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2-20 20:20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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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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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어떻게 다른가?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성경이 이 두 언어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이다. [구약 중 다니엘서와 에스라 일부만 아람어다]


히브리어는 산문보다 에 적합한 말로서 (헬라어는 시보다 산문에 적합하다) 구약의 문체는 산문과 시문이 반반 정도인데 산문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한 면이 드러나고 특히 긴 문장이 되면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반면에 일단 시문에 들어서면 그 문장은 간결하고 박력이 있어 가슴속 깊은 감회를 비할데 없는 운률로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언이나 탄원 애원 등은 이러한 시의 경지에서 되는 것으로 그 표현은 간결한 시문이 가장 적합한 것이다. 글자는 자음 22자인데 상형문자로 된 것이며 한문처럼 바른 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간다. 모음은 부호를 부쳐 표시한 것으로 후에 된 것이다.


그 특징으로는, 어법이 회화적이어서 한국말처럼 “새빨간 거짓말” “속이 컴컴하다. 등 헬라어처럼 관념적이 아니라 직관적 사실적으로 사물을 표시한다. 예를 들면, 히브리말에는[종교] 와 갈은 말이 없고 [임마누엘] 즉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요 [죄]란 목표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동사에는 시제가 없다. 곧 Tense가 없다. 그 대신 “상태”라는 것이 있다. 언제,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보다도 행위 자체가 완료했는가, 미완료했는가 하는 상태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완료형과 미 완료형이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행위의 완료를 나타내는 것은 완료 상태이고 그 반대는 미완료상태이다.


히브리어의 특색은[ 때] 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행위와 사물을 중심으로 사물을 보아 나가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조상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었다. 낮에는 낙타를 타고 가다가 뜨거운 모래의 열기를 피하여 나무 그늘에 쉬는 저들에게는 분초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붉은 석양이 서편에 드리우고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쳐갈 때 그들은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배경으로 발생하여 발달한 언어이므로 시제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예언서를 읽어보면 미래에 관한 예언 같은 것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결국 상상의 세계가 현실로 되는 일종의 에니메이션이다. 거의 모든 히브리어의 어근은 물건을 가지고 하는 동작을 표시하거나 목적물을 표시한다.


Gazer 결정한다. (자른다.) [히브리어를 입력할 수 없으므로 영어로 표기함]

Amen 참되다. (단단히 세워 놓는다)

yashar 옳다. (곧게 하다)

kahedh 높인다.( 무겁게 한다)


인류의 수많은 말 중에서 성서를 기록하는데 이 말이 뽑인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히브리어는 선택받은 말이라고 생각할 점이 많은 말이다.


다음은 백운대  침례교회 김 선기 목사님의 오래전에 쓰신 글을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는 세계에서 가장 정서적인 언어이다. 나는 이 히브리어를 가장 소박하며 또 가장 순진하고도 순수한 언어라고 즐겨 말한다. 또 이스라엘에서 연구하고 오신 어느 교수님 한 분이 유대인을 가리켜 선인장 같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선인장에는 가시가 있다. 그러나 선인장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와 같아서 처음에는 냉정하고 무뚝뚝하며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지만 일단 사귀고 나면 끝까지 도와준다는 것이다.


나는 히브리어가 꼭 그렇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렵고 뚝뚝하여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언어같이 보인다. 도대체 나와는 영원히 인연이 맺어질 것 같지 않아서 쉽게 정이 가지 않는 언어이다. 심지어 글씨를 쓰는 순서까지 우리말이나 영어와는 정반대이다. 내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강의한 것이 벌써 헬라어는 50여 회, 히브리어는 3O여 회가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처음 1O 회 정도 강의할 때까지도 솔직히 정이 들지 않았다. 헬라어의 그 사근사근하고 감칠 맛 나는 것에 비하여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무뚝뚝하여 정이 붙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2O 회, 3O 회 계속할수록 이 무뚝뚝한 언어가 나를 꽉 사로잡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깊이가 있어 매료된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오히려 장엄하고 웅장하게 느껴진다.


이에 비하여 헬라어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언어이다. 가장 조직적이고 논리적이며 또 실용적이고도 기교적인 언어이다. 이것은 가슴을 저며 오는 바이올린의 미묘하고도 예리한 선율 같다고나 할까?


헬라어의 단어 하나가 1O 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면 영어나 우리말로는 기껏해야 2, 3개 정도의 뜻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나는 헬라어를 5O여 회 강의했지만 아직도 강의할 때마다 그 새로움에 감탄을 금 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풍성하고도 놀라운 사랑이 이 정확한 헬라어로 표현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어찌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자주 헬라어는 예수님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까지도 기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는 그토록 정밀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주신 것은 확실히 놀라운 축복이며 은총이다.


원어 연구는 성경 연구에 필수이다.


번역된 우리의 성경으로도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구원을 얻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성경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원어의 연구가 절대로 필요하다. 번역된 성경으로 연구하는 것은 마치 낱말의 뜻을 정확히 모르면서 어떤 문장을 잘 해석하려는 것과도 같다. 물론 단어 하나, 하나를 모른다 하더라도 문맥에 의해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의 뜻으로 오해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예들을 보자.


