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3 11:18
[3]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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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88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노예나 흉악범을 죽이던 로마의 처형법이다. 그것이 너무 수치스런 형벌이기에 예수님을 일개 선지자로 간구하는 모슬렘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기를 거절한다. 그 대신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인물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탈무드는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또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이 제도가 너무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선언가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상상만하여도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경대로"(고전 15:3) 죽으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죽음 사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도 구약 성경에 의해서, 또 주님 자신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하고 채찍에 맞게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 전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 역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분명히 예언한 것이다(마 16:21, 24).
 
 시 22:16도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이 구절들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시편 기록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기사 이외에도 구약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모형(type) 혹은 예표라고 불리운다.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보다. 그들이 제사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죽는데 사용될 나뭇짐을 지고 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못박히실 십자가를 지고 가심을 예시해 준다(창 22:6).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 기사에서도 암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고 제사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라. 나중에 요한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사실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요 19:36).
 
 또 다른 모형은 놋뱀 사건에서도 보여진다. 불뱀이 나타나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자,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고 낫게 되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이 언급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요 3:14 참고, 민 21:49).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굴한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의 형벌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로마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최고의 고통과 최대의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시려 선택했던 죽음의 방법-십자가의 죽음-이었다(빌 2:8).
 
 신 21:23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생각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 저주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신 27:26;갈 3:10, 13). 둘째,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이다. 셋째,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 가지의 핵심적인 신학적 교훈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소한 다른 두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첫째,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즉 "내가 목마르다"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잘 감당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평가해 주는 영구불변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는 높이 들리워야 했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5).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단순한 말 속에 내포된 영생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했다.

 
 그리스도 죽음의 영향력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언어 생활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토론할 때에 우리는 결정적인(crucial)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crux(십자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중심이듯이, 토론의 중심되는 문제를 "결정적"(crucial)인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Cross)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의 중심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는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어린 예수가 달려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그 달려가는 모습에 의해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긴다. 흘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 준다. 그가 팔을 뻗을 때에 그 몸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앞으로 자기가 죽을 줄을 완전히 알고서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을 연구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온전한 순종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의 행위로 간주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에게 검을 빼어들고 대항하자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요 18:11 참고;마 26:39;요 12:27, 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셨으므로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신 분이시다. 땅의 기초도 놓이기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바울은 장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참고, 요 10:17,18; 요 17:1;요 19:30;눅 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종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노예의 순종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죽기 위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분의 자발적 순종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시간(time)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적어도 세 구절에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 1:20)라고 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 9:26) 시간 속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시간 가운데 최고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그의 죽음은 영원까지, 즉 시간이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때까지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끝이 나고 밤과 낮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며(계 22:3) 어린 양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주(universe)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미한 지구라는 조그마한 항성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로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 20)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 11)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는 그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진리는 여러 서신에서와 요한계시록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만한 때에 그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은 장차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천국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으시고 또 그 죽음으로 미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계 20:11-15;계 21:1-8 계 19:30;계 22:3).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성부와 사단의 역할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재판관의 오판이나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처럼 그것을 엄청난 실수로 여기시지 않으시는가?
 
 원칙적으로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 중의 일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으로 엄청난 실수이며 재판관의 오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 3:17)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설교 중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던 계획의 성취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미래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셨던 것이다. 사건들이 아무리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후에 인간을 꼭두각시로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하나님은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거나 못된 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시거나 그것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선한 마음을 불어 넣으셨다(출 12:31-3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을 향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은 바로에게 왕권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잔인한 마음을 허락하셨다(출 14:1-9). 이처럼 각 사람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같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사각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의 양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
 
 분명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나 오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9-21).

 
 이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 및 그의 대속적 죽음을 밝히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그가 계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아버지와 동등하시나 그와 구분되신 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없었고, 그 입에는 거짓된 말이 없었으며, 언제 한번 그릇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우리처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와 완전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실 충만한 근거를 만들어 드렸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또는 우리 죄를 간과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을 요구하시는데 그리스도는 그 형 벌을 완전히 치르셨다.
 
 우리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는 위의 설명과 같은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시행자인 동시에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던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왜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는가?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로 말미 암아 우리를 살피려 하심"(요일 4:9)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기 위함"(요일 4:10)과 또한 "세상의 구주가 되기 위해"(요일 4:14)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다.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 아들이 죽지 않고는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 보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아 죽으실 때, 하나님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획했으며, 그 계획의 목표는 우리의 구원이었다. 요한이 말한 대로 아버지는 세상의 구주가 되시도록 아들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에서 사단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사단이 어떤 책임을 지니고 있는가? 그는 그 죽음을 기뻐했는가?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주어실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성공하셨는가? 성공하셨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마귀를 멸하셨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4, 15).

 
 우리를 거스리는 권세는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망으로 말미 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히 2:14)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의 패배이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패배당하였으며, 그의 능력은 파괴되고 있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묶어 불못으로 던져 넣으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패배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아셨으며, 사단도 또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사실은 사단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그에게 극심한 적대 행위를 한 것과 예수님의 죽으실 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증오로 광분 하는 모습이 더 분명해지는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사단은 십자가를 지러가는 예수님의 길을 바꿀 수 없게 됨을 알자, 그 길을 대단히 고통스럽게 하고, 죽음의 고난을 더욱 쓰라리게 하려 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사단이 배신자 가룟 유다를 충동질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노심을 선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다음과 같이 사단과 죄에 대한 승리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흑암의 왕자,우린 그를 두려워 않네. 그의 진노도 능히 견디네. 
자, 그에게는 진노만 있나니, 이 한 마디 그에게 있을 뿐이네. "전능하신 방패는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성경은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적어도 여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화목(propitiation)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요일 2:2) 라고 했다.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바울도 그 단어를 사용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3-25).
 
