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3 11:20
[5]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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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917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시작되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역할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가끔 이 말을 그리스도의 "개정"(session)이라 일컫는다. 재판관이 재판관석에 앉으므로 재판이 진행됨을 뜻하는 개정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세속적 용도와 밀접히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앉아 있는 일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개정이다.
 
 흔히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셨고, 또 지금도 여전히 하고 계시는 일들을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성령을 보내셨고(행 2:4),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으며(행 2:47), 앉은뱅이를 고치셨으며(행 3:16), 다소 사람 바울에게 나타나셨고(행 9:5),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며(히 2:18),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며(히 7:26), 우리의 대언자(advocate)이시며 (요일 2:1),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신다(히 10:13).
 
 이 기록들이 완전치는 못하나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개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될 두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들어가심으로 주로 인정되셨다. 둘째,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교회에는 은사를 주셨고 또 주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는 그의 사역으로서 지금 행하시며, 교회가 없어질 때까지도 계속하실 사역이다(엡 4:8; 살전 4:17; 히 2:9; 벧전 1:21;벧전 3:22).
 
 이상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내용인가? 그렇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온유적 표현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골 3:1)고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죄씻음이 이루어졌음과 그 사역이 완성되었음(히 7:3;히 8:1)을 우리에게 보증해 준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초대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해 팔을 넓게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다시 오시리라"라는 말은 중요한 성경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나타내기에 부족한 신조는 불완전한 것이며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약 300번 가량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30절마다 한번씩 언급하는 비율이다. 성경 학자들은 다른 교리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제가 중요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주제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수치로 나타낸 바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7개 서신서에서 19회 언급되며, 14개 서신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성만찬은 3, 4회 정도만 분명하게 언급될 뿐이며, 20개의 서신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신약의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되며 그 수효에 있어서도 300여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 진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너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일개 조항일 뿐이다. 성경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어야 한다고 단조롭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의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그와 그의 말씀에 대한 참 신앙을-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막는 일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5).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신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이 복된 소망에 대한 신앙이 사도신경과 그 후의 여러 신조에 분명히 기록된 것이다.
 
 재림의 시기 등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재림에 관한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불일치한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에 관한 사도신경의 고백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도신경은 세부 사항을 밝혀내려 하지 않고, 단순하게 "다시 오시리라"고 말할 뿐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에서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심과 같은 영적 "오심"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고 하셨으며, 승천하실 때 두 천사가 나타나 제자들에게 떠나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문자적 재림을 바라며 기다렸었다(살전 1:8-10을 보라).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다. 우리가 죽게 되지만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며, 영적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것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바울의 설명대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딛 2:13)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하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학자들간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자신의 협소한 체계에 흠뻑 빠져 있거나, 또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너무 변호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망각할 위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며 고양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에서 벗어난 사소한 문제에 대해 논쟁에 빠져들어 진리의 본질이 주는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두 가지의 축복을 의도하고 있다. 첫째, 복된 소망은 참된 위로를 가져다 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번째 축복은 거룩한 삶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희망은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자극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또한 우리가 그를 보게 되고,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 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고 말한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악한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함을 지닌 남자와 여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4세기에 그 기원을 두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모든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최후 재림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사도신경은 그냥 단순하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만 고백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표현, 그 자체만 보면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인 듯이 보여진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함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다른 목적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맞아들이시기 위해 재림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영혼이 이미 천국에 있는 자들의 몸을 소생시키실 것이며,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변화시키실 것이다. 죄가 인간의 육체와 본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그리스도께서 파괴시킨다는 의미에서 재림은 "심판"일 것이다(고전 15:51-58).
 
 둘째,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맺으신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께서는 성취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롬 11:1과 같은 중요한 성경 구절은 그 옛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사 60:1 참조). 그 약속들은 심판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메시야를 거절한 사실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마 19:28). 
 
