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7-15 09:45
[3]바울서신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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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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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배의 날짜 및 시간

  
초대교회 교회력에 관한 최고의 증거는 A.D. 57년경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 가운데서 찾아볼 수가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절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고전5:7-8). 이 언급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유월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성전에서 몇몇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대상23:30)과 다니엘이 하루에 세차례 기도했다는 사실(단6:10)을 알고 있다. 기도 시간으로 하루를 구분하는 풍습은 초대 교회 공동체로 전해졌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행3:1)고 적고 있다. 누가는 또한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육시더라"(행10: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공동체  중심의 조직화된 매일의 예배가 있었다는  직접적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기도의 습관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하루 중 특정한 시간마다 기도를 드리는 풍습을 계속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로버트 웨버 저, 예배학, 김지찬 역, 생명의 말씀사)

4. 성례전(세례주의 만찬)

① 세례

세례가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씻음'이라는  생각이 입증(고전6:11; 엡5:26;  딛3:5)되었으나 세례가 옛 생활에 대한 죽음과 새로운 창조를 상징하는  '죽음의 바다 속에 잠김'이라는 사상이 세례의 신학에서는 훨씬 더 강조된다. 이 비유는 세례통에 들어가기 전의 옷 벗음과  물에서 나와서 새 옷을 입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한 옷 벗음과  다시 입음은 때때로 죽음과 새 생명(롬13:14,  골3:3)이라는 문맥에서와 바울의 사상에 나타난다(갈3:27, 골3:9). 그 전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에 연관되어 있다.(골2:11-12, 엡4:21)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고, 또 깨끗케 함이 상징이라고(고전1:13, 6:11, 엡 5:26)했다. 이러한 바울의 세례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랄프 마틴 저, 초대교회예배, 오창윤 역, 은성출판사)

ⓐ 바울은 성례의 미신적 사용을 배척한다. 

고린도인들은 어떤 중요한 인물들에게 세례받는 것이  매우 큰 유익이  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고전1:13-17) 그러나 고린도전서 1:16,17과 10:1-17에 나오는 세례와 주의 만찬의 의미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어떠한 마술적 사상도 가르치지 않고 또 그 성례들이 어떠한 특별한 능력을 준다는 인상도 전혀 나타내지 않음을 보여준다.

ⓑ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말하였다(고전12:13, 갈3:27) 

ⓒ 세례는 자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를 요구한다(롬6:1-4)

ⓓ 세례라는 외적 행위에  대한 완전한 내적  의미의 설명은 로마서  6:3이하와 골로새서 2:12에서 발견 되는데, 이 두 본문은 모두 죽음과 부활이라는 문맥 속에서 그 성례의 의미를 분명히 말해준다.
                골2:11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골3:5 "육체를 죽이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갈라디아서 3:27절은 바울의 사상을 간단하게 요약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또, 에베소서  5:14 절은 세례기도로 생각될 수  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② 주의 만찬

식사와 주의 만찬과의 관계는 고린도전서에 잘 나타나 있다(11:17-34). 주의 만찬을 나눔에  있어서 바울은 우리 주의 죽으심을  공동체 친교의 중심부분으로 강조하고(고전11:23-26),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 볼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고전11:27-30) 진지함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 곳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성만찬을 대연회와 실제로 연결시키고 있었음"이 의심할 여지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적어도 고린도 교회에서만큼은 이 성만찬 예식 안에도 몇몇 폐습이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의 행동을 비난한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11:20-22)

아마도 식사를 먼저하고, 다음에 주의 만찬을 갖는 순서로 진행된 듯 하다.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식사 때의 즐거움을 너무 만끽한 나머지, 진지한 자세로 주의 만찬을 참여할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집에서 먹으라고 충고한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 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34).

