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7-21 17:30
[2]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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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965  

<제2장> 예수의 생애 개요

예수의 생애와 그 가르침은 신약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복음서들을 통해 전수되었다. 로마와 유대 역사서에 예수에 관한 간략한 정보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흔적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이 역사 자료들과 복음서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비교적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고, 신약성서를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신약성서의 대략적인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기원전 수 년 전에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이 때 로마 제국은 쌍두통치체제가 마감되고, 정적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일인통치시대를 시작한 직후였다. 팔레스틴은 로마의 분봉왕 헤롯이 다스렸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전국에 내려진 황제의 호구조사 명령에 따라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이미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으로 혼인 전에 임신을 한 아내 마리아는 이때 만삭의 몸이었다. 고향에 도착한 그들은 빈방을 얻지 못하여 마굿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고 이곳에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았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목동들과 동방에서 온 점성술사들의 방문,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도피한 것, 그곳에서 어느 정도 지내다가 귀국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12살 때 있었던 성전 방문 사건뿐이다. 예수는 요셉을 따라 목수의 일을 하며 청년기를 맞았다.

서른 살쯤 되었을 때 예수는 자신의 삶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이 때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으며 유대-사마리아 지역은 총독 필라투스(빌라도)가, 예수의 고향이 속해 있던 갈릴리 지방은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 유명한 광야 설교가요 세례운동가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한 후 사탄의 세 가지 의미있는 시험을 통과한 예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갈릴리 호수가의 가버나움에서 그의 선교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최초의 복음서라 인정된 마가복음서에는 요한이 잡힌 뒤에 비로소 시작된 예수의 최초의 선포가 기록되어 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장 15절; 표준새번역)

 

예수는 우선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자신의 제자로 불렀다. 이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자들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따라 특별한 제자단을 열두 명으로 확정하였다.

예수는 병자들을 고치는 이적을 통하여 당장 유명해졌다. 그는 소경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했으며, 문둥이를 고치는 등 그에게 오거나 데려 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었다. 바다에 이는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여 죽음의 위기에 몰린 제자들을 살려주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없는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기도 했다. 예수는 자신의 권위나 능력을 과시하거나 입증하기 위하여 기적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은 모두 그가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그런 종류의 이적들이었다. 중요한 점은 예수가 이적을 행할 때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믿음”은 이적의 조건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이적을 통하여, 예수를 특별한 사람 즉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 혹은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가 선포했던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는 가르침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이적은 그 증거였다. 예수의 소문은 순식간에 팔레스틴과 그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예수에게로 몰려들었다.

예수의 목적은 단순히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아니었다. 병을 고쳐줌으로써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벗겨주고 삶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 것이 예수의 활동이었다. 꺼져가던 민족의 운명 속에서 절망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다시 눈을 뜨며 새로운 꿈에 빠져들었다.

예수에 따르면 -이것은 구약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우주와 세상, 그리고 인생의 배후에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법칙과 질서를 주셨다. 세상은 사람들의 세상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세계였다. 인류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잠시 발을 붙이고 살다 가는 나그네였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토대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섬기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대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었다. 예수는 이적과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이 먹는 것, 입는 것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자극하고 요청했다.

예수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인생과 세상,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교였다. 사람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왕이시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시며 구원하신다. 그리고 의와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자라게 하시며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신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섬기며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그분의 신성한 계획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사역(使役)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설교했다. 예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자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자신의 삶을 새 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악과 사탄의 세계는 이제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는 인류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다. 이 새 시대에 사람들은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전쟁을 버리고 평화를, 폭력과 권위를 버리고 희생과 봉사를, 보복을 버리고 용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과 교훈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예수의 교훈과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호기심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제쳐놓은 예수의 활동에 강한 반발을 하였다. 유대인의 특권을 무시하는 것 같은 예수의 범세계적 사고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지 않는 지배자들과 그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 민족에게 꿈에도 그리던 해방과 자유를 선사하리라 기대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굶주림에서 해결한 이적은 사람들에게 이런 희망을 부풀리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였다.

