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
목 차
1 : 팔레스타인
2 : 이스라엘의 기원
3 : 사사시대
4 : 초기왕정시대
5 : 예루살렘왕 다윗
6 : 솔로몬, 오므리 예후왕조
7 : 이스라엘의 멸망
8 : 유다의 멸망
9 : 포로시대
10 : 페르시아시대 및 마무리
시작하는 말
최근 작고한 스칸디나비아 학파의 알스트룀(Gösta W. Alström)은 그리이스의 역사가 헥카토우스(Hecataeus)의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의 네가지 사항을 말한다. 첫째,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둘째, 그 사건이 고대 역사가들에게 어떻한 모습으로 이해되었는가?(how the events were understood by the ancient writers?) 세째, 이러한 저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how these writers wanted it to have happened, that is, the purpose of the writing?) 네째, 그들은 누구를 위해 글을 썼을까?(the audience for whom they wrote?) .. 이러한 내용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지나간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이용해서 그것의 일부를 재건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일이야말로 역사학의 의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 소고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전반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한 나라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검토해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다른 어떤 구체적인 증거나 객관적인 사료보다는 신앙고백서인 성서를 기초로해서 그들의 역사를 재건해 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객관적인 사료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구전되어 내려온 자료들의 신빙성도 우리는 무시 할 수 없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도 그의 역사의 전부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일일이 들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서에 기록된 자료들도 때때로는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재해 나가는데는 여러가지의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밀러와 헤이즈(J. Maxwell Miller and John Hayes), 그리고 알스트룀(Gösta W. Alström)의 이스라엘 역사 서술 방식을 따라서 진행을 하고자 한다. 이들은 최근에 가장 고고학적이며 객관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저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른 학자들의 의견이나 자료들을 병행하고자 한다.
I.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의 사용은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헤로도투스 자신도 이 말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며 이것은 그 당시 이미 사용되고 있는 말이었다.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은 이 말이 블레셋인들(Phillistines)을 지칭 할 때 쓰는 말이었다는데 일치되고 있다. 즉 아카드어의 '팔라스투', 혹은 필리스투, 히브리어의 '블레셋', 아람어의 '펠리스타인', 이집트어의 '프르스트' 등이 이 블레셋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1.지정학적 위치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는 지중해 연안의 조그마한 나라지만 그 역사는 중동 전 지역과 지중해 연안 지역 및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이집트/이디오피아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왕국의 이름은 남북으로 분열될 때 북 왕국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남 왕국을 유다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보통 이스라엘이라 한꺼번에 부르는 이유는 왕국 시대 이전부터 에브라임 산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던 집단 이름이 이스라엘이었고, 왕국 초기의 명칭이 이스라엘이었으며, 포로기 이후에는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지중해 연안 지역은 보통 "비옥한 초승달"(The Fertile Crescent)이라 불리는 지역에 속해 있으며 이 지역은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 강 하류 평야 지대에서 출발하여 양강을 따라 올라가 지중해가 바라 보이면 왼쪽으로 굽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으로 이어진다.
2.지형과 도로
레바논 산맥(Lebanon)과 안티 레바논 산맥(Anti-Lebanon Mts.)에서 발원한 오론테스 강(Orontes)은 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 알레포의 서쪽 알라라크(Alalakh)까지 뻗어 있고 동일하게 레바논 산맥 동쪽에서 발원한 리타니 강(Litani)은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 두로 근방에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협곡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갈릴리 호수, 요단강, 사해 등으로 이어지며 아카바 만까지 연결되는데 이 협곡은 아프리카까지 펼쳐져 있는 대 협곡의 일부분이다.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바위와 토양은 바다의 침전물로 형성된 석회암이다. 석회암은 물을 간직하기보다 물을 쉽게 통과 시켜버린다. 이러한 석회암은 부서져 이룩된 토양인 팔레스틴의 토양은 가뭄이 심할 수 밖에 없다. 이 토양은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우기에도 건조하기 때문에 무역로로는 가장 통행하기 편리한 도로가 될 수 있다.
한편 지중해 연안 기슭과 요단 동편의 중부에는 단단한 암석들이 풍화되어 형성된 비옥한 붉은 땅(Terra Rossa)이 덮여 있어서 농사짓기에 알맞은 옥토를 이루고 있다. 유대 산지 남쪽에 펼쳐져 있는 네게브는 사막의 바람이 날라온 황각색의 먼지(황토)로 덮여 있으며 비가 조금만 와도 지각이 굳어져 버리기 때문에 비물은 스며들지 못하고 미끄러져 흘러가 버린다. 팔레스틴의 지형은 화산 폭발로 인한 지각 활동에 의해서 주로 형성되었는데, 화산 폭발의 흔적은 바산 지역과 갈릴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산암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지각 활동에 의해 생겨난 대표적 예는 바로 요단협곡으로서 이 협곡에는 지진이 빈번하다.
가장 중요한 도로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있는 해안도로(via maris,사 9:1)인데 이 도로는 북쪽으로 페니키아 지역(두로와 시돈)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의 북편에 있는 하솔을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케소포타미아 까지 연결되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므깃도,아스돗,가사 등을 거쳐 이집트로 연결되어 있다.
이 도로는 팔레스틴의 가장 중요한 도로일 뿐아니라 이집트에게도 북쪽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기에 도로 선상에는 요새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며 이집트인들은 이 길을 "호루스의 길"(the ways of Hours)즉 "파라오의 길"이라 불렀다. 그리고 대상들과 군대의 통행을 돕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물들과 역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해안도로에 대한 고대의 상세한 상황은 아나스타시 1세의 문서(Papyrus Anastasi I,ANET476-8) 에 나타나 있으며 더둑 상세한 것은 세티1세 (seti I)와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3.팔레스틴의 지역 구분
팔레스틴을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서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⑴ 지중해 연안의 해안지역 ⑵갈릴리와 에브라임 산지 및 유다 산지로 연결되는 중앙산지 지역 ⑶갈릴리 바다-요단강-사해로 연격되는 요단 협곡 ⑷요단 동편의 고원지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지중해 연안의 해안 지역
팔레스틴 지역중 가장 비옥하고 기후가 좋은 곳이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해안도로는 국제적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갈멜산 줄기에 있는 므깃도를 통과해야 한다. 따라서 므깃도는 진격해 오는 적군을 차단하는 중요한 요새로 치열한 싸움터가 되곤하였다.