 이러한 화목이라는 단어는 화해(reconciliation), 속죄(expiation), 변상(satisfaction) 및 보상(atonement) 등과 같은 부류의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는 사전적인 뜻이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된 바로 그 용법이다. 신학자들은 때때로 이 단어를 하나님 편에서 본 주님의 죽음의 양상이라 설명했다. 화목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및 공의로우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일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하나님은 아무런 장애없이 그의 원하시는 바를-죄인을 구원 함-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조금도 타협치 않으신다.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도록 하는 의로운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못본 척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충분한 형벌을 요구하셨고, 또 그것은 십자가에서 충분히 지불되었다. 화목을 이루어 오신 하나님은 지금 이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죄인들을 용서 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많은 인간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죽음이란 방법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화목케 하시며 인간은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데에는 또 다른 다섯 개의 단어가 사용된다. 그것은 희생(sacrifice), 제물(offering). 대속물(ransom), 구속(redemption), 화해(reconciliation) 등이다. 마지막 단어 화해는 "관계의 변화", '서먹서먹함의 마무리" 및 "우정의 회복"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의어로는 "재연합"(reunion), 또는 "조화"(harmony) 등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 죽음과 관계된 설명들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개념을 가져다 줄 뿐이지 거기에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누가 누구에게 화해되는가? 화해(화목과 마찬가지로)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이러한 표현은 화목되어지는 대상이 하나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 19).

 
 그렇다면 사전적인 이해는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화목되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화목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올 성경 말씀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라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19-22).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교제의 장애물을 제거하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화목케 하셨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화목을 받아들이시려고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실 계획을 세울 뿐 아니라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 역사상의 한 사건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그 이상의 영원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거룩하신 적대감을 타협하지 않고도 죄많은 백성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타협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의롭게 여기다(justify), 또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였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6).
 
 칭의란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칭의 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또는 인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받을 만한 가치"라는 구절을 제외하고는 잘못된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구원받을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된 그리스도의 가치와 밀접히 연관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 하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칭의가 가치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전적 설명의 마지막 부분, 즉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이란 말은 아주 훌륭한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여기에서는 "되어지는"(made)이라는 단어를 강조 하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다(makes).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지은 일이 없었던 사람으로 간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로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나로서(what I am) 아심을 뜻하며,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미래에 무엇을 할 것 인가를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양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신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의 공식적인 자격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죄를 범했으며 다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롬 3:26)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어떻게 의롭게 하시는가? 이 문제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 욥의 한 친구도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 25:4). 욥의 친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했다(롬 3:26). 첫째,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칭 의의 의로운 기초를 이루어 놓으셨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게 하시는 모든 자들에게서 분명한 반응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만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은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있어서 그것은 실로 값비싼 것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성육신과 뒤 이은 그의 독생자의 죽음을 요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단히 방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누구도 그 깊이를 측량치 못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 보면 몇 가지 분명한 사상이 드러난다. 첫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증거해 준다. 둘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정성을 입증해 준다. 개인적으로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죽으셨던 것이다. 셋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지않게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용납해 준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빛을 면제시켜 준다면 그는 그 빛의 액수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때에 모욕이나 허풍 떠는 것을 용납한다면 다른 경우에도 그 무례함을 용납해주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용서는 자신의 희생을 치르고 잘못된 행동을 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무죄한 사람이 고통 당하는 이 원리가 구속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용서의 행위는 진정 속죄의 행위임이 강하게 역설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속죄의 필요성을 없이 하지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밝혀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해주며 그것을 꼭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용서는 정의의 원리를 가장 먼저 충족시키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용서 하심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용서의 근거가 된다는 이러한 주장은 신약 성경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분명한 것이다. 회개가 과거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는 없으며 다만 미래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또한 구원으로 시작되지 않 는 종교는 교육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성숙에 관해서 뿐 아니라 죄로 인한 부패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또 그것을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값싸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엔 적어도 두 가지가 요구된다. 죄인은 심판대에 서야 하며, 그 죄인의 자리에 적합한 대리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보리 산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리자로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졌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과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기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근거가 된다. 적어도 두 개의 성경 구절이 이 주제와 연관되어 진다.
 첫째,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 거하도록 받아주셨다고 했다(KJV 참조), 필립(J.B.Phillips)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환대하셨다" 라고 번역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환대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이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말씀을 생각하고 이 서신을 썼음이 분명하다.
 
 또한 받아들이심은 관계를 기초로 한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자 안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의 연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관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용서받지 못할 자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멀리 떠나"-하나님께로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골 1:21). 이사야도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떼어놓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모든 특권도 얻게 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그 안에"라는 말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보라.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특전을 헤아려 보라.
 
 두번째 구절은 롬 8:33, 34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의 완전성을 이 구절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편이시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고소하겠는가? 하나님은 아니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보다 더 큰 자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지금 "사랑하시는 자"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는가?
 첫째 자세는 믿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자들조차도 그의 죽음 사실을 믿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장사지내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간 믿음이란 그가 죽으신 목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누구든지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자세는 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아무리 어두운 길이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경험, 아무리 깊은 고뇌, 혹은 아무리 강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번째 자세는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바울은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반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보잘 것 없으며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체하며 그를 섬기는 일에 무관심한 경우 많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특권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나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는 우리도 모든 특권을 필요하다면 희생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자진해서 인간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순종하고 있는가?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다소의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필요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이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시선을 돌리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남을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인 우리는 기꺼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빌 2: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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