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3 11:19
[4]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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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430  

장사되신 그리스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반드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도신경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채 바로 부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주님의 장사되심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이것을 언급하는데, 복음서 기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 빠뜨린 사항을 추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만이 무덤을 제공한 요셉이 부자였다고 말한다. 또 마가 혼자만이 그가 존귀한 공회원 이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에 대해서는 서신서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항목에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포함시켰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다.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죽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줌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들이 죽을 때, 자기 몸이 땅에 묻히든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든 상관없다고 경솔히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체를 중시하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당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 도르가의 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씻어져 장사되기 위해 다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은 몸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시체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내에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화장 제도가 없어지고 매장 제도가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 세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장사되었던 방식대로 장사되기를 바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나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장사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몸이든지 분해된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사람도 납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 넣어져 흙에 묻힌 사람과 똑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부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몸소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기 몸에 짊어진 일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치워졌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죄는 심판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이라고 했다. 여기서 죄를 "지고가는"이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 예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었다. 레 16:22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 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분명히 그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극적인 형태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만드셨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는 묵묵히 죄를 "지고가는"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며 그의 장사되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죄에 대한 마지막 처분은 그의 장사되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에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 무덤에까지 들어가셨다. 그리고 죄의 짐과 전혀 상관없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이다.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의 생명과 존재를 규명하지 않듯이 무덤에서 성취된 죄에 대한 처분도 규명할 수 없다.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양상이었던 장사되심 속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죄의 심판에 대한 처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죤 번연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번연은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결국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 짐은 그의 죄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위해 거기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눈에 고이게 된다. "복되도다, 십자가여"라고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이여 다 복되시도다"라고 소리친다. 그 후에 그는 자기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그 짐은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 빈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다시는 그가 그 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나타내 주는 다음과 같은 합창을 하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 
장사되셔서 내 죄를 씻으신 주님.
-월버 챔프맨의 "어느날"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셨을까?
 
 사도신경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실제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믿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옥(hell)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이 처음 영어로 번역될 때 의미했던 그 의미가 아니다.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또는 "덮여진" 장소 라는 뜻의 앵글펄 색슨어인 "Hella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는 악인들이 형벌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그 뜻이 죄인이 사후에 가서 영원히 거하는 비탄의 장소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 (hell)은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셨는가? 분명한 것은 명확한 사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 2:24-31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한 첫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 로되...내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기서 베드로는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가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시편에서 인용된 이 말씀의 의미는 시편 본문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두 세 개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과연 음부에 내려 가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장소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못 박히시던 근처에 있는 동산 안의 새로 만든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면 그의 영은 어디로 가셨는가?
 
 주님께서는 친히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다.
 
 그 낙원이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그것을 하늘로 믿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다시 두번 사용되는데, 각기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고 한다(계 2:7;계 22:2). 이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은 죽으실 때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용된 본문이 원래 뜻하는 바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 대로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는 신약의 "낙원"(Paradise)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산"(garden)이나 "숲"(grove)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에덴 동산이 하나의 낙원이었다(창 2:8 참고;느 2:8:전 2:5;아 4:13).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복되게 죽은 자들의 장소를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간 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3일 동안을 어디에서 보내셨는가 하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가 머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음부에 갔었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육체적, 영적 모든 면에서 죽음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그대로 지닌 채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인성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셨으며 또한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셨으며 몸이 장사되어졌으며 그의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셨다.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신 사실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른 인간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웨스트코트(B.F.Westc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그 사실은(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교리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게 해준다.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의 몸은 무덤에 놓였고 그의 영혼은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리라 생각되는 그 나라로 들어가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다 겪으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가 계셨던 곳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의 상태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거처에 계시게 되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맛보셨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러나 인격적으로나 경험하신 바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으며, 죽음이 그를 매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활, 승천하셨다.
 
 여러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부활하신 구주께서 복되게 죽은 자를 음부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셨다(엡 4:8;히 11:40;히 12:18, 23을 보라). 만약 그렇다면 음부는 복되게 죽은 자들의 거처는 아닌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악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음부가 지옥이 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죽을 때에 즉시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결코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올라간다"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천국에서의 재연합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빌 1:23).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런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사도신경의 위대한 기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사도신경 기사는 구세주가 고난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도신경보다 훨씬 후에 생겨난 여러 신조들과 신앙 고백문들은 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더 길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39개 조항의 신앙 고백 중 제2조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과 뼈와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구비한 신체를 다시 취하셨다."
 
 이 조항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진정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둘째는 몸이 다시 부활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는 부활한 몸의 변화이다.
 
