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3 11:15
[2]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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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433  

제3장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구원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뒤따르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대표로서 죽음을 당하셨다. 성경은 이와 같은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 되었는 바 사도신경 역시 이를 반영하여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상대적으로 길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앞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Lord)되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사도신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의 심오함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간결한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내용을 80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성부에 대해 9단어, 성령에 대하여 3단어, 성자에 대해서는 68단어이다. 어느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계시의 중심이며...기독교의 초점(Focus)과 충만(Fullness)이며...다른 모든 사실과 진리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진정한 사실(Fact)이며 진리 (Truth)"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7가지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위대한 진리를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수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그의 중보 사역은 승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내재된 의미를 해설하지 않고 그저 사실들만 기술할 뿐이다.


 사도신경의 사실 진술에 나타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 및 성도와의 관계의 표현인 "그 외아들 우리 주..."에 대해 살펴보자. 둘째는 성육신, 즉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대해서, 셋째는 그의 고난과 죽음, 즉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이 3일 동안 보내심을 받은 장소에 대해서, 다섯째는 부활에 대한 선포,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에 대해서, 여섯째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지위의 회복, 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일곱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심, 즉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고난과 영광이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어지는 고난 가운데 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때가 되면 자기를 거부한 제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영광된 모습을 취하실 것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은 부각시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가 본래 누구인가를, 즉 하나님의 죄없으신 아들이심을 말해준다. 이 사실에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신 삶의 성격과 죽음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거룩하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인간과 같이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대속(찬립)의 필요성, 즉 당신과 나를 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런 필요성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다같이 유일신교이며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구주되심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이신 분이다.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증거하는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다.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자신의 죄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그의 제자들은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참고, 사 53:9)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 5:21)라고 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지닌 유일성을 입증하는 도덕적 기적(moral miracle)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무죄성을 지닌 존재는 자신에 대하여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라 주장한 그리스도는 바로 무죄한 하나님이셨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못한 거짓말장이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주장이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할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요구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데려가서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참고;요 5:17,18; 요 10:30-33)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죽었으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소멸치 못했음은 부활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셋째, 초인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도, 바람을 다스릴 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를 비판하던 어떤 자들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목격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었다(요 11:44).


 넷째,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예배를 받아들이셨다. 만약 그가 단지 인간이었다면 그에게 예배한 자들에 대한 그의 승인은 죄악이었을 것이다(요 9:38).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간인 동시에 초인간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이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한다. 서신서에서는 인사와 축도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엡 1:2) 은혜와 평강이 그의 독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했다. 그 다음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의 직함이다. "구세주" (Savior)라는 뜻을 가진 "예수"란 이름은 그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를 가르쳐 주며,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도"란 직함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말해준다. 즉 그리스도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천사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사도신경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그 이름은 역사적 사건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터무니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분이심을 보여 준다. 둘째,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의 선교 사역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여호수아'란 이름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Messiah)에 해당되는 헬라어이며 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예식상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직임에 취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언젠가는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직임을 겸할 어떤 이가 오리라는 소망이 싹텄다.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 불리워진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급히 찾아가서 "우리다 메시야를 만났다"(요 1:41)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고백이었다. 이제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날에 동의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절대 과장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한 옛 모든 예언의 완전한 성취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시며(신 18:15;행 7:37), 아론보다 큰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보좌에 앉으신 왕이시다.


 이상이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내포되어 있는 주요 내용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어느 바리새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2)라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답변해야 할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천명한다. 즉 예수의 질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이고 이에 대한 사도신경의 대답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첫번째 조항은 이 부분에 나오는 성자에 대한 조항의 예비적인 성격을 띠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필연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그 아들이 있어야 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예수께서는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이 말을 생각하면서 사도 요한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 요한은 어느 대적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고 대답하셨던 것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한편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첫째, 그 관계는 영원한 것이며, 둘째 유일한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남으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는 영원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고, 땅 위에 있는 아들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말씀하셨다. 시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의 구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행 13:33 참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기도하기를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아버지되심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도인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그가 바로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3:16).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하신 명령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일 수 없는 측면에서 그의 아버지 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에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 특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다. 이런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사도신경은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어 우리와 그의 관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직함에 의해 나타난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를 "주"자 불렀고, 그는 그 명칭을 받아들이셨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그 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생과 주"라 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도신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으로 단언한다.


