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3 11:22
[6]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35  

육체의 부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육체 부활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인간이 죽게 될 때에 인간의 몸은 분해되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변하며, 그리하여 매장된 몸의 성분과 흙은 사실상 구분할 수 없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바로 죽어 흙으로 변하여 형체를 잃어버린 그 몸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우리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고 명백히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 후에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한다. 바울의 사상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몸의 부활의 가능성을 부인한다면 그는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고전 15:13, 16).
 
 이러한 이유때문에 사도신경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사도신경은 계속하여 우리의 부활에 대한 신앙도 확고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둘 중의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의 진리도 무너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이루어질 사실에 대한 모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부활한 우리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낯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중요하며 내세에도 육체가 있음을 믿는다. 이 두 가지 사상은 인간 육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는 어긋난다. 그리스인들은 정신과 물질을 아주 날카롭게 구별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즉 그리스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간음이나 간통은 육체의 죄악이며 영혼은 그것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육체는 무덤에 들어가게 되며 다시는 무덤에서 나오지 못한다.
 
 성경도 정신과 물질을 구분했지만,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긴밀하며 영구적인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육체의 감옥에 갇힌 정신은 아니다. 육체를 벗게 되면 우리의 흠이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할 때 그 흠을 가리워주시는 것이다(고후 5:1-4).
 
 또한 육체는 중요한 것이다. 육체는 인간의 몸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범죄할 수도 있는 수단이다. 악한 것들은 속에서 나온다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들에 의해 육체가 더렵혀질 수 있다(막 7:14-23). 그럴 경우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심판시에는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
 
 바울은 육체가 인생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서"그 몸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았다. 아마 그것은 온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바울이 실제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거나 누더기를 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 욕망의 힘을 알았고 그래서 그 힘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전 9:24-27).
 
 즉 바울은 자기 육체가 죄로 더럽혀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아느냐고 물었다. 같은 곳에서 드는 또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아느냐고 질문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고전 6:15-20).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일반적 인간이 갖는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셨다. 육체를 지녔으나 그것은 다른 육체였다. 그는 벽을 뚫고 나오듯이 갑자기 "육체적으로 나타나실 수"있었다. 그는 또한 공기로 변하듯이 곧 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적인 몸을 지니고 계셨지만 피곤 하시거나 졸립지 않았다.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을 경험한 후 그런 육체를 지니게 될 것이다. 바울은 육체의 부활에 대해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 49)고 했다. 우리 몸이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다.
 
 부활이 성취될 때,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요한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요일 3:2). 죄와 죄의 영향력은 벗어져 없어져서 그것은 영원히 무덤에 남겨진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모두가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이러한 복합적인 우리의 신앙을 천명하는 것이 된다.

 

영생
 
 "육체의 부활"과 "영생"과는 매우 깊은 관계를 지닌다.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된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목적은 성경 여러 곳에서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은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하여 완전해진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반대되는 개념은 생명이다. 죽음이란 분리이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 59:2)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자로 묘사 하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분리하게 된다고 말했다(엡 4:18;골 1:21).
 
 그리고 육체적 죽음은 몸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사실 죽음과 관계된 모든 언어가 이러한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임종시에 친구들이 임종을 지켜보며 "그는 갔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도 "가버렸다". "돌아갔다"라고 죽음을 묘사한다. 숨을 거둔 후에도 인간의 육체적인 부분은 남는다. 그러나 비록 육체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다.
 
 한편 둘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분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는 자는 성경에 가장 무서운 말로 표현된 형벌을 당하게 된다. 성경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계 20:11-15). 
 
 영생은 죽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의 근본 사상은 분리와 대조되는 연합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며 그 결과로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살게 된다" 바울의 말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4, 5).
 
 육체적 죽음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그 육체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의 영향력을 파기하실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육체와 영혼은 부활로 다시 연합할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가 밝혀지는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은 육체와 다시 연합하게 되며, 이전과는 전혀 달리 완전해진 우리는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기 때문이다. 시편 16편은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다니엘은 그 날을 이렇게 예언했다. "땅이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다니엘은 영생과 그것의 반대인 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함께 예언했던 것이다.
 
 사도신경은 불신자들이 당할 "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적극적 진술이며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신앙은 내용적으로는 그 반대되는 멋을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영원한 심판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분명히 믿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3장에 나오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먼저 요 3:16을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음에는 요 3:36을 보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두 구절은 영생과 영벌에 대한 선택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제시하시며, 또한 생명을 택하도록 우리를 권유하신다.
 
 나는 여러 해 전에 생명을 선택했다. 만약 재삼, 재사 다시 선택해야 한다면 다시 생명을 택하겠다. 그러나 선택은 한번이므로 나는 영원토록 안전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선택하심에 대해 증거하는 일 뿐이다.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홀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아멘"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틀림없습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히브리어이다. 그래서 "아멘"은 사도신경 전반을 읽어 보고 나서 "옳습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내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46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087 침례교회의 특징 웹섬김이 03-20 3703
2086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 이유… 웹섬김이 03-20 3766
2085 사탄론 웹섬김이 03-12 4013
2084 귀신론 웹섬김이 03-12 3250
2083 프리메이슨도 자신의 기원을 성경을 이용해 … 웹섬김이 03-12 3728
2082 천년설 웹섬김이 03-12 8997
2081 [8]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408
2080 [7]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470
2079 [6]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194
2078 [5]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804
2077 [4]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510
2076 [3]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475
2075 [2]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474
2074 [1]성경인물사전 웹섬김이 03-12 3918
2073 [6]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웹섬김이 03-03 3136
2072 [5]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웹섬김이 03-03 3917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