 

오해의 와중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인식을 점점 달리했다. 처음에는 예수를 병을 고치는 의원이나 이적을 행하는 사람 정도로 혹은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곧 예수를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고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그 모든 정신과 내용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유대교의 뿌리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는 유대교와는 다른 독특한 종교로 탄생한 것이다.

예수의 공개적 사역은 삼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 동안 활동의 중심지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지역과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이와 함께 예수의 활동의 방향과 방법도 달라졌다. 예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보다는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모이는 것을 기다렸고, 전혀 모르는 군중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명백한 표현을 쓰기보다는 비유라는 형식으로 설교함으로써, 한 언어를 가지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자신을 믿지 않고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나 오해하는 사람들과 적대자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와 교훈에 대하여 더 알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삼 년이 끝날 즈음 예수의 활동이 유대인의 핵심부, 즉 예루살렘과 그곳에 세워진 성전으로 옮겨오면서 예수의 사역은 체제로부터의 집단적인 반발에 부딪쳤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도부는 예수가 그들의 전통과 기준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것 때문에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식일 법을 범하며 병자들을 고친다는 것이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다고 생각하였다. 유대 지도부가 예수를 반대한 배경에는 그들의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수백년간 유지해온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오래 동안 외부의 지배세력과 결탁해온 그들의 지도력과 지지기반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현실적인 힘에 기대어 사는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그들의 손에 조금 쥐어져 있었던 권력의 약화나 이탈을 더 크게 염려하였다.

결국 유대인 지도부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이중의 죄목을 적용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죄를 지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찬동할 수 있는 이유였다. 또 하나는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라고 선전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의 고위 관리인 총독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예수의 죽음의 이유였다. 유대 지도부는 예수를 한 밤중에 체포했다. 예수의 제자였던 유다가 배신하여 예수를 팔아 넘겼던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를 총독 빌라도 앞에 끌고 갔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부는 예수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소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게 했다. 한동안 예수에게서 해방과 자유와 이스라엘의 재건을 기대했던 군중은 용서와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외치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의 죽음을 원했다.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소요사건으로 인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자신을 제거할 구실을 주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요구한 십자가형이란 통상 로마 제국에서 반역자들에게 집행하는 사형 방식이었다. 대략 서기 30년 봄쯤에 예수는 죄 없는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이 박혀 있어 그의 죽음이 유대인들에게도, 당시 법을 중시하던 로마인들에게도 부적당한 것임을 말없이 항변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체포되던 그날 저녁에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먹으며 자신의 죽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요, 이것이 구약성서가 예언한 그 메시야의 길임을 설명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 그것은 죄인의 죄를 대신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적절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보도로 채워져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바위 무덤에 안치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 날은 일요일이었다- 군인들이 지키던 무덤은 비어 있었다. 시체에 향을 발라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려던 여인들이 시체가 아닌,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났다. 두려움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활동과 교훈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메시아(Messiah)’란 히브리어 단어와 같은 의미의 헬라어 ‘크리스토스(christos)’를 중국인들의 발음에 맞추어 ‘기독(基督)’으로 표기한 단어에 ‘교(敎)’자를 붙인 것이 ‘기독교’가 되었다.

 

  *‘기독교인’ 혹은 ‘기독인’(基督人)이란 본래 ‘그리스도인’이라는 성서적 표현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은 사도행전 11장 26절에 처음 나오는데, 어원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리스도인’을 ‘예수따르미’라고도 한다.

 

 

<제3장> 신약성서의 탄생

1. 초대교회의 성립과 신약문헌의 탄생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에 예수의 제자들은 다시 모였다. 부활한 예수는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특히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를 설명하고 하늘로 승천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50일이 되어 -이 날은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고 그들이 보고들은 예수의 활동과 교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자들이 전하던 내용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지시하던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실현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활동과 생애까지 이 ‘복음’의 내용으로 포함시켰다. 처음에 모였던 제자들의 수는 120명쯤이었으나 갑자기 그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열 두 제자들 특히 최초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 승천한 예수가 성령을 통하여 여전히 그들을 직접 지도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그 영향력 때문에 유대 지도부에 의한 공개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밖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 결과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 곳곳에 세워졌고, 서기 50년경 지금의 그리스 지역으로, 서기 60년경에는 로마 제국의 핵심부인 로마시와 이탈리아 반도로 기독교는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지중해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의 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후에 바울로 개명함- 개종하고 복음 전도자가 됨으로써 이런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현저한 공헌을 남겼다.

