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1-20 09:52
[1]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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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581  
구원론

제 1 장. 서 론
1) 연구의 목적

구원론이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들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을 취급한다. 따라서 구원론은 그것이 인간의 핵심적인 필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상당히 관심을 끄는 분야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구원에 있다.

오늘날 교회에는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류가 적지 않다. 소박하게 그저 교회생활을 잘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아가 율법주의와 신앙적 선행으로 구원을 추구하기도 한다. 즉 교회안에 펠라기우스주의와 세미펠라기우스주의가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무거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비록 지식적으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속에서 본 논문이 의도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그렇다고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말이 의미하는 바는 임의로 행하는 신자들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토록 허락치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본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고찰할 것이다.

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구원의 각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에 관한 것과 이에 따른 적용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전통적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구원을 다루고, 복음주의와 다른 노선의 구원에 대해서 함께 비교 고찰하였다.

개별적으로 보면 제 1장은 서론으로써 본 연구의 목적과 방법과 범위 등을 약술했다.

제 2장은 구원에 대한 개념을 다루었는데, 구원이라 함은 익히 알고 있지만 막연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개념을 언급했다.

제 3장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 4장은 예정을 다루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제 5장은 유효적 소명을 다루었다. 그 소명은 택자에 한정되며 그 부르심은 유효하다.

제 6장은 중생을 다루었다. 중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제 7장은 회개를 다루었다. 회개는 신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제 8장은 신앙을 다루었다. 신앙은 복음의 핵심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매개물이다.

제 9장은 칭의를 다루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 합법적 신분을 보장 받는 것이다.

제 10장은 성화를 다루었다. 성화는 칭의 이후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제 11장은 영화를 다루었다. 영화는 신자의 영적존재가 죽음이후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제 12장은 성도의 견인을 다루었다. 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각 개인이 믿음을 유지하고 최후의 목적까지 보존되는 것을 말한다.

제 13장은 구원의 방식과 범위를 다루었다. 각 노선의 구원의 방식을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미치는 범위에 대해서 언급했다.


제 2 장. 구원의 개념
구원이란 용어는 그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너무 명백한 의미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서도 구원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서 폭넓게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 중에 더욱 중요한 것들을 연구하기 전에 서로 다른 개념들을 갖게 하는 요소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먼저 현대의 다양한 구원의 개념을 살펴본후 제반 구원의 개념을 검토하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그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1) 해방신학적 관점

제 3세계 신학으로도 불리우는 이 신학의 구원개념은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란 권력가들에 의해서 권력없는 계층의 사람들이 억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착취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보고��는데, 구원을 우선적으로 죽음후의 개인적인 삶으로서 여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노력이나 필요하다면 혁명을 통해서, 즉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구원역사를 이루려고 노력할 것이다.
2) 실존신학적 관점

구원이란 우리의 안보를 위한 이기적인 추구들을 포기하고 그대신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실존속에 있는 인간을 참된 자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본체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법정적인 선언을 받는 칭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우리의 실존, 우리의 삶 전 관점과 삶의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인 것이다.
3) 세속신학적 관점

세속신학은 과학의 발전으로 세속화 되어가는 과정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최고의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한 존재가 되도록 교육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구원이란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고 성인이 되고 자신을 확신하여 이 세상의 일에 참여하는 그것이 구원의 의미이다.
4) 현대 카톨릭 신학적 관점

공식적인 카톨릭교회 입장은 교회가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데, 이 은혜는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 전달되므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최근 전통적 견해를 달리하여 가시적 교회밖에 있는 이들 그리고 아마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을 전혀 하지 않는 이들까지도 은혜의 수혜자들이 될 수 있다는 가

능성을 더욱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 복음주의적 관점

구원은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교제를 회복 또는 바로잡는 것, 즉 인간존재의 변혁을 수반하는 회복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의 상태와 그후 죄가 세상에 들어옴에 따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를 회복, 구속, 갱신하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구원은 죄인의 구원을 영원전 부터 하나님이 아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복들을 죄인에게 전달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의 생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며, 인류의 생명과 힘과 행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및 인간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방신학, 실존신학, 세속신학적 입장은 성경에 그러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지만 구원의 본질인 영혼에 대한 구원의 개념이 희박하다. 그리고 현대 카톨릭적 입장은 교회밖의 익명의 그리스도인까지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므로 종교다원주의적인 냄새가 풍기고 있는데 이것은 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례를 통한 은혜의 전달은 어느정도 그러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같은 구원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나타내시고자 하는 본질적 구원의 부차적인 것들이요, 본질적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차적 구원을 베푸실 때에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본질적인 구원으로 인도되기를 원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구원은 복음주의적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본장에서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구원에 관한 고찰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 3 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만약 구원론이 “구원의 교리”로서 이해되어진다면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는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 어떤 순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한 극단의 경우가 구원의 명확한 순서가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구원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그의 은혜에 의해 제정되어졌다고 믿을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롬 8::23). 그러므로 그는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는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구원의 순서에 대한 중간적인 입장은 루이스 벌코프의 입장이다. 성경은 종종 조직신학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잇는 것보다도 더 넓은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구원사역의 다른 국면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속에 놓여 있는 다양한 경우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살펴본뒤, 게속해서 루이스 벌코프는 다음과 같은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부르심, 중생, 돌이킴,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다른 한 극단의 예가 벌 카우어의 경우다. 그는 구원의 순서란 개념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한다. 그는 주목하기를 이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몰입은 종종 구원 자체가 갖는 풍요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의 순서라는 표현보다는 구원의 길(way of salvation)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하기를 거부한다.
2) 어려운 문제들

