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1-20 10:11
성령세례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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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166  
성령세례의 증거

오순절운동과 성령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후에 방언을 표지(Sign)로 하여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믿는다. 이 주장은 19세기 성결운동 (Holiness Movement)과 그 신학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성결운동의 요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서 안되며, 윤리적으로 성결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R. A 토레이(Torrey)박사의 『성령론』은 성결운동의 성령론을 대표하는 책이다. R.A.토레이의 성령론은 3단계 성령론이다. ① 성령의 제 1차적인 역사는 중생사역으로 성령은 불신자에게 감화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여 죄 씻음을 받게 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외적인 역사로 제1의 축복이다. ② 성령의 제 2차적인 역사는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는 놀라운 체험과 함께 오며, 성결의 축복을 받는다.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속에는 성령이 내주한다. 제 2의 축복으로 신자들은 성령의 사람이 된다. ③ 성령의 제 3차적인 역사는 은사의 체험이다. 성도들은 제 3차 축복을 받을 때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하나님께서 위임하시는 사명을 이 땅에서 수행할 수 있다.

R.A. 토레이의 성령론에 따르면 성도들은 다같은 축복의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① 단순히 중생하여 죄 용서만 받은 성도들, ② 성령세례를 받아 성결의 축복까지 받은 성도들, 그리고 ③ 성령의 은사까지 받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로 구분되고 차별된다. 성도들은 언제나 더 큰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여야 하며, 제 3의 복을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효시가 된 미국 캔사스 주 토페카시에 소재한 성경학교에서 일어난 방언 운동은 바로 19세기의 성결운동의 맥락에서 일어났다. 파함(Charles Parham)목사는 감리교 목사였으나 성결운동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는 신앙체험을 부흥시키려는 목적으로 토페카시에 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파함 목사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들은 사도행전을 읽고 토론하던 중에 성령 세례를 받을 때마다 방언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사마리아의 성령 받는 사건에서만 방언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때에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았다고 암시하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방언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학생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합심하여 방언과 함께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에 1901년 1월 1일 새벽에 오즈만(Agnes N. Ozman)이라는 여학생이 방언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현대 오순절 운동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체험과 함께 방언을 받은 후에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믿었다. 그들은 성결운동의 맥락에서 자기들의 경험을 해석하였다. ① 방언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으며,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았다고 믿었다. ②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체험과 함께 새로운 신앙의 단계를 체험했으며, 이것은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세례로 방언을 그 표지로 하여 받는 것이다. ③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표지로 하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경험을 기초로 하여 성경을 재해석한 것이다. 그들은 경험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방언체험이라는 놀라운 경험이 먼저 있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이러한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성경해석 방법의 하나로 받아 들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성경을 순수하게 연구하면서, 즉 우리의 경험적 사실을 비우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우리의 경험을 그 말씀에 의해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말씀의 종이요, 말씀에 의하여 새로 태어나고, 말씀에 의하여 거룩하여 지는 말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순절 교단의 2단계 성령이해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데가 많이 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을 "믿는자가 받을 성령"이라고(요7:39)말씀한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하고 말씀하신다(요14:16). 이 말씀은 포괄적인 말씀이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다른 이들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한다. 이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을 받아 성령이 자기 속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나눌 수 없게 만든다.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정 3:16).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전 같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따라 거룩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을 일 삼고 있다고 책망한다(고전 3:1-3).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성령의 전이라는 말씀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다. 고린�전서 6장 19절은 더욱 분명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몸에 그리스도의 성령이 흐르고 있으며 그러므로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요2:21)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에게도 그 몸에 거하는 성령이 계시지 않겠는가? 몸의 지체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몸에만 피가 흐르고 몸의 지체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가 흐르지 않는 지체는 죽은 지체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계신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며,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단호하게 선언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전 12:13).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모든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이다.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을 마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모두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어떤 증거들이 우리에게 있을까? 성령이 오시면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령이 성도들에게 오신 증거들이 있을까? 바람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바람이 불 때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알 수 있듯이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성령 받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첫째로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죄를 책망하신다(요16:8).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누구에게든지 임하면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간혹 정욕을 따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으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여 통회하게 하고 죄를 뉘우치게 하신다. 만일 당신이 지금 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다면 당신의 양심은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고서 얼굴이 붉어지며, 남 보기가 부끄럽고, 양심에 찔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즐거워하라. 성령께서 이미 당신 안에 오셔서 당신의 죄를 책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죄를 책망받을 때에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성령께서 오신 두 번째 증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이다(요16:9). 간혹 인간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성령이 오시지 않아도 깨우침 받을 수 있다. 공자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지만 하루에 세번 반성하며 죄를 뉘우쳤다고 한다. 세조대왕은 성령을 받지 않았으나 말년에 조카 단종을 죽인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그에게 오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지식인도, 종교인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깨달을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한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예수님께 더 헌신하고 더 충성하여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 마음이 성령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마음이요, 당신은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요, 나를 위해 흘리시는 예수님의 보혈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구원의 능력임을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는 저주의 십자가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어떻게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오직 성령의 사람만이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거듭하여 가르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느니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8, 10,13).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은 오직 성령으로만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책망하며(마16:22),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반대하며(막14:46-48), 도망가며(막14:50), 슬퍼하여 울며(눅23:26-29), 비웃었다(눅23:35-37). 그러나 성령께서 강림하여 120명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을 때에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행2:1-39).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깨닫는 것이다.

4)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전12:3).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 때문에 혼란한 교회였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라고 꼬집고, 방언을 못하는 신자들은 자기들이 정말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지 방언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열광주의자들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정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 3장을 성령과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설명하는데에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부분을 시작하면서 누가 성령받은 사람인가를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고린도교회의 전통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하는 고백을 하여야 세례를 베푼다. 그러므로 세례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가 된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증거로하여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느냐에 있다. 당신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다.

5)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1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6-7).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증거요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6) 성령의 또 하나의 증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네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없는 자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안디옥의 폴리캅 감독처럼 "80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 주님이 나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느냐?"고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확신있게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러면 당신은 이미 당신 안에 성령께서 오셨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7)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어디서 오는가? 그리스도의 교역을 하고자 하는 열망과 소명이 어디서 오는가?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베풀 때에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가운동, 하나님의 선교, 진정한 증인 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방법을 연구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선교대학을 다녔는가? 전도학 강의를 들었는가? 그러나 그들이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되지 않았는가? 그 비밀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도는 성령의 증거이다. 증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께서 일으키신다.

성령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요16:14).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며 그분을 증거하며 그분께 헌신하여 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분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분의 형상을 닮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 자체가 결국 성령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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