 재림의 세번째 목적은 세상 질서 그 자체를 종결짓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그 때나 되면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은 파멸될 것이다(벧후 3:10-13 참고 ;히 1:10-12). 하나님은 만물을 다시 만드시지 않으시나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드실 것이다. 새 창조의 분자구조는 지금의 일반적인 체계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사단과 그의 통치권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죽은 영들에 대한 심판이 있기 전에 이미 사단은 불못에 던져져서 땅 위의 사람들을 다시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환상 중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던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참고 :고전 15:26,고전 15:51-57:계 20:10;계 21:3).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 다시 오신다는 사도신경의 표현은 심판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요약해 놓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구주 이상의 어떤 분, 즉 심판자이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요 5:27). 후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했다(롬 2:16 참고;행 17:31).
 
 그 심판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심판의 공정함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양심 그 자체가 심판을 요구한다. 바울은 십계명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조차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고 했다. 바울이 로마 관리(벨릭스)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 했다. 그의 양심이 심판의 합당함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행 24:25).
 
 사도신경이 의미하는 심판의 두번째 진리는 성경이 심판의 등급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여 심판하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 심판의 대상과 관련하여 사용된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성경적 가르침을 따라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시점을 기준으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이 영적으로 산 자들과 또한 육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분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옳은 것이며 성경적인 것이다. 전자의 견해는 살아있는 자와 죽어 어딘가에 묻혀 있는 자가 있음을 보아 분명한 것이다. 후자의 견해는 회개치 않은 자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묘사한 엡 2:1과 같은 구절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신자의 삶을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영생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에 이미 획득하여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 대한 심판은 실로 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다.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행 17:31), 천하를 심판하실 이가 누구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재하시는 원리(principles)가 하나님의 공의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하나님을 "공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했다(살후 1:5, 6; 딤후 4:1; 계 16:5-7).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계 19:2).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의심할여지 없는 진리라고 생각되는 바를 질문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 심판받는 자가 지녔던 여러 가지 특권, 기회 및 책임의 정도를 참작하신다. 심판자 스스로가 말씀하시기를 심판날에 타락한 두로와 시온의 도성이 하나님의 수 많은 이적을 보았던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다(마 11:22, 23).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 9)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성경 구절들은 가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복음을 듣고도 신앙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해야 할 불신자들이다. 심판날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도 거기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장중에 있다는 것이며, 그 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한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 모두를 위해 죽게 하셨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광경은 엄숙하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심판의 무서움을 환기시켰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이 구절이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앞으로 직면하여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하게 될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을 연상해 보게 된다.

 


제5장  성령 및 성령이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시킨 구원에 대한 신앙 고백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인간 구원의 계획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구원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를 교회와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성령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이 이어진다. 이처럼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으로 이루어지되 마지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의 사역이 비로소 각 개인에게 주관적이고 체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구원의 적용자이신 성령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생겨난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거룩한 공회와 구성원으로서 성도의 상호 교통함과 성도의 자격으로서 죄용서함과 구원받은 자가 장차 경험하게 될 육체의 부활 및 영생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각각 다룬다.

 

구원의 적용자이신 성령
 
 사도신경의 세번째 부분은 삼위 하나님 중 제3위이신 성령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성령"이 "성신"(HoIy Ghost)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ghost)이라는 말은 앵글로 색슨어로서 지금은 고어로 취급되고 있다. 따라서 성령(Holy Spirit)이 보다 바른 말이다. 사도신경의 셋째 부분을 언듯 보면, 성령과 그 외의 5가지 교리에 대한 신앙을 포괄하여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이면에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직후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축복의 기사는 그 축복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 즉 전능하신 성부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및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신경이 전적으로 성경적인 것임을 안다. 실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나타나지만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위대한 축도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 만큼이나 오래된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성령은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에게 관하여는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느니다."
 
 성령은 성경의 둘째 절에 나올만큼 일찍 언급되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창 1:2).
 
