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3 11:14
[1]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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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936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보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 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 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 역시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인간 구원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요약 기술하는 사도신경이 구속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합리성을 지닌다.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명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근거로서 전능하신 분이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우리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외친 사람의 갈급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깊이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 믿는 자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서, 또는 과학 시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미신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이러한 바른 신앙을 표현한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만이 필요하다(시 42:2).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키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데 대한 명확한 변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우주의 합리성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우주가 질서있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려깊고 합리적인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흔히 신학자들은 네 가지 표제로서 우주의 합리성을 논한다


 첫째는 우주론(Cosmology)이다. 우주론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우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는 목적론(teleology)이다. 목적론이란 현존하는 "자연 속에는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신념"이다. 인간의 한계를 갖는 사고로는 자연의 목적은 너무 복잡해서 그 생성과 발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활동이 질서 있게 합목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바 그 배후에는 지혜로운 창조주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인류학(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우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주처럼 인간은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또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우발적으로나 우연의 일치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진화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이 분명하다.


 넷째는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이란 "존재와 실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의 본질이나 그 핵심적 특성 및 관계성을 탐구하는 지식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존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완전함의 근원, 즉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 개념을 얻었겠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완전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 시 139:13).


 위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적인 주장보다도 더 나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체험이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아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 18).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영향력으로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진술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가? 탕자의 이야기(눅 15:11-32)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 대답이 주어진다.


 탕자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느 집이라고 "탕자 같은 아들"이 없겠는가? 아마 탕자 같은 딸도 있을 것이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어떤 부랑자보다도 더 망나니였다. 그는 대단히 반항적이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은 영혼이 병든 징후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뉘우리고 그렇게 매정하게 저버렸던 자기의 늙은 부친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영적 방황기 이상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사상은 오히려 부친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아들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과 또한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꺼이 맞이했던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느 가정에나 방탕한 아들은 있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사랑이 풍부하며 철저히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이 아들은 문학 비평가들이 전형적인 인물(archetype, 즉 전기나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일컬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문학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 가운데 이와 같은 인물은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와 흡사한 분이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 즉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귀한 진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로 자비가 풍부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며, 죄인을 구속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신다. 여기서 후자가 보다 중요한 구분이다. 따라서 구속함을 입지 못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 즉 그들의 창조주로서 만의 아버지이시다.


 둘째 구속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성경은 이 진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시켜서 말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한 어느 시인의 말에 찬동하며, 그것을 인용한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엡 3:14, 15)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탕자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극화시켜서 나타내 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간 그의 자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두팔 벌리고 기다리신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신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벌써 나타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부자 관계 맺기를 기뻐하셨다는 내용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그 관계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관계를 맺으려 하셨다.


 그것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전 건축의 특권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대상 22:9, 10).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다윗이 메시야를 내다보며 쓴 시에서,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다윗이나 다른 그 누구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참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구약에는 많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Adonai)나 여호와(Jehovah)로 불렀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홀로 그러한 관계를 바라셨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굳은 마음에 호소하였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그 후에, 하나님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 하고 물러갔도다"(사 1:4)라고 슬퍼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셨다. 이 말이 주님의 탕자 비유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삼아 사랑으로 양육한 옛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아버지시라...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 63:16 참고, 사 64:8).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와 같았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를 대단히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인하여 슬퍼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그러나 그 백성은 이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응했는가? 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기 전에는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자녀가 된 후에야 여러분도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세상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전능자'(Almighty)라는 단어를 덧 붙여 놓았다. 전능자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후 9:8).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없게" 하신다(유 1:24). 그는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다(엡 3:20).


 간략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히 7:25) 분, 또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엡 3:20)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는 일은 비길데 없이 논리적인 일이다. 무력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누가 그런 시시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겠는가?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물론이다. 그 사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암시되어 있다. 전능자라는 말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을 뜻하며,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의미를 배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진리를 증명해 보이셨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 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그리고나서 바울은 웅변적으로 질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정말 멋진 질문이 아닌가?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처럼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함같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사실을 분명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전능자의 손을 움직인다. 전능자의 능력은 냉정하고 빈틈없지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거룩하신 아버지, 즉 자상하신 창조주의 마음에 의해 이것이 조정된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 다"(시 121:2)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다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했다. 또한 밤에 여호와의 전을 지키던 자들이 부른 놀랄 만한 노래 말들을 살펴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34:3).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표현일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자는 피곤치 아니하시

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이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땅끝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그의 백성을 자녀와 같이 대하시며 극진히 돌보고 계신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고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다. 다신교(Polytheism)는 창조의 주체로서 여러 신들을 말하며, 유물론(Materialism)은 세상이 우연히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신교(Deism)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창조활동을 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곧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범신론(Pantheism)은 하나님을 그가 지으신 세상에 가두어 버리고, 그 세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재적(세상 속에 계심)이시지만 또한 초월적인 분으로(세상을 떠나 계시며 그것을 다스리신다)계속 피조 세계와 관련을 맺고 계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땅 위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세상에 있는 가장 사랑 많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비교하면 사랑이라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요한은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 (요일 4:14). 하나님께서는 사업 여행이나 휴가차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선교하러 보내셨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 사랑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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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6 [1]이스라엘의 7대 절기 및 특별절기 웹섬김이 03-03 3960
2065 제직의 생활수칙 및 지침 웹섬김이 03-03 3212
2064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 웹섬김이 03-03 3682
2063 동성애는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죄 웹섬김이 03-03 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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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0 존 웨슬리 신학의 교회사적 의의 웹섬김이 02-23 8995
2059 [2] 죄의 기원, 죄의 본질, 원죄와 본죄 웹섬김이 02-23 3343
2058 [1] 죄의 기원, 죄의 본질, 원죄와 본죄 웹섬김이 02-23 3580
2057 불면증에 시달리는 목회자들을 위한 4가지 권… 웹섬김이 02-23 3392
2056 신사도 운동에 대한 결론 웹섬김이 02-23 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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