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1-20 09:54
[2]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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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627  
2) 유효적 소명의 목표들

유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목표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르심이란 개념속에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목표들이 무엇인가에 관해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고(고전 1:9), 영원한 생명으로(딤전 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로(살전 2:12), 거룩한 삶에로(딤후 1:9),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리스도인의 자유와(갈 5:13), 화평을 위하여(골 3:15)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삶, 즉 지금의 악한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유효적 소명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이 부르심의 주권성과 그 효력성은 결코 인간의 책임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임성의 기반일 뿐아니라 책임성 자체를 확고히 하±瘦沮ö 한다.
3)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유효적 부르심에 대한 몇몇 반대 의견을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것이나 반대의견 중 하나는, 이 교회를 복음전도열과 선교열을 오히려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유효적 소명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누가 그러한자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전도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택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다. 최종 목표를 작정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들도 작정하셨다. 선교가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그 모든 노력들을 위한 강한 동기를 부여하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두번째 반대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믿지 않은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에대해 성경은 복음의 초청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을뿐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요 5:39-40, 마 23:37, 행 13:46).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은 효력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한적이 없다. 복음의 배척은 항상 인간이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불신앙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마지막 반대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론, 특히 타락후의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관한 견해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본성상 전적으로 죄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가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절실하게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일단 영적으로 살아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다시금 참여하게 된다. 이때에 회개와 믿음과 성화와 견인의 과정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최초의 순간에서는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먼저 영적으로 살림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홀로 남겨져 있으면 빠져 죽게 되는 죄의 흙탕물에서 부터 기적적인 구출이 우리에게 요청된다. 이러한 구출이 바로 효력있는 부르심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속에 유효하게 된다.


제 6 장. 중 생
1) 개 요

인간은 변화받을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그래서 새로운 탄생 혹은 영적 새생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생이란 새로운 �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 3:3,5).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한다(약 1:18, 벧전 1:23).

중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변화받을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그래서 새로운 탄생 혹은 영적 새 생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이들을 성경에서 장님, 귀머거리, 죽은자들로 표현함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 진리들을 깨달을 수도 없을 뿐아니라, 그들이 장님된 상태와 죄로 향하는 성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없이도 타락한 인간이 믿음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중생이란 개념은 자연인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없이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면 중생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개진될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역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2) 중생의 본질

a. 중생은 근본적 변화이다.

중생은 인간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어주어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다.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단지 행위의 변화, 생활의 개혁, 사상이나 언어,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라 중생시 성령은 이 오는 행위의 근원인 사람의 심령에 작용한다. 원리인 의식 중추 곧 자아, 마음, 영혼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런데 이와같이 인간존재의 중심이며 그의 사고와 의지, 정서 그리고 모든 행동의 중심인 마음을 성령께서 변화시키신다.
b.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에로의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c. 중생은 초자연적 변화이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 있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사역이나 부활보다 결코 뒤떨어지거나 열등하지 않다.
d. 중생은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은 은밀한 것이며 또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직접 이를 지각할 수 없고 다만 나타난 결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에는 그 변화를 직접 의식하게 된다.
e. 성령께서 중생시에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다.

그는 꼭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다. 중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 하나님께 의존치 않고 믿음이나 회심에 좌우되며 따라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를 자기 구주로 받아야 한다는 오류를 보여준다. 만일 신앙이나 회개가 중생보다 앞선다면, 인간의 구원이 성령의 절대적 주권에 속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알미니아니즘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성경에 의하면 신앙이 중생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신앙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된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중생과 신앙과를 날카롭게 구분하여 신앙은 중생의 결과라고 했다.
3) 중생의 필요성

a.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3:3,5,7, 갈 6:15) 구주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절대적이며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나, 다른 어떤 방법, 기술 조직으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은 완전히 타락했고 그의 인격 즉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던 그 옛 모습을 상실했다. 그의 지능과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생 역사를 체험하여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b.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이다(히 12:14).

거룩함, 하나님의 법에의 일치는 하나님의 호의를 보증하고 양심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성경에 의하면 지금 인간은 성향과 행동에 있어서 이렇게 필수 불가결한 거룩함과는 정반대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다고 서술되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생명의 회복이 그에게 가장 긴요한 것이다. 급진적 내적변화, 즉 영혼의 성향 전체가 전환되는 변화가 필수적이다.
끝으로 개요에서 언급했듯이 중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함께 하는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의 사역에 의해 우리는 중생되는 것이다.

제 7 장. 회 개
1) 개 요

신자의 첫 발걸음은 회심이라 불리운다. 그것은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이다.