 그러면 이 칭호는 무엇을 뜻하는가?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시며, 둘째, 그는 주권자이시다. 불신자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고 했다. 같은 문장에서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로다"(사 45:23). 또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장엄한 문장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분명히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믿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시거나 아니면 아무 젓도 아니다. 훌륭한 도덕 선생은 존경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하실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로 그 신앙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주권(sovereig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개념은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통치(reign)라는 단어는 "왕권(royal authority), 지배권(dominion), 세력(sway)"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 의 접두어는 "위의"(above)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super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이 단어에서 supreme(최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supreme(최고)와 reign(통치)를 합치면 sovereign(주권)이 된다. 따라서 엄정한 의미에서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를 왕이나 군주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진정한 지도자(supreme)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영 제국이 주권을 지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유일하고 진정한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완전한 의미에 서 통치자요, 지도자이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셨다. 그 위대한 주권의 선언을 근거로 하여 그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고, 또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위임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을 선언하셨을 때,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권자로 인식했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반복해서 이 진리를 강조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을 예를 들어보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빌 3:21) 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현재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사망의 권세하에 있는 인간이 그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때가 차면 그 권위를 완전하게 행사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서만 아니라 또한 사도 신경의 표현대로 "우리 주"(Our Lord)로 믿는다. 왜 우리(our)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 사람과 그러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약 2:1)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다. 베드로는 그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벧전 1:3)라고 불렀으며,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벧전 5:11)라고 했다.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 놀라운 광경을 기록하였다.


 만약 도마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말한다.

 

 첫째 그는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도마가 믿었던 그 내용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주로 단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과도 위배된다.


 "우리 주(Our Lord)"라는 말의 소유격 대명사가 복수임도 유의해 보자. 그것은 믿음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 보여 준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내가 믿고 또한 여러분이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 함으로, 그는 사도 공동체의 친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도 신경으로 개인적인 신앙("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을 고백하고, 또한 공동적 신앙("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도 고백한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진실하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참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신자와 더불어, 여러분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완성하실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원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 바 사도신경은 비교적 깊고 자세하게 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제기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죤 피어슨(John Pearson) 주교가 <사도신경 강해> (Exposition of the Creed)라는 제목으로1867년에 출판한 책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그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2.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으며, 단지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뿐이었다. 
 3. 우리는 잉태의 과정, 즉 처녀가 성령에 의해 잉태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4.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누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실제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을 안다.
 5. 그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셨다.
 6.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죄성을 믿기 위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 피어슨 주교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법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자의 몸에 잉태되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나 육체적 결합으로나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방법으로 잉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령의 독자적이며 능력있고 불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처녀가 잉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잉태되신 분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지니시고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교리가 논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 있음을 왜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을 임신케 하시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처녀를 잉태케 하실 수 있는 실로 전능 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이며, 둘째로는 그의 무죄성이다. 원죄를 지닌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흠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 사실 이외의 어떤 다른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우리와는 달리 처녀에게서 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기사는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이 기적적이었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또한 그 기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잉태만이 초자연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의 성경 인물도-이삭의 어머니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만이 갖는 고유한 의미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은 항상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상대되는 구절과 결합해서 생각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신적이거나 맹신적인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지 못하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탄생으로보다는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은 부활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했던 것이다(롬 1: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나시지 않고 성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한 인격에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학자들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의 연합을 "위격의 연합"(the hypostatic union)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 중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탄생에서 바로 고난으로 건너 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귀감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 26).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삼분의 일을 할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술하는데에 거의 반을 할애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이나 고난 주간 이전에 겪은 어떤 고통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생애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다. 그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단에게 고난받았으며 그를 죽이려 하던 악한 자들에게서도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중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인간의 경험일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의 거룩하심을 더 강화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박해 당하시던 당시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자. 왜 빌라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가? 피어슨 주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확실한 사망의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한 사람의 증인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죽음을 인정했다. 셋째,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빌라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된 사도신경의 기사에 대한 피어슨 주교의 보충 설명을 살펴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게 하시니, 이 때는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때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라,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무죄하나고 선언한 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성
경의 예언에 따라 그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 
벌에 내어 주었더라.

 
 피어슨은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갖는 세 가지 요점을 잘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날짜를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세속 세계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세푸스(Josephus)나 타키투스(Tacitus)와 같은 역사가들은 빌라도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에게 고난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정한다.
 
 빌라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빌라도는 거듭 말했다(요 19:4, 6). 예수님이 법률적으로 무죄하였다면 왜 사형을 선고 받았는가? 특히 죄인들을 위하여 메시야가 고난 받으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에 비추어서 그것을 생각해 보라.
 
 둘째,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도록 하였고(요 19:1-3), 그를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었다(요 19:16). 그리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인 힘이었던 로마 정부의 대행자가 영광의 주를 박해했던 것이다.
 
 시편 2편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같은 시편이 말하고 있다(시 2:4).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 속에서 빌라도[와 그를 비롯한 세상의 수 많은 통치자]가 저버린 메시야에 대한 그를 보내신 목적을 선언하신다고 시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
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빌라도는 이 경고와 권유를 무시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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