2)중앙산지 지역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중심지역으로 북쪽에서 보면 갈릴리 고원지역,이스라엘 계곡,에브라임 산지,유다 산지로 이어진다. 사마리아와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으며 예루살렘은 유다지역에 있지만 거의 유다 산지와 에브라임 중간 지역에 위치해 있다. 팔레스틴의 등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앙산지는 보통 해발1,000m정도의 높이에 까지 이르고 있으며 겨울에는 눈이 올때도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830m의 높은 곳에 있는 산성으로 자연적인 요새지로 되어 있다. 연간 강우량도 적은 편이지만 그것도 며칠 동안에 오는 것으로 비가 올 때면 계곡에는 홍수가 지게 된다. 그러나 비가 그치면 계곡은 말라 버리고마는 와디(wadi,乾川)가 대부분이다.결국 이 산지에 정착해 살 수 있는 선결 조건은 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그들은 빗물을 모아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물 탱크에 저장해 놓고 쓰기도 하고 수십 길 되는 바위층을 뚫고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길어서 쓰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돌과 바위로 덮인 지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것도 힘들지만 뿌린 씨앗도 자주 반복되는 가뭄과 홍충이떼로 인해 추수할 것이 없는 흉년이 될때가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농업과 목축을 겸하여 어려운 삶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를 "약속의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불렀다.
3)요단 협곡
헤르몬 산(Mt.Hermon)기슭에서 흘러나온 물이 갈릴리 호수에서 모이고,다시 요단강을 따라 내려가 사해에 도착하게 된다. 언제나 흘러 내리는 강물은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역의 젖줄이 되었으며 주변에는 푸른 나무들이 자랄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 주변과 요단 강 북쪽 지역은 주변에 비옥한 토지가 연이어 있으나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삭막해지며 사해 주위에는 광야만 펼쳐져 있다. 사해 입구에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도시인 여리고(해저250m)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고 "소금바다"로 불리는 사해는 각종 공물질이 농도 짙게 녹아 있어 (약25%는 광물질) 오늘날 천연자원의 보고로 인정 받고 있다. 사해는 수면이 해저 약430m로 낮게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 늘어선 절벽에는 박해 받은 사람들이 피신했던 동굴들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이러한 동굴속에서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이 발견되기도 했다.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37km의 거리이지만 고도 차이는 1,080m(해발830m에서 해저 250m까지)에 달하는 급경사를 이루는 길이다.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는 직선거리로 20km에 불과하지만 고도 차이는 1,250m에 달하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4)요단 동편의 고원지대
아라비아 사막으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남북으로 고원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갈릴리 북동쪽은 바산이라 부르는데 현재 골란 고원(Golan Heights)지역이다. 옛날부터 목축지로 이름이 나 있는 이곳은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세력 다툼을 하면서 싸우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얍복강을 건너 남쪽으로는 암몬,모압,에돔 등의 나라가 차례로 위치해 있다. 암몬과 모압은 포도주 생산이 많았으나 에돔 이하는 광야로 연결되어 있던 주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르우벤,갓 그리고 므낫세의 일부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국력이 강할때만 통치가 가능한 지역이 요단 동편지역이다. 요단 동편지역을 관통하는 왕의 대로는 지세가 단순하지 않았으므로 굽이도는 곳,오르락 내리락 하는 곳이 많은 험한 도로이다.
4.팔레스타인 지역의 기후
기후는 아열대성이며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10월경부터 3월까지 겨울에는 비가 내리고 4월부터 9월까지 여름에는 아주 메마른 날들이 계속된다. 우기가 시작되는 10월에 내리는 비는 씨앗이 발육하기 좋은 비로 "이른 비"라 하고,이듬해 3월에 내리는 비는 열매의 성숙을 돕는 "늦은 비"라 하였다. 곡식농사는 가을에 씨뿌려 봄에 추수하게 되고,과일 추수는 가을에 하게 되는데 봄,가을 추수기에 축제도 함께 거행하게 된다. 봄 추수기에는 유월절/무교절, 오순절이, 가을 추수기에는 장막절이 거행된다. 강우량은 지역마다 차이가 심한데 갈릴리 지역은 연간 약1,000mm지만 사해 부근에는 50mm도 채 안되는 비가 내릴 뿐이다.
기후 문제의 심각성은 강우량에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짧은 시간 내에 한꺼번에 비가 쏟아져 내린다는 사실이다. 우기인 6개월기간 중 비가 내리는 기간은 불과 두 달 정도이며 비가 올때는 한꺼번에 쏟아져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을 씻어내려가 버린다. 그리고 물도 역시 계곡으로 쏜살같이 흘러가 버린다.
5.경제생활
고대 중동의 여러 국가들의 경제가 그러하였듯이 농업과 목축은 팔레스틴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농업은 관개에 의존하지 않고 하늘의 비와 이슬에 의존하는 지역적 영농이었다. 따라서 가뭄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 없었고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풍요한 땅"을 의미하는가? 분명 팔레스틴 땅, 특히 중앙 산지 지역은 척박한 땅으로 "풍요한 땅"은 아니었다. 그러면 채 여물지 않은 햇곡식에서 흘러나오는 우유빛 액체와 산지의 바위 틈에 흐르는 야생꿀이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목축으로 얻을 수 있는 "젖"과 수목재배로 얻을 수 있는 "꿀"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기에 그들은 그 땅을 그렇게 불렀는가?-"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로다!"
II.역사 이전의 팔레스타인
1.주전 2000년 경 이전의 고대 오리엔트
성경에 묘사되어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히브리인의 족장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본향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전사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이 시대에 대한 오리엔트 역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미 주전 6000년 대에 메소포타미아 강 하류에서는 하수나(Hassuna)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이미 어느 정도의 동석기 병요시대로 옮겨가는 시점에서 이 문화에서는 이미 사마라(Samara) 토기라는 훌륭한 문화가 있었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고루 퍼져있었다.