 성령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시함으로 시작되었다.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자,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실 것이라고 말했다(눅 1:34, 35).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의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 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성경을 보면, 성령께서 그에게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후에 성령이 시므온을 감동시켜 성전에 들어가게 했으며, 그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거룩한 아기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나게 되었고 시므온에 대한 성령의 약속은 이루어졌으며,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눅 2:25-27).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중에는 성령께서 이면(background)에 머물러 계셨다. 이시대는 삼위 하나님 중 제2위께서 돋보이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오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순응할 준비를 시키셨다. 다락방의 담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로서부터 성령이 오실 것과 그가 제자들에게 모든것을 가르치실 것과 죄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6:7-15).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준비를 하시면서, 세례 의칙(baptismal formula)을 통하여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 연관시키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주로 불리워지신다(고후 3:18).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큰 실수와 엄청난 희생을 통하여 배웠다. 베드로는 소유를 산 돈 일부를 감추고서도 전부를 바쳤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성령과 하나님께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행 5:3, 4).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때 우리 중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는 그를 알게 되었다(요 16:14, 15).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 심령에 구속의 모든 은혜를 적용해 주신다. 만약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신자가 될 수 없었으며 중생도, 죄용서도, 교회의 설립도, 성도의 교제도 없었을 것이다(요 3:6-8:엡 2:10, 엡 2:22;엡 4:30).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다음에 기록된 다섯 가지 축복들은 모두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먼저 "거룩한 공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 우리를 그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 만드시는 것이다(고전 12:13, 엡 1:22, 23),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축복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고후 13:13 ;빌 2:1). 사도 바울은 육체의 부활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이 다섯 가지 중요한 축복에 앞서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위치시킨 이유가 이러한 설명으로 분명해진다. 기독교 고유의 축복들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이러한 축복들을 현실화시키는 거룩하신 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성령을 믿으면서, 사도신경의 유서 깊은 구절인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거룩한 공회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거룩한 공회"라고 말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는데, 그것은 공회(catholic)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과 동의어로 해석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에서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 사용되어진 공회(catholic)라는 단어는 로마 가톨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어 단어는 "우주적"(universal)임을 뜻하는 헬라어 형용사와 거의 동의어이다. 이 단어는 본래 세계 도처에 널리 퍼진 기독교의 지리적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언젠가 어떤 권위 있는 학자는 "문장 속에서 '우주적 신앙' (catholic faith)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은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리의 순수성과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과 우주성(universlity)은 지리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세워지게 된 교회는 그리스도께 연합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다. 어느 지교회나 특정 종파가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내에 있는 어떤 종파도 그 시대의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다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면, 하물며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랴.
 
 교회의 우주적인 면은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리 라고 말씀하셨을 때였다(마 16:18). 바울은 교회의 정의를 내리고 이에 대해 묘사했다. 예를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중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 1:22, 23). 바울은 교회를 보통 건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엡 2:21, 22)과 같다고 했다. 가끔 우리는 이렇게 노래한다.

 

만민 가운데서 선택받았으나 땅 위에 교회는 하나이며, 
구원의 헌장도 하나이고, 주도 하나. 신앙도 하나, 출생도 하나이며, 
교회를 축복하는 거룩한 이름도 하나이며, 하나의 성찬에 참여하며, 
부여 받은 모든 은혜로 나아가는 소망도 하나이로다. 
-사무엘 스톤(Samuel J.Stone)의 "교회의 한 기초"-

