권능은 그리스도 중심의 권능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3:10-14절에서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14절)오시며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제 2체험이나 예수그리스도에 첨가된 제 2의 체험으로 오지 않은다.

오순절충만교리에 대해서 크리스찬들은 조건의 성취와는 관계없이 믿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유일회적으로 성령을 받을뿐 아니라(갈3:2)기술의 첨가나 보다 깊은 메시지나 비밀수단 없이 바로 그 동일한 메시지를 통하여 성령과 기적을 계속하여 충만하게 제공받는다(3:5).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실히 선포하는 것이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사도적 입교수단(한복음)은 곧 사도적 완성의 수단(완전한 복음),즉 다시 말해서 조건의 성취와 관계없는 믿음의 메시지다.

그리스도의 영이 부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완전치 못하므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보충이 필요한가?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여전히 영적으로 충만치 못한 상태에 있다가 어느정도 충만했다가 성령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서 완전히 충만해지는가?

그리스도가 내주하는것과 성령이 내주하는 것과는 다른가(롬9:9-10,고전6:17,15:45,고후 3:17-18)? 위에서 말한대로 삼위일체의 제3위이신 성령은 제 2위 이후에 제 2위와는 독립적으로 홀로오시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오시는가(갈 3:14,롬 8:2,요14:26)?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단지 하나님의 섭리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인가

(골 2:10)? 사도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신자들은 모든것을 그것도 완전하게 가진다고 응수한다.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능력의 일부분만 받았다가 나중에서야 충만하게 받는 것이 아니다.부분 과 충만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은 따로 한뭉치씩 따로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예를들어 처음에는 그리스도와 칭의 가운데서,그리고 나중에는 성령과 성화 가운데서).칭의와 성화와 성령이 동시에 그리고 같이 그것들이 유일한 장소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고 있다.(고전1:30,6:11 참조) 사람은 영적으로 단 한번 그것도'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그것이 바로 세례가 성령세례 이유이다.기독교 세례는 하나뿐이며("으로"가 하나뿐임) 기독교 세례가 정말로 세례("물로")이며 동시에 진정으로 영적인 세례이다.
결론적으로 오순절주의가 분명히 성서의 본문들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는데 오순절주의는 과연 이러한 본문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책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를 중심으로 성령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잡아주고 있다.

오순절주의를 진정으로 그리스도중심적으로 성령과 기독론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하한다면 성령세례나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개념이 바로 잡아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오순절의 충만한 은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운데서 그리스도인 누구나가 경험하고 체험되는 현상이 되어야 할것이다.

성령론

(헨드리쿠스 벨콥 지음, 황승룡 옮김)
이 책은 성령과 그리스도 ,성령과 선교,성령과 교회,성령과 개인,성령 세상 그리고 완성,성령과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다른 성령론의책 보다 성령과 선교와의 관계를 강조 하여 서술하고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

성령과 그리스도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칼빈은 성령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그리스도 자신과를 유용하게 연합시키는 띠(bond)이다.

요한복음 14장18절에서 성령을 보내시고자 한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신다.마태복음 28:20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모든 신약성경의 전통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거할실 줄 안다고 말하는 요한 1서 3장 24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했고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 까지에는 신실한 사람들 속에 거하는 거룩한 영,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그리고 그리스도라고 부른다.바울의 표현인 그리스도 안에나 (en christoi) 혹은 성령안에는(en pneumati)는 동의어 임에 틀림없다.따라서 바울은 주와 성령(Kyrios와pneuma)의 관계를 동일한 관점에서 대답한다.
성령과 선교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성령은 주로 교회의 영이시며 교회를 지탱하시는 분이지만 기독교신학에서는 의롭다 칭하고 성화시킴으로 각 개인의 영적 생활을 일깨우는분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까닭에 성령은 제도화되거나 개인화 된다.이같이 서로 정반대 되는 접근 방법 모두가 내성화 되고 정적인 성령론의 공통된 방식안에서 이해된다.그러나 성령은 이러한 구심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심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요한복음 15장 26절부터 27절 속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증거 하느니라. 인간은 활동을 하면 책임을 지지만 그러나 모든일에 있어 그는 위로가 되든 수치가 되든 간에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다. 교회는 선교의 임시적인 방편이다.성령의 활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그 목적은 교회를 넘어선 그 어떤 것으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사 11:9)에 있다.이 처럼 교회는 목적 그 자체일 수가 없고 계속되는 활동의 도구일 뿐이다.그러나 임시적인 방편으로써 교회는 그 활동이 끝나는 일종의 결과이다.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성령의 나타내심과 능력으로"(고전 2:4) 해야 한다.
성령과 교회