믿는 도리 (호몰로기아) (헬라어를 입력할 줄 몰라서 한글로 표기함)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 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히 4:14 )


여기에서 ‘믿는 도리’가 무엇인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믿는 도리란 십자가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랑인가? 주일을 성수하는 것인가?


이 말을 원문에서 찾아보면, ‘호몰로기아’로 되어있다. 이 말은 “같은”을 의미하는‘호모이오스’ 와 “말하다”를 의미하는‘ 레고’의 결합으로부터 왔다. “…같은 것을 말하다…” 곧 “하나님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동의하는 것…” 즉 신앙고백이 라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다 는 말은 신앙 고백을 끊임없이 계속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다 (힐라스모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단지 긍휼을 나타내는 윤리적인 ‘용어 그 이상의 것이다. 즉 이 말은 속죄제물을 나타내는 ‘힐라스모스’ 와 같은 어원을 가진 ‘힐라스코마이’ 에서 온 것으로써,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축복하실 수 있도록 속죄제물 곧 구세주를 보내달라는 내용인 것이다. 유대교의 사명은 바로 이 구세주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있는 것이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에 비하여 이 멸시 받고 수치스럽게 여겼던 세리가 유대교의 핵심을 찌르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과 동행 한다 (힐 할 레 크’)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무슨뜻인가?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간다는 말일까? 이 말은 히브리어로 ‘힐 할 헤 크’ 로 되어 있다. 이것은 걷는다는 뜻의 ‘할라크’ 의 강조 사역형으로 자기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예속시켜 뒤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에녹이 육십 오세에 아들을 낳았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 임하셨다. 이 아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 라고 지었다.(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홍수로 심판이 있었다).


이 계시를 받은 후 에녹의 생애가 완전히 변했다. 그 전의 그의 생애가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완전히 변하여 그는 자신의 뜻을 꺾어 버리고 남은 생애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 그 분에게 순종하며 경건하게 살아  갔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인 것이다. 성경에서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구세로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이것은 심판을 하루라도 더 연기하시고 모든 사람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시험한다( 페이라조}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 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아 그 결과로 고난을 당하신 것으로 해석하기 쉽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는가? ‘시험한다’는 헬라어에 ‘도키마조’ 와 페이라조가 있다. ‘도키마조’는 인정하기 위해서 시험을 본다는 뜻이다. 자격시험을 보는 것이나 면허시험을 보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페이라조’는 시험 받는 자 속에 선과 악, 무엇이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시는 경우에 쓰일 때가 있다. 아브라함을 시험한 경우에 이 단어를 썼다. 그러나 이 단어는 대부분 마귀의 시험, 유혹 등을 말할 때 쓰인다. 이 구절에서 시험은 ‘페이라조’를 썼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고난을 받으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해괴한 말이 된다. 여기서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말한다.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의 모든 권세를 무효로 만드시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평생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고,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죽음을 맛보신 그 분의 사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을 풀어서 해석해 보면 그 분 자신 이 십자가의 사명을 지실 때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므로,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에 도전해 오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며 고통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달려오셔서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만지지 말라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곧 너회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6-1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어떤 이들은 해석하기를 부활하신 거룩한 예수님의 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더러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금 하셨다고 말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해석이다. 그러면 조금 뒤에 26절부터 의심 많던 도마에게는 왜 손 뿐만 아니라 옆구리까지 만져 보라고 하셨는가? 이 부분은 원문으로, ‘메무-하 프투’로 되어있다. 동사 ‘히프토’ 는 중간 태로 쓰여 ‘하프토마이’가 되면 “~에 달라붙다, ~에 찰싹 매달리다”의 뜻이 된다. 제자들마저 집으로 다 돌아간 후에도 무덤가에 홀로 앉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떠날 수 없었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무나 기쁘고 반가 왔다.


마치 다시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우는 어린 아기처럼 꽉 매달리는 마리아에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분이 가셔야만 성령을 보내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를 이 땅에 붙잡아 두려고 애쓰지 말라고 마리아를 권고하시려 달래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러 구절들을 찾아보면 굳이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짐작으로 해석하기 쉬운가? 이제는 우리도 성경을 원문으로 정확하게 연구할 때가 되었다.


성경 원어


소위 선인들에게만 가능한 것인가?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할찌라도 문제는 과연 이 원어를 내가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모든 좋은 점이 있어도 내가할 수 없다면 나와 원어는 영원히 인연이 없는 그림의 떡이 아닌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어에 대해 공포감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원어의 필요성을 알지만 원어는 선택받은 몇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요, 나와는 상관이 아주 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히브리어는 과연 어려운 것인가?


나는 세계에서 제일 쉬운 언어가 히브리어요, 그 다음이 헬라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소수의 몇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골동품 같은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겠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실 리가 있겠는가?


나는 원어의 연구가 아주 쉽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영어공부에 들인 노력의 백분의 일만 하여도 원어로 성경을 불수 있다고 주창 한다. 지금까지는 원어를 무조건 암기하는 방법으로 공부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원어 공부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헬라어는 기본 동사 하나의 변화만 해도 약800 개나 된다. 그러니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무조건 암기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꼭 수학과 같이 정확하다 그래서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마치 실타래가 풀어지듯 쉽게 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한다면, 성지 순례보다 더 벅찬 감격, 거대한 황금의 산맥인 원어 성경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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