구원의 순서를 정하려 할때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우리가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데에 사용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구원의 과정속에 나타난다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역시 항상 똑같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종종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토대로 사용되어지는 로마 8:30에서도 이 구절의 주요목적이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데에 있다.

넷째,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중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되어져서는 결코 아니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의 삶을 통해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져야 한다.

다섯번째,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고전 1:30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되 거룩하게 하심에 대해서는 그를 영접치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섯번째, 머레이와 벌코프가 주장하는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소망이 이들의 순서 속에는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컨데 사랑과 소망 역시 믿음만큼이나 구원의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
3) 구원의 순서의 필요성

하나님의 은혜를 개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일잉 단일의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그것은 택함받은 자들에게 동시에 부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을 내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갖는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비록 결코 분리되어질 수는 없으되 각각으로 부터는 구별되어야 하는 다양한 경험들을 알게 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것들이 하나씩 다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에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국면들이 모두 똑같은 종류의 것들은 아니며, 그러기에 모두가 똑같은 범주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요컨데 구원의 길에 나타나는 다양한 국면들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대치하는 식의 일련의 연속적인 단계들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속에 나타나는, 다양하면서도 동시적인 국면들 즉 이 모든 국면들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나란히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제 4 장. 예 정
1) 개 요

기독교회의 교리중에서 가장 이해되기 어렵과 문제시되기 쉬운 교리들 중의 하나는 분명히 이 예정의 교리이다.

어떤이들에게 이것은 인간의 이해능력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불필요하게 탐색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것은 성경의 계시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그 교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예정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예정’이란 영생이나 영원한 죽음을 개개인들에게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다. 그리고 ‘선택’이란 예정에 있어서의 긍정적인 국면인 영생에로의 택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2) 역사적 발전

예정에 대해서 많은 논쟁들이 있어왔고 이 교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은 일반적으로 문화와 신학적 흐름 내에서의 다른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고전적인 교리적 체계가 발표되던 시기까지 여러세기를 통하여 온 그 내용들을 개관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이 교리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아담이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소유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악을 행하려는 성향을 갖게 되었고 그 죄성은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결과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자유는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선한것을 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에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인간의 전적 부패와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전적 무능력에 대한 강조는 의로운 삶에 대한 진정한 노력을 약화시키고 또 하나님을 모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여겼다. 그의 주장은 각 개인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악에 대한 성향이 없는 의지를 갖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선을 택하도록 특별한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거룩에의 성장은 인간의 공적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예정하심은 각자의 삶의 질을선견하심에만 전적으로 기초한다.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 어거스틴은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의 예정론을 발전시킨다.

그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설로 정죄되었다. 어거스틴이 죽은지 1년후 지배적인 견해는 순수한 어거스틴주의가 아니고 반-펠라기우스주의였다(semi-pelagianism). 즉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뤄진다고 하는 협력교리가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다. 이 입장은 529년에 오렌지회의에서 검토되어 정죄받았다. 그후 종교개혁 시대까지 카톨릭신학 내에서의 지배적인 흐름은 펠라기우스주의에로의 흐름이었다. 루터가 두각을 드러냈을 때 이 견해는 그가 반박했던 주요 내용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예정이란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행할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는 옥캄주의에 따랐으나, 어거스틴의 글을 연구하면서 어거스틴의 견해에 대한 모든 반대들은 육신의 지혜인 인간이성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서 결정적인 논술을 한 이는 칼빈이었다. 오늘까지 예정교리는 참으로 그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또 자유롭게 어떤 이들은 택하시고, 또 다른이들은 유기하셨다고 주장했다. 그의 후계자 베자(Beza)는 하나님께서 어떤이들은 멸망시키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주장하여 이 주장이 전택설 조만간 칼빈주의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널리 수납되게 되었다. 그후 알미우스는 이중예정 그리고 특히 베자의 전택설에 대해 확신한 바가 없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믿게 되도록 충분한 은혜를 수여하셨다. 그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자유로이 그들은 믿거나 불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앞으로 믿게 될 것으로 아시고 계신 이들을 예정하신다. 그후 웨슬리는 알미안주의를 일반화시켰다. 그는 알미니우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이 은혜는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인간의 선한 것들의 기초가 된다. 이 선행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3) 예정론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a.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특징은 5대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전적부패, 무조건적 예정,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다. 예정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기 위한 기본구조로써 그 개념들을 사용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전 인류가 죄로 타락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적부패의 개념을 강조하여 모든 인간들은 어떠한 제시가 주어져도 반응할 수 없다.