회심이란 두개의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은 요소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즉 회개와 신앙이다. 회개란 불신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요, 신앙이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의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국면들일 뿐이다. 어떤 의미로 어느 하나의 국면은 다른 국면이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다. 각각의 국면은 다른 국면이 통일이 된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것에서 부터 돌이키게 될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며 그래서 회개하게 된다. 이제 회심의 부정적인 요소인 회개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면,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의 의지를 동반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다.

2) 회심의 요소

회개는 단일적인 경험이다. 이말이 의미하는 바는 회개는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다음과 같은 측면들은 구별될 수 있다.

a. 지적인 요소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회개는 마땅히 우리 자신의 죄와 죄책을 인정하는 일과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인식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죄를 기꺼이 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자비하심에 대한 이해를 수반해야 한다.
b. 감정적인 측면

회개에는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애통하게 된다.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자체에 대한 가슴저리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며, 그분을 서운하게 해드린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가장 깊은 슬픔은 십자가 밑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한 비탄에 또한 기쁨도 있어야 한다. 기쁨이 상실되면 우리의 회개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c. 의지적 측면

회개에는 의지적 요소가 있다. 이는 목적의 변화, 죄로부터 내적으로 멀어짐, 용서와 정결을 구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회개의 열매들을 맺어야 한다. 회개는 변화된 생활속에 표현되어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전적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3) 여러가지 형태의 회심

성경에 나오는 돌이킴의 형태들을 보면 여러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a. 민족적 회심

민족적 회심들은 도덕적 갱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개인들에게 있어서 어느정도 실제적인 종교적 회심을 수반했지만 민족 전체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회심은 결여하였다.
b. 일시적인 회심

심령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고 따라서 오직 과도적 중요성만을 지닌 개인들의 회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회심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종종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같으나 겉모양만 그렇다는 것이다.
c. 진정한 회심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 나오며, 하나님에게로의 헌신의 삶을 일으킨다(고후 7:10). 이는 중생의 사역에 기초한 변화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죄인의 의식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요, 이전의 삶의 방향이 현명치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자책을 포함하며, 생의 전 과정을 수정하는 생각과 의견, 욕망과 의지의 변화이다.

d. 반복적 회심

성경은 회심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죄의 길에 빠진 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반복적 회심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것을 제 2의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돌이킴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경우는 말한다.
4) 회심의 조성자

성경은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회심의 조성자요, 인간은 회심에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그들로 회개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신다.

회개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부여하시고 그들로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회개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동되고 동기를 부여받을 뿐만아니라 그 의지 자체 역시 능동적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고 회개하도록 촉구되는 것이다.
5) 회개의 지속성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일어나지 않는다. 회개는 평생을 통하여 지속되어야 하고, 임종시에 끝이 나는 것이다. 회개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몇몇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의 평생토록 계속 되어지는 회개사이에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셋째,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회개는 이상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드러내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결코 온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회개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들 때문이다.


제 8 장. 신 앙
1) 개 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요건이다. 회개가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게 되는 회심에서의 부정적인 국면이라고 한다면,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약속들과 사역을 붙잡는 긍정적인 국면인것이다. 신앙이란 복음의 핵심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써 전인격 즉 구원에 있어서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섬김에 대한 참된 서약으로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앙의 요소

신앙의 제 요소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신앙이 전인적 인간의 행위요 부분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신앙은 인간의 정상적인 어떤 특별한 기능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이제 신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a. 지식의 성격

우리가 알지 못한자나 잘못 알고 있는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자는 누구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그 지식은 복음의 진리와 우리를 위한 구속사역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면 복음을 어느정도 알아야 구원을 받는가 ? 이것은 말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구속이 필요한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b. 감정적 동의(assent)

찬동이란 하님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 찬동은 전 인격 즉 우리의 전 주체가 성경이 가르치는 죄,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고 우리의 생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진리로서 받아들임이 포함되어야 한다.
c. 의지적 신뢰(trust)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로들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의지하며 그분께서 행하신 것을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신뢰에는 순종이 또한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순종하는 섬김으로 가야만 하기에 야고보의 말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세가지 측면들은 비록 때때로 어느 한면이 다른 면보다 더 중요할지라도 분리될 수 없다.
3) 신앙의 신비

신앙행위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 모두가 능동적이다. 인간은 구원의 지식의 수용에 있어서 수용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응답과 순종에 있어서 성령에 의하여 능동적이게 된다. 칼 바르트는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work)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역사(work)이다. 그것은 전적인 노예됨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인 해방이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주장해야 할 것은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앞선 활동, 곧 무상의 은혜의 행동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으며, 또 그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받는 것이지만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주는 것이다. 즉 자신을 하나님께 주는 것 혹은 복종하는 것이다. 신앙은 동시에 받는 것이요 주는 것이다. 곧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자비를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드리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칭의에 관련되는 한에서는 빈 그릇이지만, 인간이 소명을 완수하는 것과 관련되어서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신앙의 신비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또 다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이 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그런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포함한다(행13:48, 요일 5:1, 고전 12:3). 그러나 “믿다”란 단어를 찾아보면, 인간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써 무엇인가를 해야하기에 주제는 인간이다(요 3:16, 롬 3:28). 비록 복음을 믿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지만 우리의 믿음이란 전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은 엡 2:8-9에서 배운것처럼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우리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4) 구원의 확신