바울은 기독교의 축제인 성찬에서 거룩에의 요청과 유월절 의식을 잊었음을  상기시킨다(고전5:7,8). 유월절 축제 때, 모든 유대인 가정에는 누룩이 흔적도 없이 치워지고 집안의 모든 구석과 틈까지 청소되어 '깨끗하다'고 선언되어야 그 엄숙한 의식은 거행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의 '옛 생활'은(롬6:6, 엡4:22), '벗어  버려'져야 한다(고후5:17). 왜냐하면 그가 구속의 명절을 지킬 때마다(고전5:8)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가 순전하고 거룩한 삶에로 그를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성찬의 자리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임재해 계신 주님과 결합되듯이, 우리는 또한  그의 백성들과 연합되어 있다. 이것이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하는 고전10:17의 의미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이다.(롬12:4,5, 엡4:4-6, 골3:15) 바울은 성찬을 분열한  사람들에게 화합을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 한다.(고전10:14-22) 바울이 주의만찬에 관해 물려 받음 전통은 이런 말씀을 담고 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전11:24,25). "너희가....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Ⅳ. 고린도 교회 예배의 문제와 그 특징
  
바울의 고린도 복음사업은 행18:1-18에 설명되고 있는데 바울은 이 도시에서 18개월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때가 AD50년 가을부터 52년 봄이 아니었던가  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안 교회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유대개종자들과 이방 개종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유스도가 있었는데 이는  자기집을 바울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복음 전도를 마치고 에베소로 건너가게 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린도에 남겨두고 떠났다.{기독교대백과 사전1, pp845-846 기독교문사, 1993, 서울}

하지만  이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어 바울은 그에 답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중 고전  11-14장은 예배문제에 대한 회신을 보내는데 이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의 에배의 요소와 그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의  요소는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 애찬 및 성만찬, 그리고 방언과 예언의  은사등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요소들에서 문제가 일어났고 이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는 바울을 보면서 고린도교회 예배의 성격을 추측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본문에 나타난 문제들을 고찰하고, 다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을 고찰해보고 예배의 제요소가 문제시  되게되고 그에 조금은 강한  어조로 회답해야만 하는 바울의 입장을 추론해봄으로 바울의 조언이 고린도 교회와 현대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추론해 보려고 한다.   
  
1. 본문고찰
  
1)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고전11:2-16)
  
예배 때에 여자들이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반드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수건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들은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쓰고 공식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자유로운 고린도 여인들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아예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 노예출신 여자나 간음한 여자는 머리를 깍아야 했다. 이에 수건을 안쓰는 것은 바로 머리를 깍은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천한 여자로 치부되었던 것이다.{{크로스 종합주석 p.526 로마서-고린도후서, 도서출판 시내, 1992,서울}}

2) 애찬식 및 성찬식의 문제(고전11:17-34)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음식을  가지고 교회로 가서 공동식사를 했다. 즉 사랑의 잔치(애찬)를 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포식하고 자기들보다 가난한 동료 그리스도인을 허기진 채 내버려두는 우애 없는 행동을 책망한다. 이들은 애찬 후 성찬식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애찬에 관한 부분에서 빈부의 격차가 있는 애찬을 행함으로서 교회와 거룩한 예전을 모독하였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애찬 후 성찬식을 하는데 그  거룩한 만찬에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고 책망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성만찬의 제정에 대해 상기시킨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함께 교회에 모였지만 분쟁과 분파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애찬을 즐겨했는데 교인들은 각자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와서 교회에서 공동식사를 했었다. 그런데 有無相通하던 초대교회의 정신을 잊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따로따로 식사를 하는 등 심각한 차별의식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자들은 애찬석상에서 자신들이 사서 갖고  온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였다. 

다음으로 성찬식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로 애찬식에서 범죄한  상태로 전혀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 없이 경솔한 심령을 가진 상태에서 성찬에 임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 이에 바울은 성찬식 참여하는 자는 앞서 자기반성이 필요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피 흘린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며 죄에 대한 회개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임을 말한다.