주전 4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메르인에 의한 찬란한 문명이 꽃을 피우게 된다.그들이 하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나 그들이 어떠한 인종이었으며,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쨌던 이 시대의 문화들이 수메르어로 기록되었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이다.
주전 24세기에 셈족 지배자들로 이루어진 한 왕조가 세계를 장악하고 세계역사에 최초의 본격적인 제국을 창건하였다.창건자는 사르곤(Sargon)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 츨생 내력은 베일에가려져있다. 그는 키쉬(Kish)에서 정권을 잡은 뒤 페르시아만에까지 이르는 수메르 전 지역을 복속시켰다.이러한 아카드의 왕들은 수메르 문화에 도시국가의 테두리를 훨씬 뛰어넘는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최근에 에블라(Ebla,알레포의 남쪽 북부 수리아에 있는 텔 마르디크)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간행되고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면서 이 시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의 세력은 주전 2200년 경에 구티(Guti) 족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운데 제 3 우르(2060-1950년 경) 왕조의 문명이 꽃피게 된다.이 모든 것들이 다 수메르 문명에 속한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부흥은 마지막이었으며 수메르 문명도 1500여 년간 진행되다가 마지막을 고하게 된다.
2.초기 청동기 시대의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에서 주전 3000년대의 대부분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초기 청동기 시대로 알려진 새대에 해당된다. 이 시대- 또는 이 시대로 접어드는 과도기적 단계- 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원시 문자시대의 문화가, 이집트에서는 게르제 문화가 번성했던 주전 4000년대 후반에 시작해서 주전 3000년대의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이다.
비록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과는 비교될 수 없지만 이 곳에서도 주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대체로 에블라의 전성기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은 모든 점에서 발견된다. 이 시기는 도시가 크게 발전했고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였다.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도시들 중 다수의 도시가 이미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II.이스라엘의 기원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해 직접 이야기 해 주는 자료는 성서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간접적인 자료들만이 고고학과 성서외의 문헌에서 발견될 뿐이다.한편 성서는 신학적 의도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를 재 구성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으며 역사비평학(Historical Criticism)을 동원하여 검토한 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1.성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부분은 주로 창세기로 부터 여호수아에 이르는 여섯권의 책(Hexateuch)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대기에는 아담부터 기록되어 있지만 족보로 간단히 제시할 뿐이다 (대상 1:1- 2:8). 창세기-여호수아에 펼쳐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창세기 1-11장은 원시역사(元始歷史)라 하여 천지가 창조될때 부터 아브라함 이전까지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해와 달과 별,나무와 동물 및 물고기 그리고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였다. 에덴("즐거운곳") 동산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가 거기서 살도록 하였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사건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 당했다.
고대 세계에 살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장수하였으며(므두셀라는969년) 영웅들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죄가 많아 홍수로 인류가 멸망 당하게 되었는데 노아의 가족과 선택된 동물들만이 살아 남게 된다.노아의 아들인 셈,함,야벳이 각 종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시날 평지에 함께 살았으나 바벨탑을 쌓은 까닭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언어가 달라지고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창세기 11장 27절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아브라함은 셈의 9대손으로 갈대아 우르지역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였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 다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후처와 첩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은 아랍족들의 조상이 되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여 브엘세바 부근에 살았는데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얻었다.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빼앗기고 결국 에돔족의 조상이 되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 및 두 첩들에게서 열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이 되었다.
출애굽기는"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 왕이 히브리인들을 강제 노동시키며 남자 아기를 학살하는등 박해받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히브리인이면서도 이집트 공주에게서 양육받은 모세를 하나님은 불러서 이집트 왕을 굴복시킨후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떠났다.
모세의 지위권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언약궤 또는 하나님의 궤)를 맨 제사장을 앞세웠는데 그들이 강물에 들어서자 강물이 갈라지고 모두들 요단강을 육지 같이 건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땅을 차례로 정복했는데 군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지해서 정복 사업을 수행했다. 정복한 가난안 땅을 지파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갖게 되었는데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이므로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지파에 소속된 성들을 분배 받았다. 이리하여 요단강 동편의 일부는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 되었으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땅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1)성서 자료의 문제점
⑴ 연대기
성서의 연대
창조 주전 4164 +-2666 -+
출애굽 주전 1498 -+ 480년-+ |
솔로몬 성전 주전 1118 -+ | | 4000년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전 538/9-+ 480년-+ |
마카비 성전 주전 164 +-1334 -+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서의 연대기는 다분히 성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신학적 연대기로 보이며 실제 역사의 연대기로 취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2)족보
아담과 하와로 부터 아브라함 및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일련의 족보로 설명되고 이웃나라들도 족보로 연결되는 모습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사사기 1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때까지도 정복되지 않은 많은 지역들이 있었으며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다른 민족들이 함께 섞여 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잦은 전쟁과 국제적 통로에 위치해 있는 점 등은 혈연으로 연결된 하나의 민족이라 주장하는 데에 의구심을 던져준다. 족보는 여러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는 접속점으로 사용되었으며 긴 역사를 간단히 줄여 이야기할 수 있는 방편으로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나라간의 위상 문제,민족간의 갈등 문제,땅의 소유권 문제 등의 기원과 해결점을 제시해 주는 수단으로 족보가 사용되기도 했다.
3)모순과 충돌
창세기-열왕기의 기록과 역대기의 기록은 충동을 일으키며 차이가 있다. 때로는 예언서들이 다른 이야기로 충돌을 일으킬 때도 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 말하며 생명을 보존하려했던 이야기가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창12:10-20;20장),이삭이 비슷한 경우를 당하는 것(창26:1-11)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4)기타
다양한 민간 전승들이 신학적인 의도하에 수정되고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라든다 이야기에 흔히 나타나는 "신데렐라 모티프",즉 버림받은 아이,혹은 보잘것없는 시골 아이가 장성하여 큰 인물이 되는 주제가 자주 나타남을 볼 수 있다.노예인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고 나일강에 떠내려오던 히브리인의 갓난아기 모세가 바로 왕궁의 왕자가 되는 이야기 등이다.