 
 교회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세워져 가고 있는 건물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마다 한 개의 산돌이 그 벽에 더 쌓이는 것이다. 언젠가 이 교회는 완전해지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승리를 거둔 위대한 교회여, 영원토록 안식하리라"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4세기에 만들어진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보편적인 교회) 라는 표현에 하나와 사도적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의 교회를 확인해 주는 네 가지 수식어로서 참된 교회의 네 가지 표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라는 단어는 진정한 교회의 연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는 조직적인 연합이 없었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연합이란 영적 연합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롬 12:5)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단에 속해 있든지간에 신자들은 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어느 한 조직이나 한 공동체가 바로 그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거룩(holy)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신성한(sanctified)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의 앵글로 색슨어이다. 이 단어의 근본 개념은 "구별"(separation)이다. 성경에서는 산이나 기타 장소가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도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기도 가운데서 이 말을 사용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앞으로 하시게 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있는 것을 뜻한다(요 17:19),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따라서 완전히 정결치 못한 이 지상의 조직 교회는 언제나-과거에도 지금도-"거룩" 이란 칭호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란 칭호는 이미 하늘에 있는 성도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교회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신랑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엡 5:25 -27)고 하신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는 이 지상의 어떤 교단도 이 칭호에 적합하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참된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한다. 만약 사도에까지 교회의 계보를 추적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교회는 사도성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일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부차적인 시험(test)이 요구되는데, 가르침과의 일치 여부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일치 여부를 추적하는 것만이 사도적 교회인지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시험이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엡 2:20) 교회라는 바울의 묘사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유일한 사도적 교회는 한 곳에 함께 모일 수 없는 교회이다. 이 교회의 회원은 여러 나라에 살고 있으며,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은 이미 본향인 천국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파들은 자기들이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르게 계승한 교회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교파의 회원들은 자기 들의 행동이 1세기의 사도적 교회의 신자들과 제일 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단체이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로 주장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는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 정도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W. H. Griffith Thomas)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것인가라는 질문이 주어 진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어디 있는 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이 이루어진 모든 곳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하나의 가시적 교회나 교회의 단체만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사도신경에서는 부분적으로, 니케아 신조에서는 전체적으로 설명된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는 참되고 유일한 교회로 나타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그 교회를 "한 몸"과 "온 몸"이라고 했다(엡 2:16엡 2:16;4:16엡 4:16).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보실 수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부분은 전체의 어떤 특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모든 교회는 참된 거룩의 특성을 지녀야 하며 가능한 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도록 성경을 알고 이해하기를 쉼없이 힘써야 한다. 어떤 모임이 사도성을 지녔는가 라는 궁극적인 시험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여부에 달려 있다(갈 5:22, 23을 보라).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또한 사도적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암송할 때의 고백되어지는 바로 그 교회이다.
 
 그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한 장소에 모여 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온 몸이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미 하늘에 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계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온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사랑하며 자기의 삶과 행위로 이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참 교회라고 불리워져도 무방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교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순서상 두 가지의 예비적 고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도신경의 이 구절은 다른 구절보다 후 시대의 것이다. 둘째, 이 구절은 몇 가지로 상이하게 해석되어져 왔다. 예를 들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것을 "거룩한 공교회"라고 정의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강조점은 "성도"라는 단어에 있으며 그러므로 "거룩한 공교회"는 성도의 회합으로 정의되었다. 여기서 성도란 하나님께 구원받을 것으로 택하심을 입어 그리스도 보혈로 구속함을 얻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교통(communion)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게 되면, 루터의 해석은 흔들리게 된다. 교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로 번역되는 라틴어 코뮤니오(communio)는 어떤 일반적인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회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 회원들이 누리는 것, 즉 축복에의 참여를 말하고 있다.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 라는 구절은 모든 참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동일한 내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성도의 연합에 대한 부가적 사상, 즉 연합된 성도는 서로 교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서로가 각기 연합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또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관심사와 공동의 기쁨을 지니게 된다. 성도의 교통은 연합됨의 의미를 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발전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더불어 서로간의 연합의 의미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누리게 된다. 그들의 공동의 기쁨과 공동적 관심과 서로에 대한 성숙한 의존심을 알게 된다. 성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과 나 및 모든 진실한 신자들은 타인에게서 분리된 개인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고독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는 이 위대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찬송가들이다.

일의 수고를 마친 모든 성도들, 
세상에서 믿음으로 주를 고백한 그들을 보라. 
오 예수여,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영광받으소서. 
할렐루야. 
얼마나 복스러운 교제이며, 거룩한 사귐인가. 
우리는 헛되이 싸우지만, 
그들은 영광 중에 빛난다. 
그러나 만물이 주 안에서 하나이니, 
이는 만물이 주의 것임이로다. 
할렐루야. 
-월리암 월샴 하우(William Walsham How)의 "모든 성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그리고 그 분과 교제하며 
그 분과 함께 걷는 성도, 
또한 땅 위에 있거나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성도는 
다른 친구가 필요없으리.