3) 방언과 예언을 비롯한 은사들

은사들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을  분별함, 방언을 말함, 방언을 통역함의 은사들이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 내에는 영적 은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은 주로 공중 집회에서 사용되었는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경건의 정신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여된 채 공중 앞에서 그것들을 자기의 의로 과시하는 듯 이를 행한다. 

사도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방언을 최고의 은사로 알아  서로 방언하기를 갈망했고, 그렇게 방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예언과 방언의 상대적인 가치를  논하여 방언은사가 지닌 한계성을 가르쳤다. 인간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함으로 모임을  혼란하게 하고있다고 하고 절제하고 오히려 예언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언을 할 때는 한꺼번에  말할 것이 아니라 한사람씩 차례대로 말하라고 하고 있다. 
  
위의 문제들을 종합하면 고린도 교회는 예배에 있어 여자들은 수건을 써야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쓰지 않는 자들이 있어 혼란스러웠고 애찬식 즉  공동식사가 있었는데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차별함으로 오히려 서로가 분열하고 있었다. 이로써 주의 떡과 잔을 나누는 애찬식 후 성찬식은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을 잊은 상태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었던 고린도 교회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서 두드러진 문제가 있었는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서로 앞다투어 하려했고 예언 또한 그러하였기에 고린도교회는 서로 경쟁하게 되므로 혼란스러웠었다. 

2, 고린도의 사회적 배경

고린도 교회의 예배의 문제와 그 특징들은 매우 역동적이고 격렬한 성격이 있음을 우린 느낄 수 있다. 이토록 강력한 문제가 대두되고 이 문제를 오로지 문제로만 다룬 바울은  무슨 의도일까? 문제를 잠식시키는 데에만 급급한 바울, 조용히 시키고 질서를 잡는다고  교회의 다음 상태를 당사자들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당사자인 고린도 교인들은  어떤 타격을 입었을까? 또 그 영향은 지금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문제들을 추론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고린도는 세계적인 대도시로서 상업 공업분만 아니라 사치와 방종으로도  유명하였다. 이곳은 고린도만과 지협에 위치한 살기  좋은 아름다운 곳으로서 아티카와  펠로폰네스를 잇는 육상의 주요 체류지였다. 더욱이 북쪽 레케움 항구와 동쪽으로 10km까지 뻗은  겐그리아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 사이에 있는 상업의 화물  집산지였다. 고린도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고린도는 주전 3세기에 아가야 동맹의 주도자로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에 패해 주전 146년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후 고린도는 1세기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시이저가 주전 44년에 선포한 칙령에 따라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바울이 선교할 당시의 고린도는 로마의 속주 아가야의 수도로서 과거의 멸망을  딛고 일어나 무역의 중심지로 상업적 번영을 회복했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에베소서에 이어  그 크기와 영향력에 있어서 중요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고린도가 이와 같이 세계적인  상업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양면에 바다가 있어서 동서 양쪽에 항구를 가지고 동방과 서방을 향한 무역항이었기 때문이다.{이희봉, 바울의 여성이해,p36, 서울신학대학원 1994}}

고린도에는 지중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있었으며 당시 고린도 인구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 퇴역군인, 그리스도교인, 노동자,  기업가 등을 포함하여 50여만 명이 살고 있었다. 

이 고린도의 문화는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다양한  문화들로 혼합되어 있었고 여러 종교들로 인해 신전들이 널려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풍요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은 성행위가 포함된 주술적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신전제의에는 100여명 이상의 여사제들이  참여했으며 그 여신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었다. 이로 성적 문란의 풍조를 낳았다.{유재인,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이해, p.21 서울신학대학원. 1994}

또 이시대 유대적, 헬라적, 로마적 문화의 여성들은 권위적인 가부장적 문화를 이루고 있어 여성들은 대부분 수건을 쓰고서야 외출을 할 수 있었다.