2.성서 외 자료들
1)아모리인 가설(The amorite Hypohesis)
1930년대 학자들이 만든 가설로서 청동기중기가 시작될 무렵(MBD.2000-1800)고대 중동의 도시 문명이 파괴된 것은 아모리인의 이동 때문이며 이 시대가 족장들의 이동 시기였다는 가설이다. 그 당시 이러한 궤멸 현상은 시리아-팔레스틴뿐아니라 이집트(제1중간기)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볼 수 있었다.아모리인의 가설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① 아모리인 가설은 성서의 연대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성서 연대기 자체를 역사적 연대기로 보기 어려우며 MT와 LXX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이 서로 다른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 이집트 체류기간에 대해서 MT안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출애굽기12:40에는 430년 동안이라 하였지만 창세기 15:16에는 4세대 동안 (레위-고핫-아므람-모세)이라 하였다. 고핫은 이집트로 내려 갔을때 이미 태어났는데 133년을 살았고 아므람은 137년,그리고 출애굽 할 때 모세가 80세였으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0년 미만이다.(창46:8-11,출5:16-20 참조;민3:17-19;26:58-59;대상6:1-3).
② 아모리인의 이동에 의해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뿐이며 성서에서도 족장들을 아모리인과 연관시키지 않고 아람 사람(시리아인)과 연관시키고 있다("나의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었다."신26:5)
③ 청동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나오는 사람 이름과 풍습이 족장들의 것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철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이름과 풍습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는 족장들의 배경이 청동기 시대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④ 아모리라는 말은"서쪽"이란 뜻의 아카디아어 amurrum과 수메르어 martu에서 왔으며 따라서 아모리에는 "서쪽 지역"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서쪽 지역은 보통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때 유프라테스 강에서 지중해에이르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서에서는 가나안 원주민 중의 한 족속을 말하며(창15:16) 요단강 동편에도 아모리라는 이름이 너무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므로 아모리인을 특정한 민족으로 보거나 언어의 통일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2)창세기14장의 이름 및 지명들
창세기14장1절에 나오는 "시날 왕 아므라벨"이 바로 함무라비왕이라는 가설은 언어학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함무라비왕이 팔레스틴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에블라에서 발견된 토판은 주전2600-2300년경으로 보이며 창세기14장에 나오는 5성의 이름과 유사한 단어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소돔(sedom)과 si-da-mu라는 단어, 아드마('admah)와ad-ma라는 단어는 너무도 닮았다. 그러나 에블라인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3)아마르나 편지와 하비루/아피루 가설
이집트의 엘아마르나(el-Amarna)지역에서 1887년부터 발굴된 아마르나 편지들은 350개의 토판에다 쐐기형 문자인 아카디아어로 쓰여졌으며 주전15세기 말엽에서 주전14세기 초에 걸쳐 기록된 서신들이다. 주로 아메노피스4세(Amenoph-is IV;약 주전 1379-1362)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아마르나 편지 가운데는 이집트의 세력하에 봉신으로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의 통치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며 보낸 편지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당시 예루살렘 왕 압두헤바(Abdu-Heba)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에 나타나는 아피루(Apiru)는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ibri)와 비슷하고 연대도 성서의 연대와 일치하여 많은 학자들이 아마르나 편지에 나오는 아피루가 바로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① 언어학적 문제점:아피루(Apiru)의 두번째와 세번째 자음 사이에 있는 장모음발음이 히브리인이라는 단어('ibri)에는 없는 점을 설명하 기 어렵다.
② 사회학적 문제점:아피루는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수메르에서 이집트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므로 (주전2000년부터 주전1300년대까지)아피루의 정체를 규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아피루를 주전 14세기의 어느한 민족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고대 중동의 한 사회 계층을 일컫는 단어로 이해 된다.아피루는 기존 사회 체제에서 밀려난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며 그들은기존 사회 구성원이 누리는 법의 보호를 받을 없는 소외 계층을 일컫는 말이다.그들은 주로 고용된 외국 노동자들,용병,반역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 헤이스(J.H.Hayes)는 히브리인의 기원을 아피루에서 찾기보다 사회-제의적(Socio-Cultic)측면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즉 히브리인('ibri)은 건너가다('br)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리적으로 건너가든지(pass over)혹은 제의적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의미한다. 제의적으로 경계선을 넘어간다는 뜻은 초태생을 성전에 바치는 제의를 말한다. 또 성전에 바친 자녀들(장자들)을 위해 속전을 바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성전에서 봉사하게 되고 그 아이들을 성서에서는" 히브리인 종"혹은 느티님/나실인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4)힉소스 시대와 출애굽
이집트의 힉소스 왕조는 MBII의 시기 즉 제15-16왕조(주전 약1800-1500)때 외국인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셈족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었고 외국인이 고위직으로 출세하기도 쉬운 형편들에 의해 주전 16세기 후반에 쫓겨나게 되었다. 힉소스의 이집트 장악과 축출 연도는 성서에 나오는 근접하고 있다.성서의 연대기가 실제 역사의 연대개와 거리가 멀고,다른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 볼때 출애굽 연대는 적어도 주전13세기 이후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힉소스의 축출을 출애굽의 사건과 관련 시킬 수는 없다.
5)라메시드(Ramesid)시대와 출애굽
성서에 보면 비돔과 라암세스 성들의 이름이 히브리인들이 강제노동 당하는 이집트에 나타나 있다(출1:11).라암세스라는 이름은 이비트 제19-20왕조(주전 약1320-1085)에 자주 나타나는 왕의 명칭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비돔과 라암세스를 건설할때 강제노동 당한 것을 역사적인 사실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레드포드(D.B.Redford)는 비돔,아람세스,숙곳이라는 도시 이름들이 후기에 즉 주전 7-6세기 경에도 나타남을 지적했으며 셈족들이 계속 이집트에 왕래하고 체류하였음을 주장했다.
