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기독교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자존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자기 사랑과 자기 수용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수단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심리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내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인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내면의 ‘상처 치료’이다. 심리 치료에 있어서 인간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 사랑으로 귀결된다. 시먼스의 경우 그에게 있어서 구원 또는 ‘내적 자아로까지 깊이 침투하는 구원’은 ‘자기 사랑의 회복’일 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다.……심리 치료의 관점에서는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던 상태가 어느 시점에서 너무 사랑스럽게 바뀌면 모든 문제는 끝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심리 치료의 핵심 과제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더 예뻐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pp. 116-7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7~8).”
“성경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가 결코 사랑받을 만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뿐이다.” p. 119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크리스천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심리학은 이런 크리스천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심리학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발버둥치는 심리학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 작아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는 기독교가 얼마나 다른가?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p.120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다. 아니 선함까지 아니더라도 인간 본성이 최소한 중립의 상태 정도는 된다고 보고 있다.”……“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때 선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어야 할 인간이 잘못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과 관계 없이 가해진 외부의 자극들 때문”이라고 본다. p. 120
이에 반해 성경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즉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내면 전체가 죄로 물든 존재라는 것이다.……죄인 된 인간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치료의 방법은 심리 치료가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pp. 121-2
3) 왜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인지를 알려면 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와 융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데에 중심이 되도록 한 점이다.
“프로이트는 꿈, 농담, 실수 행위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일반에게 각인시키고, 인간의 성적 본능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유아 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계속해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정신분석의 방법을 종교, 사회, 문명, 예술들의 영역에 응용하는 데 힘썼다.” 123-124
- 프로이트의 성장 배경
그는 대단한 객관적 진리를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의 성장 환경을 반영하는 매우 주관적인 이론을 제시했을 뿐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천재성과 위대성은 그의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이 아니라 개인적 선입관이 많이 포함된 매우 주관적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론을 많은 사람이 거의 진리로 인정하게 만든 그의 설득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25
1856년에 태어난 프로이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자식이었으며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처가 낳은 장남 필립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필립은 프로이트의 어머니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후에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이복형 필립이 죽기를 바랐다고 고백했다. 이런 독특한 성장 환경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후에 자연스럽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착안하게 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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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학문에 대한 첫 관심은 철학이었다. 그의 철학 탐구는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절정에 다다랐다. 철학을 생물학적 관점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하면서 의학을 전공했다. 루드비히 포이엘바하를 만남으로 기독교에 대해 유물론적 관점의 대부분을 확립하게 되었다.
포이엘바하는 “기독교는 사실상 인류의 이성으로부터 뿐 아니라 인류의 삶에서부터 사라졌다. 기독교는 단지 고착된 생각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하나님은 (무한한)인간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안에 존재하는 가장 (무한한) 본성이 밖으로 표출되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영원에 대한 자각과 갈망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반면, 포이엘바하는 인간 속에 영원함의 본성,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속에 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종교란 개인에게 있어서 억압된 충동들에 의해 문득문득 드러나는 이상한 꿈 또는 황당한 말실수가 인류 전체에 의해 확산된 형태에 불과하다. 또 동시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평가
1)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 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란 하나의 환상 또는 환영이라고 보았다. 또한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또 찰스 다윈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장과정 중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아냈다.
2) 무의식의 발견은 인간 행복을 향한 중요한 시발점이 아니라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인간 실종의 시작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열망은 근친상간에의 열망, 잔혹 행위와 살인에의 열망이다.”
프로이트는 인생의 해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습적으로 코카인을 사용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답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인간 더 나아가 인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카를 융
오늘의 기독교가 융에게 직, 간접으로 받은 영향
1)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2)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융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로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망각된 기억들과 욕망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구분했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마다 상이한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인류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 인간이 동물일 때부터 이어 내려온 잠재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인류의 각종 신화들, 종교들, 의식들, 상징들 그리고 꿈과 환상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융에게 기독교는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무의식의 잠재된 기억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단서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창조적 진화론과 기독교 심리학을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에 주눅이 들어 성경을 부끄러워한다.
이들이 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가르침을 섞는 것은 성경만으로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문들 앞에 서면 웬지 작아지고 주눅이 드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성경이 진리다.’라고 내어 놓기가 영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다 파악하려면 과학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심리학의 정신 분석 차원에서 볼 때 객관적인 인간의 ‘정상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론 체계 자체가 결코 과학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병원에 입원해야 할 중증 환자로 비칠 수도 있다.
기독교의 ‘죄’와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 각종 그럴듯한 이름의 ‘병명’들만 늘어가고 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책임질 것이 전혀 없는 ‘피해자 또는 환자’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무슨 구세주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닌 치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