때때로 전적 무능력이라는 말은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죄인은 선을 행할 능력을 잃어버렸으므로 스스로 개종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칼빈주의의 두번째 주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무능력의 개념과 함께 선택에 대한 칼빈주의적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그 선택이란 어떤 몇몇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이요, 효과적이며 끝까지 그 믿음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전 부터 무조건적이며 불변적이다. 대개의 경우에 칼빈주의는 선택이란 자유의지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뵈 트너는 타락한 인류를 부러진 날개를 가진 새에 비유하여 “그 새는 날수 있는 자유는 있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이를 설명한다.

인간들은 의지의 무능력 때문에 그들이 반응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택하신이들에게 그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임하실 때에만 나타나게 된다.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죄악된 본성과 하나님의 사랑, 영광, 위대하심을 분명히 생생하게 보게 되며 틀림없이 그리고 의심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b. 알미안주의

알미안주의의 진술들이 어느정도는 다양한 형태를 갖고있으나 하나의 논리적인 출발점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기를 소원하고 계신다는 개념이다. 성경 곳곳에 우주적인 초대를 하는 구절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초대에 있어서 진실하시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알미안주의의 두번째 주요한 개념은 모든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구원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균등하게 모든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모두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구원에로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정한 개인들에게 특별하게 적용해야 할 필요는 없게 된다.

셋째의 기본적인 개념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시는 일에 있어서의 선지의 역할이다. 알미안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얼마를 택하셔서 택정된 이들을 그의 �한한 지식속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던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알미안들은 예정을 절대적으로 혹은 무조건적으로 이해하는 칼빈주의 견해를 반대한다. 인간이 모든 일에 있어서 예정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거룩에로 향한 윤리적 요구는 더 이상 신자의 삶에 적절한 것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c. 칼 바르트(Karl Barth)

바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칼빈의 이중예정을 수정보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론적 예정론을 내세웠다. 가히 그의 예정론은 혁명적이었다. 그의 예정론의 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서 예수 그 자신과 공동체인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개인의 위치에서 여러 각도로 예정론을 해석해 나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주체이며 객체이다. 즉 하나님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주체가 되어 선택한다. 그리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객체가 되어 자신이 선택된다. 또한 영원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대신할 저주로 선택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으로 예정되었다. 이러한 예정은 일순간에 이루어지거나, 역사의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하나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선택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저버린 이스라엘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서 세워진 교회이며, 그 공동체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며,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개인에게 전달된다.

그는 특히 전 신학의 전개를 그리스도 중심적 원리로 진행하였는데, 이 기독론 전개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오해 받는다. 그러나 그의 예정론을 만인구원설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심판과 죽음을, 인간에게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예정하셨다. 이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집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와 신앙없는 사람을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오해 되어져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인간의 구원의 선택은 하나님의 결정이요, 약속이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이 하나님의 결정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일 때, 그의 죄악의 길에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올 때, 이 가능성은 실현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게 된다.
4) 합리적 해결을 위하여

앞에서 본 바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기를 진지하게 열망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때 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백성을 선택하고 택정하였다고 동일한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방법은 두가지 방향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얻기에 충분한 은혜를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언제라도 거절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절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를 좌절시키게 된다. 이것은 알미니안적 해결방법인데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권적은 아니시며 따라서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둘째, 성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Calvinism) 이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으나 겔 33:11, 마 23:37, 고후 5:20, 벧후 3:9 등과 같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된다. 각 견해는 그것이 옹호하고 있는 어떤것이 있는데, 전자는 좀더 온건하고 부드러워져서 실제적인 삶의 요구와 필요들을 고려하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을 정당화하려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을 고려한다. 그들 각자는 진리의 요소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리적 방향 모두를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에 나타나고 있는 공통된 주장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개념이다.

성경은 두가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비록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여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람의 논리의 감옥속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역설을 유지시켜야 한다. 칼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학적 관심을 합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에 충실하는 일이어야 한다.


제 5 장. 유효적 소명
1) 개 요

모든 인간들은 죄 때문에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바 되고, 영적으로 장님이며,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복음초청에 대해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유효적 소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복음초청의 수락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반-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안들). 이들의 견해는 인간의 의지의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나(반-펠라기우스) 혹은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충분한 은총때문에(알미니안) 복음초청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복음 초청의 반응에 대해 결정하시지도 않거나 관장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복음초청에 대한 결과는 오직 인간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있었기에(엡 2:4-5)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초청에 응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속에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듣는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소명과 선택사이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선택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유효한 소명의 대상자들인 것이다. 소명이란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 즉 부름을 입은 모두는 실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르심은 거절될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복음초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속으로 이끌어온 효력있는 부르심을 뜻한다.

이 유효적 소명은 여러가지 점에 있어서 알미안들이 선행하는 은혜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가지 점에서 그 개념과 다르다. 이것은 택자들에게만 주어지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또한 그것은 수혜자로 하여금 확실히 또 효과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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