3, 고린도 교회의 예배적 상황

주후 1세기경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오순절의 열성 때문에 자발적이고 직접적인 계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  어떤 고정적인 형식이 없었고 짜여진 형식에  의한 예배의식도 없었다. 자유롭고도 격정적인 예배가 진행되었다. 방언, 예언, 애찬, 성찬, 등등의 예배의  요소들은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 졌다. 더 나아가 여성들도 지도력을  가지고 가르치(11:5)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적 민중 그리스도인들의 참여가  어느덧 부자들로 인해 침해를  당하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수건을 벗고 지도력을 발휘하자 이것 또한 쾌락주의적인 견유학파의 자유주의 자들에 의해 역이용되어 버리고 말았다. 예배는 자발적인 참여가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언하는 자나 방언하는 자들은 이것을 욕심 내는 사람들에 의해 그만 퇴색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문제를 바르게 조절해 줄  것을 고린도 교회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요청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이일을 매우 가슴  아파하며 방문하기 보다 또 정확한  문제 파악을 하기 전에 그 편지 그대로 받아 회신을 하며 고린도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규정해 버리고 만다. 

머리에 수건을 벗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써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이는 유대사회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를 벗어보려는 의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애찬식의 음식문제를 "서로 다투니 집에서 먹고 오라"고 원천봉쇄하고 나선다. 방언이나 예언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고 자제하려고 하는 등 매우 정형화된 예전을 알려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도바울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데는 그가 견제하려는 적대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적대자들은 다름 아닌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가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다(6:12) 이들은 고린도 상황에서 볼 때 쾌락주의적인 견유학파의 전승을  담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나 음식문제에  있어서나 자기들 스스로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은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배 시에 심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여성들이 지도력을 가지고  수건을 쓰지 않고 자유롭게  참석하자 극단적인 자유를 표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의 문제가 전체가 무질서하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예배의 풍조에 대해서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Ⅴ. 나가는 말

1) 바울과 초대교회 예배를 정리하면서

바울 서신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을 치열한 전투적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부적인 적과 외부적인 반대자들 사이에서 바울은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신학으로 이들에게 때로는 변증하기도 하며 때로는 강권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소하기도 하며 자신의  상황을 타결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배에 관한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위협과 오해의 현실에 바울은 내몰렸다. 전통적인 유대계 기독교인들로부터는 회당 예배의 전통을 유지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터이고, 이방 기독교인들에게서는 그  들의 풍습이 반영된 예배를 요구받았을  것이다. 

회당예배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구약의 예배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벨론군이 예루살렘을 침범하여 성전을 파괴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국 땅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히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제물을 드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예물을 대신하여 포로민들에게 허용된 것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기독교 교회예배의 기초 또는 원형이 유대교의 회당예배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회당예배는 A.D. 제 1세기  말엽부터 한 고정된 예배형식에 의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 순서는 첫째, 쉐마의 낭독이다. 쉐마의 낭독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종의 "신조"에 해당하는데, 쉐마라는 말은 신명기 6:4-9의 첫말이 "쉐마"(들으라!)라는 말로부터 시작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쉐마"라는 말로 부터 시작되지는 않으나 "쉐마"에 포함된 구절은 신명기 11:13-21과 민수기 15:37-41이다. 이 세개의 구절을  낭독하므로 회당예배는 시작된다.

둘째, 18개의 기도문(쉬모네, 에스레)낭송이다. 이 기도들은 시편과 예언서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각 기도의 주제는 1) 조상들에 관한것, 2) 권능에 관한것, 3) 주의 이름의 거룩함에 관한 것, 4) 이해 또는 지식에 관한 것, 5) 회개에 관한 것, 6) 사죄에 관한 것, 7) 구원에 관한 것, 8) 치유에 관한 것, 9) 풍년을 비는 것, 10) 흩어진 백성의 귀향을 비는 것, 11) 올바른 심판의 회복을 위한 것, 12) 배교자의 심판을 비는 것, 13) 이방인 개종자에 대한 축복, 14) 예루살렘과 시온에 관한 것, 15) 기도 응답을 비는 것, 16)  예배에 관한 것, 17) 감사에 관한 것, 18) 평안의  축복이다. 이 기도들은 모두 "일어서서"드려졌는데, 안식일과 축제의 날에는 앞의 세 기도(1-3)와 뒤의 세  기도(16-18)를 낭송의 형식으로 드려졌는데 앞의 세 기도와 뒤의 세 기도 사이에 제 4기도로부터 제 15기도까지의 기도들 (12개)  중에서 그 날에 맞는 기도 하나를 선택하여 삽입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기도들은 끝날 때 회중의 "아멘"회답으로 끝이 난다.

