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4-29 21:21
[3]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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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274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이단 사상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Ibid., p. 95).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 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Ibid., p. 96).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substance)와 성질들(natures)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 306).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Ibid., pp. 306, 307).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Ibid., p. 162).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17).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bid., p. 1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이단 사상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 . .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Revelation as History, pp. 13, 14). 

 

사람이 성경을 판단하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94). 

 

사도신경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10).

"사도신경의 표현 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 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 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 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 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 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Ibid., p. 13).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兆)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진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성(nature)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The Apostles' Creed, pp. 63, 64).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Ibid., p. 104).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의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Ibid., p. 91).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이단 사상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Ibid.,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Ibid., p. 310).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pp.53, 5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 . . 칭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Ibid., p. 59).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Ibid.).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Ibid., p. 65)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이단 사상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294).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Hymn of the Universe, p. 133).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Ibid., pp. 143, 144).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39).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Ibid., pp. 79, 80).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Ibid., p. 221).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Ibid.).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The Future of Man, p. 66).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312). 

 

에큐메니칼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 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 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Science and Christ, p. 190).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Ibid., p. 197).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Ibid., p. 198).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이단 사상

마태복음은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 3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Ibid., p. 35).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 12).

". .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Ibid., p. 26).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 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 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 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p. 3).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Ibid., p. 4). 

 

기독교의 절대적, 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두드러지게 다르다"("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p. 7).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리운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Ibid.).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Ibid.).


머서(Mercer) 대학교수 폴 듀크(Paul Duke)의 불신앙

미국의 머서 대학교 신약과 설교 교수 폴 듀크는 "동성애와 교회"라는 제목의 1994년 협동 침례교 협의회(남침례교단의 자유파)의 총회전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 . . 동성애는 성경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 . . 나는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듀크는 동성애적 짝들의 결합에 대한 자신의 '넓은 후원'을 긍정하였으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은 이성애적 짝들이라고 주를 붙였다. 머서 대학교는 미국의 보수침례교협의회(Conservative Baptist Fellowship)의 재정지원을 받는 학교이다. (Calvary Contender, 1 June 1999.) 오늘날 보수적이라는 명칭을 가진 교단들이 다 참된 보수적 교회가 아니다. 

 

머서(Mercer) 대학교 총장의 불신앙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머서 대학교 총장 커비 갓세이(Kirby Godsey)는 한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라고 주장하고, 동정녀 탄생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버리고, 회개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근거'임을 거부하고, "교리적 건전함이란 교만한 신학적 난센스[터무니 없는 생각, 허튼말]이다"고 주장한다(Baptist Banner,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

 

시실 셔만(Cecil Sherman)의 자유주의 사상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1983년 8월 5일자는 당시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목사이었고 후에 온건-자유파 협동 침례교단의 초대 전국 의장이었고 현재 자유주의적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시실 셔만박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성경에 의해서 또한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도록 인도함을 받을지도 모를 선생은 해고되어서는 안된다. . . . 그것[동정녀 탄생]은 두 복음서들에 있으나 다른 두 책들에는 있지 않다. . . . 마가와 요한은 그것을 나열하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실수를 범했는가? 만일 동정녀 탄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마가와 요한은] 잘못을 범한 것일 것이다." (Baptist Banner, 1 March 2001;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로버트 슐러

로버트 슐러, 통일교와 몰몬교와 연관

로버트 슐러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 에이지) 연례 대회를 위해,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인 조찬 기도회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그리고 천주교인들은 그의 수정 대성전 강단에서 연설했었다. 그의 가르침들과 행동들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이단적이다. (Vantage Point, November 1998;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로버트 슐러를 조심하라

로버트 슐러는 뉴에이지 사람들, 몰몬교인들, 및 천주교인들과 강단 교제를 나누었다. 그의 교훈들과 행위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이단적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잃어버리고 죄악된 상태를 깨닫게 하려는 비기독교적이고 투박한 전략보다, 더 인간 개성에 대해 파괴적이고 따라서 전도 사업에 반생산적이라고 증명된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깃발 아래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4 January 1999;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1 February 1999). 

 

로버트 슐러의 문제

미국의 크리스탈 교회 목사 로버트 슐러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우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The Discerner, June 1999; Christian News, 19 July 1999;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기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는, 진리가 단순히 문화나 개인의 '구성물'이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내게 참된 것이 너에게는 참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적 경험주의, 과학 및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들이나 다른 모든 객관적 진리에 대한 점진적 거부를 대표한다. 상대주의와 개인의 경험이나 느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개인적 진리의 기초이다. 설문 조사 통계들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86퍼센트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72퍼센트는 절대적 진리의 개념을 부정하고, 61퍼센트는 문자적 사탄이나 지옥을 부정하고 40퍼센트는 하나님에 대한 뉴 에이지 견해를 믿는다. (World, 12 September 1998; Watchman Expositor, September 1998; Calvary Contender, 1 October 1998.) 

 

자유주의적 '전도'

미국 복음주의 협회(NAE)의 세계 구제기구(World Relief) 회장 클리브 캘버는 말하기를, "내가 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 것은 한 전도자가 설교한 메시지 때문이 아니고 그가 그의 삶을 산 방식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이스턴 신학교의) 란 사이더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배고픈 자들을 먹이지 않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미국 침례교회의 신문 크리스챤 시티즌(5쪽)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본다: "전도는 우리 마음에 생각되는 모든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변혁시키시고 해방시키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 왕국의 임함을 알리는 것이다." 성경적 복음(고전 15:1-4; 롬 1:16)을 포함하지 않는 그 어떠한 전도도 성경적 전도가 아니고 무력(無力)한 '사회 복음'이다. (Charisma, December 1998;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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