6)샤수(Shasu) 와 이스라엘
헤르만(S.Herrmann)은 이스라엘인들을 샤수라고 보았다. 샤수는 라메시드 시대의 이집트 문헌에 나타나며 이집트 국경을 넘나드는 유목민이다. 헤르만은 샤수 유목민이 아라비아 북쪽에서 아람인들의 일부분으로 에돔,가데스를 거쳐 팔레스틴에 들어갔으며 또 한 부류는 에돔에서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탈출하여 가데스와 요단 동편을 거쳐 팔레스틴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람인들이 남쪽 지역에 있었다거나 샤수와 관련이 있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더구나 샤수가 청동기 시대 때 가데스나 시나이 반도에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이집트 문헌에 나타나는 샤수는 어떤 특정한 민족으로 나타나지 않고 광범위한 유목민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또 헤르만(S.Herrmann)은 야웨 종교의 기원을 아라비아에 있었던 샤수에서 찾아보았다. 그는 아베노피스3세 (주전1403-1364)와 라마세스2세(주전1290-1224)때의 지명을 언급하는 중에 "야웨의 샤수인들의 땅"(land of the sh'sw ybw')이란 구절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러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 지명은 아카디아어 에서 발견되는 인명인 Yahwi-ilu와 비슷한 사용법인 애칭(hypo coristic form)으로 볼 수 있다.
7)주전13세기의 파괴 흔적
주전13세기 즉 청동기 말기(I.B)에 요단강 서부지역에 있었던 도시들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 학자들은 이 도시들이 바로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히브리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는데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파괴된 도시들이 전쟁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는냐 하는 점을 고고학적으로 밝힐수 없고 더구나 동일한 적군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되었느냐 하는 점을 알 수 없다. ② 청동기 말기에 파괴된 도시들은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 (라기스,하솔)대부분이 성서에 나오는 도시와는 다르다.③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도시들을 점검해 본 결과 많은 도시들이 주전14-15세기 때는 전혀 사람이 살지 않았거나 희소하게 살고 있었으며 주전13세기에 파괴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도시들임이 밝혀졌다.이러한 도시들은 헤스본(Tell-Hisban),여리고(Telles-Sultan),아랏(Tell Arad),아이(et-Tell)기브온(el-Jib)등이다.
8)메르넵타 스텔라 (Merneptah Stela)
고대 중동 문헌에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이기에 일명 "이스라엘 스텔라"(Israel Stela)라고 불리기도 한다. 메르넵타 스텔라는 이집트왕 메르넵타의 승전비로서 주전1230년경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명(碑名)을 둘러싼 논쟁점은 "이스라엘"이 지역 명칭이냐 집단 명칭이냐에 있다.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가나안과 후루 사이에 있으며 블레셋의 도시들인 아스겔론,게제로 그리고 그 도시라 짐작되는 야노암 등이 앞에 있다.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도 지역 명칭 같아 보이지만 이 단어 앞에는 상형 문자로 된 표시가 있다. 이 표시는 보통 집단 명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지파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이 적어도 주전 1230년경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3.이스라엘의 기원
1)올브라이트 (W.F.Albright)
올브라이트는 아브라함 등 족장들을 역사적 인물로 보았으며 아브라함을 노새 무역상인(Donky Caravancer)으로 보았다.창세기 14장13절의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서 올브라이트는 아브라함을 아피루로 보았고 주전 19-18세기에 "먼지"('aphar-'아피루'와 비슷)를 일으키며 노새를 몰로 다니는 무역 상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히브리"와 "아피루" 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이에 기초한 "노새 무역 상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주전 13세기에 파괴된 도시들은 고고학 발굴 결과 성서의 도시들과 맞지 않을 뿐더러 이스라엘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올브라이트는 이스라엘 특유의 문명이 있었다고 보았는데 그는 칼라 토가 (Collared-rim jar)를 이스라엘 고유의 토기로 보았다 그러나 하솔(Tell ei-kedah)을 발굴한 결과 주전 13세기에 파괴된 흔적이 있었는데 파괴 이전에 살던 사람이 채색 토기를 사용 했음을 발견했다.
2)외부 유입 혹은 정복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⑴ 빔슨(J.J.Bimson)은 주전15세기 후반 (약1470)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으나 원주민과 쉽게 동화하여 살았으며 주전13세기에 파괴된 도시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도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빔슨은 주로 13세기설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했지만 외부 유입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 하지 못했고 아랏,헤스본,아이 들의 도시들에는 MB(청동기 중기)층과 LB(후기청동기)층이 없는 점을 설명하지 못했다.
⑵ 바룩 할펀(Baruch Halpern)은,주전14-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너 중앙산지에 진입했는데 전통적으로 이집트에 반란을 자주 일으켰던 가나안인들을 합류시켜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주전12세기" 드보라의 노래"(삿5:13-18) 시대에는 지파 동맹체를 결성했다고 주장했다.
⑶ 말라마트(A.Malamat)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었던이유는 심리전과 기습전을 병행했고 정탐꾼을 보내어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으며(민13; 수2; 7:1-3; 삿18:2-10)가나안 도시들이 이집트에 의해 착취당하고 분열되어 있었던 약점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3)점진적이며 평화적인 유입
알트(A.Alt)는 유목민이 건기와 우기가 변화됨에 따라 끊임없이 왕래하다 인구밀도가 낮은 산지에 정착했는데 대체로 평화적이었고 약간의 충돌만 있었을 따름이라 주장했다. 노트(M.Noth)는 알트의 이론에다 12지파 동맹설(Amphhhh hictyony)을 결합시켜 발전시켰다. 창세기 49장의 12지파(레위포함)는 초기의 것이며 민수기 26장의 12지파(레위제외)는 후기의 것이라 했고 여호수아 24장은 12지파 동맹의 헌장이라 했다. 노트는 이스라엘이 정착하는 모습을 2단계로 구분했는데 첫 단계는 레아와 첩들의 자손 지파들이 들어 온 것이며 두번째 단계는 라헬 자손지파들인 요셉 지파(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가 진입한 것으로 보았다. 요셉 지파가 들어올 때는 벌써 부분적인 지파동맹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야웨종교를 소개한 지파가 바로 요셉지파라고 노트는 주장했다.
야곱 이주를 에돔에서 유목민이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넘어간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다.또한 노트는 주전13세기에 히브리인들("아피루")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탈출한 것으로보았다. 알트/노트 이론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① 성서의 가나안 정복설을 신명기 학파의 작품으로 보아 완전히 거부한 점:노트는 그의 양식사 비평에 너무 의존하여 때로는 역사적 자료를 내포하기도 하는 기원 설화(aetiology)를 제외 시켰다.