세째, 성서본문의 낭독과 통역이다. 낭독은 "율법"에서부터와 "예언서"로부터 최소한  3절씩 낭독하였고 통역자가 낭독자 곁에 서서 매절 매절 아람어와 희랍어로 통역을 하였다.

네째, 설교와 교훈이다. 설교나 교훈은 반드시 성직수임을 받은 사람이  해야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방문객에게도 교훈을 줄만한 능력이 있으면 설교의  직능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성경낭독과 설교를 맡으셨던 경우(눅 4:16-21)나 사도 바울이 안디옥의 회당에서 설교를 하였던 것(행 13:15-42)은 그것을 입증해 주는 좋은 예이다.

다섯째, 축도의 순서로 민수기 6:24-26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축도는 주로 제사장에게  위임되어졌으나 제사장이 출석치 않았을 경우에는 평신도가 축도를 할 수 있었다. 이 점도 매우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교인에게도 경사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느 쪽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도 변증해야할 상황에 처했음을 발견한다. 특별히 고린도 전서를 통해 이방교회의  여러 가지 예배 풍속도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Ⅱ장에서 살펴본  초대교회의 예전(말씀 예전과 다락방 예전)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지엽적인 문제들, 예컨데  머리두건이라든지 방언이라든지 혹은 거룩한(평화의) 입맞춤이라든지 하는 문제들에 고린도 상황을 반영하고자 하는 바울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고린도 교회 예배의 문제에 대해 사도바울과 다른 견해의 회신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사도바울은 그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여러 가지 예배 풍속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현실은 좀더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에 발생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두건을 쓰라고 하는 등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전통사회와 부딪히지 않고 신앙의 부작용을 최대한 막으려는 자유주의자를 향한 견제 등 또 자기가 세운 교회를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책임의식 등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지나친 견제를 던지게 한 것이 아닐까?

이 바울의 견제는 지금 현대의 교회에도 여지없이 작용하고 있다. 여성들의 지위가 남성들의 비해 현저한 차이가 나고 소수인 남성이 다수인 여성 앞에서 지배하고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수건을 써야만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유교적 사회에 걸맞게  우리교회의 여성의 지위는 잘도 장착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밥상공동체는 돈이 많이 들고 음식을 만들기 힘이 든다는 이유로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저 식당에서  한끼 떼우기식의 나눔 정도가 되었다. 이것  역시 사도 바울이 "집에서 밥 먹고 와"!라고 한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또 방언이나 예언은 어느덧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숨을 죽이다 못해 그만 사라져 가고 있다. 바울이 말한 '절제! 절제!'에서  온 문제가 아닐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라니?

지금 우리가 고린도 교회에 회답을 한다면 난 이렇게 쓸 것이다.(권오선 전도사의 의견)

첫째,  수건을 써야하는지 문제에 대해 : "수건이 우리의 자유를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누구든 원하는 데로 하십시오 쓰든 안쓰든, 단 쾌락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둘째, 애찬식 문제는? : "더욱 더 음식을  많이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껏 나눠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참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셋째, 방언과 예언의 문제는? : "마음껏 방언하고 예언하십시오 소리 외쳐 하십시오 그러나 싸우진 마십시오"
     
2) 한국 교회에 있어서의 시사점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의미에 대한 상실을 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예배란 개인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한 상태에서 절대자 앞에 나아가 그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된다. 여기서 우리가 개혁을  말함은 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함이 아니요 기독교에서의 참 개혁과 예배의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고자 함이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개혁을 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우리는 text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개혁을 말할 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예배의 모습을 찾아봐야 한다. 