로마 카톨릭교회는 개인적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할 뿐아니라 반성된 행동 혹은 신앙의 열매라는 사실을 부여한다. 그리고 신자에게 특별한 계시에 의해 확신이 주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는 절대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는 반펠라기우스주의와 로마 교회의 신앙고백적 체계의 소산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불합리하고 유해한 입장을 반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에 있어서 때때로 확신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편협하게 강조하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구원의 확신 즉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긍정적 확신을 결여한 사람은 구원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신앙의 신뢰의 요소는 때로, 그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았다는 죄인 편에서의 확고한 신뢰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종종 모든 종류의 의심과 불확실성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신자가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신자란 자신의 불신과 함께 끝없이 갈등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신자는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에 안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신자가 그런 완전하거나 이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믿음을 항상 체험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실질적으로 성도들 가운데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과 불안 가운데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것은 심리적으로 마음에 의지하여 구원을 확신하려 하거나 자신의 행윙에 바라보며 구원을 추측하거나 그것을 확신의 근거로 삼기에 그런 것이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구원을 이루셨고, 그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확신의 기초가 된다.

“이 확신은 공연히 지어낸 그릇된 소망에 근거한 추측이나 그럴듯한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것은 약속된 은혜의 내적증거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8장 2절)

5) 구원에 대한 현대의 그릇된 개념들

a. 지성주의

오늘날의 상황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중의 하나는 지성주의이다. 이것에 의하면 신앙은 주로 지적 동의의 관점에서 정의되며, 신앙의 대상은 인격적인 존재보다는 교리적 공식으로 여겨진다. 계시를 배타적으로 명제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신앙을 합리적 행동으로서 묘사한다.
b. 반 지성주의

또 다른 극단이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신앙은 아무런 인지적 내용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즉 신앙은 근본적으로 초합리적이거나 반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과정신학자인 위이만(Heary Nalson Wieman) 역시 신앙을 인지로부터 분리시키는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존주의, 신비주의, 과정신학의 관점에 대항하여 신앙은 참으로 초합리적인 행동인 동시에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세속적 사상의 진리주장이 아니라 신앙 자체의 진리주장에 호소해야만 한다. 신앙은 오직 그 대상, 곧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c. 신-펠라기우스주의

다시금 부활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는 어거스틴과 개혁가들과 더불어 받을만한 자격없이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재 천명해야 한다. 신앙이 은혜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거나 결단이 될 때, 우리는 신앙-도덕주의(faith-moralism)라는 이단에 봉착한다. 참으로 신앙이란 의지의 결단이기는 하나, 이것은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에 의해서 해방된 의지인 것이다. 신앙은 또한 모험이며 순례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임하여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며, 또한 불가피하게 되는 순례요 모험인 것이다.
d. 종교다원주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신앙없이도 가능하다는 작금이 널리 유행하는 입장에 대해서 경고해만 할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교제 안에만 구원이 존재한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붕괴시켰기 때문이다(행 4:12).

신카톨릭주의에서도 역시 신앙없는 구원이 많은 신학자에게 주도적인 동기가 되어왔다. 한스큉의 사상에 의하면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은 구원에 이르는 통상적인 길을 상징하는 반면, 기독교는 구원의 특별한 길을 의미한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그의 교회를 모르는 것이 아닌, 그러면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애쓰는자들, 이들고 또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노니”라고 천명했다. 또 수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바 구원의 메시지를 들을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지식에 이르지 않는 한 멸망을 향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 가운데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기회를 박탈하지 않도록 조처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와의 의식적인 교제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며 구원받았다거나 혹은 그들의 구원은 이미 확실하다는 망상에 빠져서는 절대 안된다.
e. 의식적 신앙없는 구원주의