 여기에 피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소생이 아니라 진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나 다른 어떤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브룬너 (E.Brunner)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은 부활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 "또 프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은 "신약 성경 전체가 부활 사건을 감안하여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지만 어떤 학자도 이것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살펴볼 때 매우 정확하다. 고전 15:3, 4절고전 15:3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쓴 후에 이어서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라고 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도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재확인한다. 분명한 증거가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활을 믿는 확실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가보라. 기독교 변증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을 꽃아 놓은 서가에서 부활 신앙에 대해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들 중에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이 그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참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의 진실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빈무덤과 시체가 사라진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시체를 도둑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시체를 도둑맞았다면 누구의 짓인가? 그의 대적자들인가? 그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사도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왜 그 시체를 내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그것을 가져갔는가? 그럴 수 없다. 시체가 있던 무덤은 육중한 돌로 박혀 있었으며, 인봉되었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가 분명한 비진리의 메시지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실상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여인들도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싫어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부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음은 불신자들까지도 인정했다. 분명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훔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불신앙적인 비판자조차 빈무덤과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이러한 침묵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부활 증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회개가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초대 교회의 그 오만한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철저히 대적했었다. 그러나 그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그는 자기의 회심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부활 사건의 요점을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들은 바를 아그립바 왕에게 증거하면서,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다(행 26:25, 2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부활의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서의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의 나타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설명해 준다. 제임스 데니(Jamas Denny) 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복음서 기자가 쓴 부활 기사는 우리가 취급해야 할 많은 중요한 증거들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범위(복음서-역자주) 밖에 놓여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서 자체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다 확고한 역사적 증거는 이렇다. 부활은 믿어졌고, 전파되었고, 퍼져나갔으며, 또한 그 열매를 맺어 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를 무시하 려는 것이거나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과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복음서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약의 어느 성경도 기록되기 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며 대단히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이다. 이것 또한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th Thomas)는 <기독교와 그리스도>(Christianity is Christ)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여러 가지 증거들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확고한 내용이며, 함께 모아보면 그 주장은 중복적이고 충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비판의 망치가 두들겨도 하나의 파편도 내지 못했던 반석인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부활을 지지해 주는 이런 압도적인 증거를 논박하는 일에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주로 기적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불신앙을 변호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같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옹호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를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인 유월절(Passover)과 승천하신 때인 오순절(Pentecost) 사이에는 50일의 간격이 있다(현대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오순절 대신에 부활절<Easter>과 성령 강림절<Whitsun. Whitsunday>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행 1:3행 1:3)라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후, 즉 오순절 며칠 전에 승천하셨다고 결론내린다.
 
 주님께서 왜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는가? 적어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40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주로 "시련"이나 "시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한 예로는 출 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생활 40년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 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40일과 그 기간이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수 많은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이 그의 존재 양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십자가 지실 것을 예상하시면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슬픔 등과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가하셨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하몬드(Canon T.C.Hammon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새로운 실존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비하의 상황하에 있었던 자신을 완전히 탈피하지 아니하시고, 오류없이 실재적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필연적 관계를 재개하셨다. 이와 같은 부활이후 그리스도의 "현현"하심은 "많은 증거"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를 응하시는 사락과 고귀한 겸손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셨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서 감람산이라는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베다니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담소하신 후에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들리우셨다. 누가는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고 기록했다. 그들이 자세히 구름을 쳐다볼 때, 횐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행 1:10, 11).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기록은 놀랄만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수식도 덧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을 확신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바만을 말하고 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오직 부활의 결과, 즉 부활 하여 살아계신 주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천에 있어 서는 그 결과가 아니라 승천 그 자체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승천하셨다"(히 4:14). 둘째, 그는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 (히 9:24).

 

첫째 구절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 밖에"나 "저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궤변하는 자들의 반대는 헛된 것이다. 성경은 불가피하게 천국을 "위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땅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 즉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이 존재함을 보증해 준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곳"(왕상 8:43)으로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늘은 관념이나 꿈, 혹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이며, 지금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승천하셨으며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다(히 9:14). 바울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임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말한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다른 사실, 즉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 처럼 승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도 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승천의 중요성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역시 그리스도 승천의 중요성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중요한 한 부분인 히브리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ith Thomas)는 그것을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 주님께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승천하심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제사장 직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입장이 승천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승천에 대하여 적어도 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확실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참고 ; 요 1:51;요 3:13;요 13:3;요 17:11;요 20:17).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그 말씀을 이해 했으며 그래서 승천이 진정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며 글을 쓴 것이다.
 
 승천은 몇 가지의 뚜렷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 첫째,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의 원인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 14:28)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였다. 누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던 때(승천시)에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눅 24:52)고 했다.
 
 승천은 또한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 제자들로 하여금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널리 부르던 찬송가는 아마도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딤후 2:12) 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와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의 회복인 승천과의 관계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촉구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히 4:14) 때문이라고 했다.
 
 승천을 떼어놓고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설교를 부활로 시작하여 승천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 33).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 두 사건은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승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주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디에 계실 것인가? 또한 무엇을하고 계실 것인가?
 
 만약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그의 처소는 어느 한 지방에 제한받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예루살렘,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하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마 18:20).
 
 만일 승천하지 않았다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과 성명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신 이는 승천하신 주님이셨다(행 2:32, 33;엡 4:5-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땅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는 했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히 8:4). 그가 참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다(히 9:24).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땅 위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하늘의 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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