성령과 교회가 먼저이냐 성령과 개인이 먼저 이냐 문제가 있다.성경에서 성령은 그냥 개인이 아니고 공동체의 대표자로서의 개인으로 항상 시작한다.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공동체에 참여하게 하셨으며 또한 교회에도 참여하셨다.이와 비슷한 사건이 사도행전 2장 속에 있다.성령이 공동체에 가득 내림으로 말미암아 그 공동체를 증거하는 교회로 삼는다.바울서신에서 각 개인은 살아 있는 돌처럼 성령의 집으로 지음 받아야 하며 그 성령의 은사로 몸을 세우는데 공헌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그렇다고 해서 각 개인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교회속에서의 성령의 역사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성령의 고유 역사는 개인의 삶 속에 성령이 거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마지막이면서 가장 최고의 역사는 교회 속에서의 역사가 있어야 만이 이루어 질수 있다.그런데 개인이 공동체에 가까이 참여하여 공헌하지 않는다면 이 성령의 역사는 그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개인을 우선하면 교회가 개인의 삶에 기초와 구원이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반면 교회가 우선하면 어떻게 개인이 거기로부터 태어나는 것인지 알게 되고 논리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 된다.논리적인 순서는 그리스도는 선교하도록 하시고 선교는 교회가 담당하고 교회는 각 개인을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이 교통하는 코이노니아의 공동체이다.여기서 코이노니아란 말은 성령과의 교통과 성도간의 교제를 뜻하는 것으로 뗄레야 馉수 없을 정도로 함께 속해 있다.우리가 말씀과 성찬을 통해 성령 속에 동참하게 되면 성령에 동참한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동시에 참여하게 된다.이 양면성의 사실은 다음 두 가지의 가능성을 배제한다.첫번째는 성도간의 교제 없이 개인적인 방법으로 성령과 교통할 수 없다는 것이요,두번째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결합력이 같은 국적,사회적 계층,종속 속에 동참하는 데에서 유래한다면 그 공동체를 기독교적 교제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성령이 만드시는 공동체는 성령 자신이 그 중심이 되시고 그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 교제케 되는데 그렇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똑같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자녀로 같이 인침받고 하나님 나라를 같이 소망하며 사랑과 순종을 같이 요구 받기 때문이다. 성령이 만드시는 교회는 제도적인면과 공동체적인면을 다 가지고 있다.
성령과 개인

의롭다 칭함과 성화는 결코 두 가지 면이 아니고 뿌리와 열매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변화듯이 그리스도와 접목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즉 우리가 의롭다 칭함과 성화가 한 사건임을 인정해야 한다.의롭다 침함과 성화라는 두 단어가 각기 다른 영적 단계나 상황을 나타내지 않고 다 함께 측면에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는 단계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변화받기 위해 우리의 구세주를 향한 단계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임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린다.이런 단계야말로 우리가 거듭나는 단계이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구체화 한 것으로 의롭다 칭함을 얻는 중에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어 묻히게 된다.사실 믿는 중에 우리는 우리 대신 대속제물이 되신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우리의 죄 많은 삶이 그의 죽음으로 대속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오늘날의 생활방식과 필요성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비추어 은사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기나긴 세월 동안 같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그러면서 오순절 주의에서 배울수 있는 것을 기꺼이 배워야 한다.우리들이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의 은사를 갈망하라고 권면한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갈망할 때만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많은 문제,예를들면 평신도의 역할,사회 및 정치적 문제에 대한 공동의견,교회의 선교역량과 선교구조,그리고 교회의 눈에 보이는 연합문제 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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