고백적인 정통주의 계열에 있어서까지 의식적 신앙없는 구원의 개념이 매우 상당히 존재하고 있다. 전통주의적, 개혁주의 계열에서 계약공동체 내에서의 출생은 심지어 의식적 신앙과는 별개로 그에게 구원을 확신시킨다고 추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물론 영아와 유아는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카톨릭과 루터교 계열에서는 세례자체가 인간을 중생시키며, 인간은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없이도 구원된다고 일반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활기있고 살아있는 신앙과 분리되어서는 상실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젠가 은혜의 성례는 “그들이 신앙의 완전한 확신감 안에서 접근하지 않는한 유익이 되기는커녕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천명한바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유아세례의 관습은 특히 신약성경의 신앙에 대한 적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세례의 성례를 지나치게 부당한 정통주의를 가지고서 강조하는 통에 우리는 실제로 중생의 교의에 관해서 이단이 될 정도이다. 니고데모에 의해서 제기된 반대와 그것에 대한 답을 잊어버리고서 과도한 정통주의로서 우리가 유아가 세례받음으로써 실제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천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신앙을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적 진리는 참으로 에큐메니칼적이고 참으로 성경적이기를 추구하는 어떤 에큐메니칼적인 교회에도 반영되어야만 한다. 믿는자의 교회라는 신약성경의 이상은 우리가 오늘날 회복시킬 필요가 절실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제 9 장. 칭 의


1) 개 념

인류는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것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칭의가 관계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칭의는 은혜로우면서도 법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의 것으로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칭의교리를 이해시 많은 고찰들이 열거된다.

첫째, 칭의는 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범했던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져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칭의되어야 할 필요성은 결코 없을 것이다.

둘째,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하신다.

세째,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자리를 바꾸어 우리의 신분과 입장이 되신것과 우리가 받아 마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것을 포함한다.

다섯째, 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여섯째,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기 때문이다(요 5:24).
2) 믿음과 행함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비록 칭의로 인도하는 것은 믿음이지만, 새로이 탄생된 그 새로운 피조물의 본래적 성품은 불가피하게 행함을 낳게 되므로, 칭의란 결국 행함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근본적인 같은 요점을 말하고 있다. 즉 칭의받는 신앙은 선행으로 열매맺는 신앙인 것이다. 즉 칭의로 인도하는 믿음의 진실성은 그것으로부터 발생되는 결과속에서 결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선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도 칭의도 없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칭의란 그리스도와 연합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 주장이 더욱 지지된다. 신자는 단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속으로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인간들이 있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 속으로 영입된 것이다.
3)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역시 서로 주의깊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칭의에 대한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이 범한 잘못중 하나는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칭의가 신자의 신생과 변화를 포함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칭의에 있어서 인간은 공적을 포함시키고 있다.

다음과 같은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들이 인식되어야 한다.

첫째, 칭의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는 반면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제거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갈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칭의는 신자의 밖에서 일어나며 성화는 신자의 안에서 일어난다.

셋째,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지만, 성화는 생애에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다.

이런 구별을 하는 것은 칭의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4) 계속되는 죄의 영향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도 죄의 결과들은 계속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윗의 경우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고 그후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죄의 일시적인 결과와 영원한 결과들 사이에 구별을 할 필요가 있다. 어떤이가 칭함을 얻었을 때 죄의 영원한 형벌인 영원한 죽음을 면하지만, 개개인들에게 임하거나 집단적으로 전인류에게 임하는 죄의 일시적인 형벌들은 반드시 제거될 필요는 없다. 즉 우리는 신체적 죽음과 창세기 3장에서 주어진 다른 많은 심판의 내용들을 경험하고 있는데, 많은 이러한 죄의 형벌들은 신체적 성질의 것이든 사회적 성격이든 간에 인과관계속에서 우리의 죄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일반법칙들이 발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죄란 가볍게 취급되어질 내용의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그것을 마음대로 추정해서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한없는 용서이며 이용가능한 것이다.


제 10 장. 성 화
1) 개 요

앞장에서 다룬 내용만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사역의 최종목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갱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으므로 그 사역을 계속하시어 완성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정의한다. 즉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것이 인간의 성화이다. 성화가 제시하는 목표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2) 특 성

첫째, 성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는 초자연적 역사요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둘째, 성화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굳은 결심, 끈질긴 노력, 과학 문명의 발달도 어떤 교육 철학 사상도 성령없이는 불가능하다.

셋째, 성화는 통상적으로 장구한 과정이며 이생에서 결코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 넷째, 신자의 성화는 영혼에 있어서는 사망 바로 그 순간에 혹은 사망 직후에 완성되며, 몸에 있어서는 부활시에 완성된다.
3) 성화의 완료문제

나사렛 교단, 오순절 교단, 알미안들은 신자가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성화가 완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있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은혜의 수단들이 더이상 필요없게 된다거나, 성령님은 더이상 불필요하게 된다거나 이제는 더이상 인간속에 있는 죄의 성향들과의 싸움이나 유혹이 없게 된다거나, 영적 성장을 더 해야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주장은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며, 실제로 어떤 신자들은 모든 죄악을 극복하고 잇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대개 완전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크리스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자들중의 한 사람인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불완전성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완전성화란 이생에서 경험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τελει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5:48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흠없다거나 결점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도 완전해질 수 있다. 결론Àº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함과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우리가 목표하는 기준이고 또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목표이지만 어느 신자도 이생에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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