성도들의 연합은 
지혜롭고 안전하며 기쁜 연합이며, 
내 마음이 낙심되고 괴로울 때, 
그 연합됨이 나를 따뜻하고 
밝게 다시 일으키리.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 -

 
 이러한 찬송 속에 우리가 "성도의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의미하는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신앙 고백문은 이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모든 성도들(즉, 진실한 모든 신자들)이란 "거룩한 교제와 연합을 유지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의 영적, 육적 복리를 추구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성도의 교통은 자기가 속한 교단의 사람들과의 교제로만 제한되지는 않는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원리가 실행되어진다면 잘못된 종파주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교단에 가입하는 일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 교단에 속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는 종파적인 생각을 일소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파주의를 반대한자. 그러나 복잡한 교회 규칙이, 원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종파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폐쇄적인 종파주의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범위를 자기 교단의 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론상으로 그것은 불순자가 거룩해야만 하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교통을 막는 결과가 된다.
 
 해리 아이론사이드(Harry Ironside) 박사는 종파심을 벗어나는 일을 해냈다. 그가 어떤 교단에 소속하라는 종용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신이 시편 기자의 교단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론사이드 박사는 시편 119편 63절을 인용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얼마나 멋있는 교단인가! 이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나는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라고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의 용서
 
 죄용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첫째 되는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것이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를 축약한 사도신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죄용서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용서란 "범죄자에게 벌내리기를 포기 하는 것, 또는 형벌을 면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forgiveness)와 사면(pardon)은 같은 말이다. 영어 단어 pardon은 "완전히 포기하다" (즉, 철저히)라는 뜻의 프랑스어 합성어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범죄자인 우리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징계할 칼을 내려 놓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벌을 부과시킬 자기의 권리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완전히 포기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죄에 대한 가장 간단하지만 원천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의미에서 죄란 인간적인 법의 위배이다. 사도신경에 사용된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과 관계되는 것이나 또한 인간의 법을 거슬리는 모든 형태의 죄를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신앙을 확인한다.
 
 이 사상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려 했다는 것을 큰 소리로 외쳤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그리스도)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고 했다(행 5:31).
 
 기록상의 바울의 첫 설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을 갖춘 설교가 아니었다. 그는 회당에서 자기 동포와 진지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용서가 선언된다고 외쳤다(행 13:39).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죄용서를 믿는다.
 
 만약 마틴 루터(Martin Luther)나 다른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기록 했다면, "나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대신 "나는 죄를 깨끗케 사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은 죄용서를 믿지 않았다는 말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자들도 죄용서를 믿었다. 우리 마음은 용서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용서를 말하고 있다. 성경 중 가장 귀한 구절 중의 하나는 미가서 7장 18절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 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죄악을 용서하시고 사면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죄용서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용납(acceptance)을 필요로 한다.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보증하는 것과 또한 장차 지을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겠다는 보증을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거룩케 한다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의미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 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칭의란 죄의 결과를 바꾸어 놓으며, 에덴 동산에서 상실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선물이다.
 
 신학자들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대표 아담이 범한 죄의 세 가지 결과를 죄책, 정죄, 하나님과의 분리라고 말한다. 칭의란 이런 세 가지 사실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첫째, 그는 우리를 덮고 있는 정죄를 벗겨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신다. 둘째, 그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킴으로 우리의 죄책을 없애주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분리를 종식시키신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히 용서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인으로 취급하시며, 또한 그의 "가족"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이 제기한 일련의 질문들에서 얻을 수 있는 칭의와 관련된 진리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자를 송사하리요?"(롬 8:33). 그 대답은 아무도 송사할 수 없다. 죄책은 없어졌다. "누가 정죄하리요?"(롬 8:34). 그 대답은 정죄는 벗어졌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그 대답은 끊을 수 없다. 분리는 끝나고 회복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일들은 칭의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용서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다.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W.H. Griffith Thomas)는 칭의와 용서, 이 두 가지 은혜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용서 이상의 것이며, 이 둘은 바울에 의해 분명하게 구별되었다(행 13:38. 39). 죄인은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가 의롭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칭의는 우리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용서는 하나의 행위이며 행위의 연속이다. 그러나 칭의는 용서를 일으키는 행위이나. 용서는 삶 전반에서 반복되지만 칭의는 완료된 것이며,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자세와 관련되는 것이며, 우리의 삶 즉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용서는 소극적인 것이며 정죄를 없애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칭의는 적극적인 것이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서게 되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칭의는 회복을 뜻한다.

 
 이러한 설명들로써 만약 종교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변경시켰었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그렇게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용서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죄를 사하려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완전한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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