② 유목민이 평화롭게 정착했다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마리문서(mari -texta)를 보면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이동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③ 12지파 동맹설은 하나의 가설일 뿐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이 가설에 대한 비판은 다음장을 보라)
4)혁명에 의한 변화
앞서 지적한 대로 아피루와 히브리인은 언어학적,사회학적으로 직접 연결시킬 수 없으며 "농민혁명"이란 구상은 현대적 개념으로 고대 사회에 적용될 수있을지 의문이다. "농민혁명"을 뒷받침해 줄 만한 성서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등이 지적됨에 따라 아피루의 "농민혁명"이란 모델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5)사회-정치-경제적 내부 변화
알스트룀(G.Ahlström) 은 고고학 자료와 아마르와 서신에 비추어 볼 때 군사적 정복이나 농민혁명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주전13-12세기에 중앙산지에인구가 증가하였는데 그는 "사회적 불안과 불만" 그리고 해양족속(sea people)의침입 때문에 해안평지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이 산지로 이동한 대규모 집단과 요단 동편의 유리하는 "아람 사람들"인 야곱 족속이 합류한 것으로 보았다."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중앙 산지에 정착할 당시에는 그 지역 이름이었으며 남북 분열 왕국시대에는 북왕국의 명칭이었고 포로 후기에는 종교적으로 야웨의 백성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고 알스트륌은 주장했다.
쿠트(R.C.Coote)와 휘틀램(K.W.Whitelam)은 성서를 신앙 고백적인 문서로 취금하여 일단 제의해 두고 신고고학(New Archseology)적 방법으로 발견된 사실에 기초하였는데 주고 지리적 연구와 팔레스틴에 장기간 거주한 생활 양식에 근거하여 사회학적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피력했다. 따라서 외부 유입설을 반대하고 내부적 변화로 보았으며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을 가나안과 연속된 집단으로 보았다.그들은 반 상업적 (anti-commercial), 반 도시적(anti-uran),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다른 집단과 지역및 지파들이 산간지대에 모여서 이룩된"이스라엘"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쿠트와 휘틀렘이 신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여러다양한 인접학문들(예:사회학,경제학,인류고고학,지리학,생태학,심리-생리학 등)을 동원한 것은 큰 공헌이었으나 아직도 신고고학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가장 큰 공헌은 역시 알스트룀이 제공하지 못했던"왜"(why)라는 질문을 경제-사회-정치적 이유를 들면서 답변해 주었다는데 있다. 물론 그 답변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은 아니나 상당히 설득력 있는 답변을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큰 약점은 중요한 자료인 성서를 완전히 제외한 점이다.
핑겔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이스라엘이 정착한 곳이라 여겨지는 곳들을 발굴한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원래 가나안 사람이었던 이스라엘은 주전16세기에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떠나 사막부근에서 목축/유목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주전 13세기에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주전12-11세기에 대부분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정착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위 가나안인들과 이스라엘이 구별되고 마찰이 일어나기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서쪽으로 확장을 시도할 때 부터였다.핑겔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고고학적 발견을 기초로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다분히 주관적 견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예를들면 특정 발굴 장소들이이스라엘 정착지"인지 아닌지를 판명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다. 전체의 지표들을 종합하여 귀납적으로 결론을 도출했다기보다 자신의 견해를 연역적으로 피력한 것이 그의 약점이다. 밀러(J.M.Miller)는 절충적인 입자으로 성서의기록과 고고학 및 고대 중동의문헌들을 모두 고려했다. 그는 이 모든 자료들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히기에는 너무도 불충분하여 역사가는 추수만 할뿐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성서는 신학적으로 채색된 문학작품이지만 비평적으로 검토해 볼때 이스라엘이 태어나던 시기의 팔레스틴,즉 청동기 말기와 초기철기 시대의 팔레스틴은 다양한 것들이 모두 녹아 융화되는 용광로 (meiting)로 밀러는비유하였다. 밀러는 이시대를 사사 시대와 초기 사울 왕 시대와 비숫하다고 보았으며 사사시대직전의 단계도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았다. 밀러는 사사기를 시바럼으로 하여 거꾸로 이스라엘의 기원을 살펴보았다. 밀러는 이스라엘을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원ㄹ해 가나인 땅에 살았던 사람들.,즉 유목민으로 정착한 사람들,이주한 아람인들,해양족속들,해양족속에 쫓겨온 안지역 주민들 등 모두가 섞여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밀러는 우리앞에 놓여진 자료들이 너무 불충분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이 불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사사 시대를 기술하는 장에서 어느정도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6)결론
성서에는 서로 다른 전승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학적인 의도아래 그들이 배역되고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수직적인 족보 체계는 성서의 신학적 의도로 된것이요,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핏줄로 한꺼번에 출애굽하여 모두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이 족보 체계는 역사적 정보이기보다는 신학적 족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을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나 고대 중동의 국제사회의 한 부분으로 전개되었고 고대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 나라였다.
에돔왕국도 이때 태어났다. 이 변화 이전에는 이집트가 오랫동안 팔레스틴 지역의 도시들을 장악하여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왔는데 주전 13세기 후반에 지중헤로 부터 해양족속이 밀려오면서 이집트는 약화되었고 북쪽의 히타리트도 붕괴되었다. 청동기 문명이 있었떤 곳에 철기문명이 도입되면서 도처에 정복과 몰락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지중해 연안 지역에는 해양족속들이 밀려들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거기에 살던 원주민들은 내륙산지로 밀려올라가게 되었다. 이집트로 더이상 이들을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국제사회의 세력균형이 깨어지면서 번성했던 국제무역도 쇠퇴해 갔고 상업에 의존하던 지중해 연안의도시들은 경제적으로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상업이 쇠퇴해진 상황에서 그때까지 눈여겨 보지 않았던 팔레스틴 산지는 이제 농업과 목축지재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괴었고 철기 문명의 도입으로 농긱구와 농업기술의 발전은 해안지역에서 내륙 산지로의 인구이동를 가속화시켰다. 팔레스틴 산지로의 인구이동은 서쪽 해안뿐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도 있었다. 그 당시 중동 지역의 민족이동으;螡 물결을 따라 아랍 사람들,사막 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집트 지역에서 유입된 사람들 등 각 방면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와 산지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성서가 말해주는 족장들,광야로 부터의 유입,출애굽한 사람들의 유입 등은 이러한 민족 이동의 물결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개척지로 가는 행렬 속에 아피루같이 소외되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주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리를 네 근본과 태어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다. (겔16:3,34)
이스라엘은 결코 단일 민족으로 출발하기 않았다. 경제-사회-정치적인 이유에서 여러 다양한 집단이 모여서 이룩되었으며 이것은 고대중동의 국제사회가 만들어 낸 작품 중의 하나였다.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웨 하나님 앞에서 야웨께서 자신들을 낳으셨다고 고백하며 찬양했다.