성경을 비추어 볼 때 예배는  말씀 예전과 다락방 예전{{) 제 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이 구성되어서 예배형식을 어느정도 갖추기 시작했다.

  ☞ 말씀의 예전 1) 예언서, 서신, 복음서의 귀절 낭독, 2) 성서 귀절에 기초한 교훈과 권고, 3) 공동기도(연도의 형식으로 했을 것임), 4) 시편과 찬송

  ☞ 다락방 예전 1) 평화의 입맞춤, 2) 봉헌: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 성물을 들여오는 일, 3) 성별기도(창조, 섭리, 구원에 대한 감사) 4) 주의 고난의 기념(후에 아남네시스(anamnesis)로 알려짐), 5) 자기봉헌과  함께 헌금함, 6) 떡과 포도주의 선물을 축복하기 위한 말씀과 성령의  기원(후에 에피클레시스(epiclesis)로 알려짐), 7) 중재기도, 8)  회중의 아멘, 9) 성체 분할식, 10) 분병과 분간, 11) 집례자에 의한 해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다락방 예전에 대한 의미를 상실해 버린 채 말씀 예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에 몰입하고 있다. 그것도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승과는 다소 괴리된 채로 각 개교회의 신앙적 관점에서 제기된 예배의 풍속을 그저 습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제창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무엇인가? 좀더 원문의 의미를 살린다면  '성령과 진리의 예배'로 번역되어야 할 이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성령도  하나님이요, 진리도 하나님이다(진리=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장소도 시간도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 즉 삶 속에서의 예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전이요 교회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체적 삶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이러한 예배에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항상 강조되는데(조태연·차정식·유태연,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200-210)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고 예배의 예식을 형식적이고도 도식적인 것으로 전락시킨 결과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보는 중세의  종교 타락기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고  보면 종교 개혁 후 또  다시 성령의 임재의 부인과 더불어 습관적,  관습적인 예배가 성행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은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말하고 있는 예배는 그 교회적 상황에 충실하되 그리스도의 복음(약자와 빈자를 구제하는)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며, 그 예배적 본래 목적에  합당하도록 예배 드리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예배의 갱신 운동이 일어나고  잇음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도 또한, 일시적 유행처럼 번지고 잇는데  문제가 있으며, 개교회의 상황적 분석보다는 피상적인 정보에 의한 무분별한 적용의 문제점을 보이고 잇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예배 갱신이 또 다시 하나의 예배의 포맷만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성령님을 최대한 존중하고 도우심으로 예배하는 것이며 긍국적으로 삶으로써 예배를 드리는 일일 것이다.
  
  
롬 12:1b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권오선 전도사의 마지막 멘트 :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자유할 수  있는 기회가 무책임한 방종주의 자들에 의해 깨어질 수 없고  사도바울의 회신에 의해서도 빼앗길 순 없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예배,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예배, 지난날 다윗이 춤추다 바지가 다 내려갔던 것과 같은 자유함이 보장된 예배는 우리현대 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참 고  문 헌
  
  1. O. 쿨만, 이선희 옮김, 원시 기독교 예배, 대한기독교서회
  2. William D. Maxwell, 정장복 역,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쿰란출판사, 1998
  3. 로버트 웨버, 김지찬 역, 예배학,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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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6.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7. James F. White, 기독교 예배학 입문, 정장복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8. 차정식 공저,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9. DIDACHE(12사도의 가르침), 조병철 사역, 서울, 나단감리교회, 1993
  10. 정규남, 구약의 예배, KCM.
  11. 신학교재편찬위원회, 기독교회사, K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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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이희봉, 바울의 여성 이해, 서울신학대학원, 1994
  14. 유재인,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 이해, 서울신학대학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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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랄프 마틴, 초대교회예배, 오창윤 역, 은성출판사
  18. 신약성서, 대한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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