IV.사사시대
1.자료
1)성서자료-사사기
사사기 1장에는 가나안 정복을 마무리하면서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지녁들이 열거되어 있다. 또 사사기에는 각 지파들의 생활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지파들을 이끄는 지도자들 즉 사사들이 출현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으 신이 함께할때 큰 능력을 발휘하여 지파들을 어려움에서 구했다.때로는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의 마찰 관계가 기록되어 있는 등 사사기는 사사 시재 당시으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물론 사사기도 역사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책이다.
출애굼과 솔로몬 성전 사이의 기간을 480년으로 보는 성서 연대기 구조 속에서 각 지파의 사사들의 활동기간을 20년,40년,80년으 숫자을 반복사용하여 사사들을 일려로 정렬시켜 놓았다. 그러나 사사들을 자세히 보면 사사들은 각 지파의지도자였고 영웅들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사들은 지파들 전체의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고 활동 시기도 지파 나름이었기 때문에 사사들을 연대적으로 앞뒤로 나란히 세울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각 사사들의 소속 지파,활동시기,활동내용등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웃니엘(유다출신으로 짐작):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 아람나하라임(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40년 동안의 평화가 있었다.(삿3:7-11)
에훗(베냐민 지파):모압 왕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군사들을 연합하여 종려나무 도시(여리고)를 점령하고 18년 동안 압제 하였다. 에훗이 이들을 물리친후 80년 동안의 평화가 있었다. (삿3:12-30)
삼갈:아낫의 아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600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삿3:31)
드보라(에브라임 지파):하솔에 수도를 둔 가나안 왕 야빈이 철병거를 이용하여 20년동안 압제했다. "라마와 벧엘 사이의 종려 나무 아래 앉아서 " 사사일을 보던 여 예언자 드보라는 납달리 출신 바락과 함께 출전하였는데 스불론,납달리,잇사갈,에브라임,베냐민 등의 지파들과 겐 족속 헤벨이 참전하여 야빈을 물리쳤다. 40년 동안 평화가 있었다. (삿4-5장)
기드온(므낫세):오브라출신 기드온(여룹바알)은 7년간 압제한 미디안인들을 격파하였다. 기드온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와 므낫세 지파들을 동원하여 그 중 300명을 엄선한 후 싸워 승리하였는데 40년간 평화가 있었다.(삿6-8장)
아비멜렉:기드온 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70명의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이되어 이스라엘을 3년간 다스렸다(삿9:22).그는 여인이 던지 멧돌 윗짝에 맞아 부상한 후 죽었다(삿9장).
돌라(에브라임 산지):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는 23년동안 사사로 있었다(삿10:1-2).
야일(길르앗 사람):22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에게 아들30명이 있어 어린나귀 30을 탔고 길르앗 땅에 30성읍을 두었다"(삿10:3-5).
입 다(길르앗 사람):기생의 아들이며 잡류들의 두목인 입다는 길르앗의 장로들과 협상한 후 그들의 "장관"(leader)과 "머리"가 되는 조건으로 암몬과 싸워 이겼다. 암몬은 18년동안 압제했는데 입다는 암몬을 격퇴한 후 6년간 사사로 있었다. 또한 불평하는 에브라임사람들을 쫓아 버렸다(삿 10:6-12:7).
입산(베들레헴 사람):베들레헴 사람 입산은 7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는데 타국 사람들과 결혼시켰다(삿12:8-10).
엘 론(스불론):10년동안 사사로 있었다(삿12:11-12).
압 돈(에브라임):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 출신인 압돈은 8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는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있었으며 그들은 70필의 어린 나귀를 탔다. (삿12:13)
삼 손(단 지파):소라 땅 단 지파 출신인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20년간 사사로 있었다. 두 눈이 뽑힌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도 함께 죽었다. (삿13-16장)
사사들의 활동 내용을 살펴볼때 사사들은 지파 혹은 지역의 지도지들이었으며 각 사사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하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주변으 지파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메르넵타 비문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원래의 이스라멜은 에브라임 산지를 중시므로 형성되었으며 사사들도 에브라임 산지와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하였다. (드보라,돌라,압돈)
①하나님을 배역함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야웨을 잊어버리고..."
②징계:"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와 ?수산리사다임 손에 파셨으며..."
③회개(부르짖음):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께 부르짖으며..."
④사사를 보내어 구원함:"야웨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라."
⑤평화:"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 죽었더라."
2)성서 외 자료
성서외의 자료로는 이집트-앗수르 문헌들과 팔레스틴 고고학탐사 결과 들이 있다. 청동기 말엽(LB,주전 1550-1200)팔레스틴 지역의 도시들은 이집트의 봉신으로 지내왔으나 해양족속의 침입으로 파괴되기도 하고 (므깃도,벳산,하솔,아벡,게셀,아스돗,벳세메스)정치-경제적 혼란기를 맞아 인구가 해안에서 산지로 이동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팔레스틴에 살았던 다양한 족속 중의 일부일 뿐이다.주전 15세기의 이집트 문헌(파라오 아메노피스 2세의 문헌)에 보면 이집트 왕이 팔레스틴에서 사로잡아온 폴들 가운데는 아피루,샤수,카루(정착인?)등의 집단들이 섞여 있었다. 이 다양한 족속들이 섞여 살던 팔레스틴 땅은 철리시대로 바뀌면서 종족들이 단일화하기보다 더 많은 종류의 종족들이 유입되어 팔레스틴 땅은 각종 종족들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2.지파별 상황
성서에서는 야곱의 12아들들이 조상이 된 12지파의 가나안 정착을 이야기하고 있고 12지파가 모두 함께 모이는 회합을 (여호수아24장의 세겜모임)전제로 사사시대를 시작하고 있지만 정작 사사기에 나타나 있는 상황은 지파들의 개별 활동이 있을 뿐이다. 때로는 지파들 간에 갈등도 있었고,싸움도 있었다. 길르앗 지파를 이끄는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와 싸워 에브라임 지파를 패배시켰으며 (삿12:1-6)이스라엘으 지파들과 베냐민 지파가 서로 싸워 베냐민 지파가 크게 학살당하였다(삿20:1-48). 드보라의 경우(삿5장)10개의 지파가 언급되고 있지만 그 명칭들은 야곱의 12아들과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불일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M.Noth)는 지파 동맹체(amphictyony)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었다.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그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지파동맹체으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그가 사용한 언어는 팔레스타인이 아닌 고대 그리스 델피신정에서 사용한 언어(헬라어)이며 인도-유럽(Indo-European) 문화권에 속한 개념이다. 문제는 팔레스틴을 비롯한 고대 중동지역에서 이러한 지파동맹체제를 발견할 수 업소 그리스와 시탈리아 등지에서 주전 10세기 이후에야 나타난다는 점이다.
⑵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앰픽티오니는 그것을 구성하는집단의 수가 7혹은 11또는23개의 집단들로 되어 있으며 언제나 12개의 집단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성서에서 12하는 숫자는 실제적인 숫자라기 보다는 "완전한 전체"라는 개념으로 쓰여지는 신학적 혹은 문학적인 숫자일 경우가 많다.
⑶ 노트의 이론을 뒷받침한 민수기 26장은 제사장 문서로서 후기에 첨가된 것이며 민수기26장은 민수기1:20-43;2:3-31;1:5-15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유다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수정된 것이다.
⑷ 사사기와 사무엘상·하에는 지파들이 모이는 중앙성소가 나타나지 않는다.법궤가 안치된 성소로서 12지파 모인 성소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아마도 12지파에서 하나의 중앙 성소를 관리하고 유지했다기 보다 각 지파 혹은 ?遁락별로 각기 다른 성소를 유지하고 관리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12지파의 대표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함께 모였는지도 모호하다.
⑸ 지파동맹의 상징인 법궤를 메고 가지 않는 모습이 사울시대에 나타나는 점,그리고 20여 년 동안 법궤를 개인집에 버려둔 점(삼상7:1-2)등은 지파 공동체가 있었을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1)에브라임/이스라엘 지파들
에브라임은 세겜과 벧엘 사이에 위치한 중앙산지 지역으로 에브라임 지파 북쪽에는 므낫세 지파 그리고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있다. 또한 요단강 동쪽에는 길르앗이 자리잡고 있다.
베냐민("남쪽 사람들"이란 뜻)은 기브아를 중심으로 에브라인 남쪽에 위치해 있고 그 명칭의 의미에도 에브라임에서 보는 관점이 들어있다.
므낫세지파는 북쪽 중앙 산지에 위치해 있으며 이스르엘 계곡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요단 동편에는 마이르 족속이 있었으며 바산지역에 거주했다. 므낫세 지파는 도시 외곽에 거주하였고 도시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메르넵타 비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은 어느 지파를 가리키는 것일까? 밀러(J.M.Miller)는 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그리고 요단 동편으 마히르,길르앗 등으로 군데군데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2)갈릴리-이스르엘 지파들
이 지파들은 아셀,스불론,잇사갈,납달리 등을 말하며 이들은 벳산에서 단 이남까지 그리고 갈릴리에서 지중헤 연안까지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불론과 잇사갈(창49:13;신33:18-19)그리고 아셀(삿5:17b)지파들은 원래 지중해 연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해양족속들에 밀려내륙으로 이동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잇사갈 지파는 이름 자체가"고용하다"(sbakar)란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창세기49장14-15절을 참고해 볼 때 잇사갈 지파는 비옥한 이스라엘 지역에 노동자로 고용되어 생계를 꾸려간 것으로 짐작된다.
3)단,르우벤,갓
르우벤과 갓 지파들은 요단 동편에 거주하였는데 그 경계선은 모호하다.모압 왕 메사의 비문에는 "갓 사람들"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갓 사람들"이 살던 땅은 "아타롯 땅"이라 하였다(ANET 320-21). 아타롯은 오늘날 디본으로부터 북북서쪽으로 13km에 잇는 지역이다. 여호수아22장에는 르우벤,갓,므낫세 반지파들이 요단 동편에 제단을 만들었다고 여호수아(에브라임 지파)가 항의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에 이 지파들은 그 제단은 제사를 드리려고 만든 것이 아니가 다만"증거의 단"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수22:13-34). 아마도 이 제단은 "르우벤 자손 보한의 돌"(수15:6)과 동일한 것으로 짐작된다.
4)유다와 남쪽 지파들
유다 산지와 쉐펠라,네게브,유다 광야에 걸쳐 거주한 집단들은 유다. 갈렙,고라,그나스,예라멜,겐,시몬 등이었다. 유다지파는 사사시대에 별로 중심되는 지파가 아니었으며 그 영역도 헤브론과 예루살렘 사이에 있었던 작은 지파였다. 아마도 겐 족속은 유랑하는 대장장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3.사사 시대의 종교
여호수아에서는 11지파가 야웨를 섬기는 레위지파의 지도아래 세겜(수8:30-33;24장)과 실로 (수 21:1-2;22:12)에 함께 모였으며 세겜과 실로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사사 시대의 전체 상황과 맞지 않다. 왜냐하면 사사시대의 종교는 각 부족이 서로 상이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틋히 사사기 6-9장과 17-18장의 여룹바알과 미가의 이야기를 보면 서로 상이한 종교를 그들이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사사 시대의 실로 성소는 이스라엘의 성소가 아니었따는 점이다(삿19-21장). 따라서 여호수아에 묘사된 이러한 모습은 후대의 편집자가 신학적 의도 아래 수정 내지 첨가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성서의 사사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 종교가 섞여 있으며, 여러 제사장 계열들이 각기 다른 성고에서 제단을 쌓고 있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