 

예수의 사역은 한마디로 말하면 “천국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허울뿐인 신정정치를 표방했던 당시 유대 땅에서 유대종교는 상류 지도자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일부 혁명주의자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예수는 권력과 제도에 의해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실현하였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선악 간에 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넓고도 크신 사랑을 몸소 보여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이 사역에 동참하기를 요청하였다. 그의 “천국운동”은 참으로 “나누어 먹는 현실”이었으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당”이었다. 그리하여 이 예수운동을 계승한 초대교회도 그 맥을 같이하는 모습이었다;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3-47절. 표준새번역)

 

기독교가 그 출발점에서부터 세계인의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은 「놀라운 소식(이야기)」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기독교는 「놀라운 사건(실천)」을 가지고 세계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다. 1세기 전반의 박해는 주로 기독교를 탄생시킨 유대인들로부터 가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기 후반부에서는 유대인의 박해는 줄어들고 그 대신 황제를 신으로 모시기를 촉구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강한 박해가 일어났다. 때로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어떤 이들은 삶에 애착심을 가지고 박해를 피하려고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거나 동료 기독교인들을 배반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적은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기독교 자체를 흔들어 놓는 소위 이단들이 출현했다. 예수에 대한 오해나 자의적인 해석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교회를 지도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대면했던 예수의 실제 제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은 목격자들 혹은 증인이란 이름으로 구별되었다. 서기 50년경 교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이들은 여러 곳의 모든 교회에 방문하여 직접적인 지도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편지라는 형식으로 간접적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에 답하며 교회를 지도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신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편지들이다. 대개 고대의 서간문 형식을 띤 이 편지들의 송신자는 편지의 내용이 그들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예수의 뜻임을 알린다. 그들은 예수의 몸된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 편지들을 보내고 있음을 확실하게 하려고 했다. 이 때 수신자들은 전도자들을 통해 이미 복음을 배웠고 알았고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다.

편지들보다는 조금 늦게 서기 70년경부터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에게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말로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몇 안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목격자들을 통해 예수의 활동과 교훈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믿는 예수가 어쩌면 그들이 살아 활동하는 동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책을 만들기보다는 전도자로 활동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만든다는 것이 당시에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왔다. 교회의 수는 점점 증가해 갔으나 목격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가게 되어 목격자들의 증언과 설교에 의존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동시에 구전(口傳)의 한계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은 전달의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목격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보고 들은 것 즉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보전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글이 전도와 교육, 예배에 획기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늘어나는 이단과 박해자들을 대항할 효과적인 자료가 필요했다는 사실도 마침내 복음서가 기록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며 또 재촉하였던 것이다.

 

 

2. 신약성서의 형성과 승인

 

1) 신약 문헌의 수집 과정

 

각 서신이 기록되어 교인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 교회는 한 권의 책을 가지게 되었다. 잠시 후 다른 교회에 다른 한 편지가 보내지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특정한 책을 가진 교회가 하나 둘 씩 늘어갔다. 교회 지도자들이 지명된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예배 시에 낭독되었고 교회 안팎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유사한 문제가 다른 교회에 발생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이웃 교회에 베껴 주기도 하고, 베껴가기도 하였다. 이런 필사과정을 통하여 한 편지 혹은 한 복음서의 많은 사본이 만들어지고 같은 책을 소유하는 교회가 늘어갔으며, 동시에 한 교회가 하나 이상의 책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7권의 책들이 자연스럽게 수집되었고 하나의 문집으로 완성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최후에 기록된 것은 2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27권의 책이 모두 모아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때로는, 지역에 따라서 현재 신약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 교회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책들을 우리는 ‘신약 외경’이라고 부른다. 신약성서 27권 중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어떤 것은 지역에 따라 교회가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책도 있었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대부분 기록되었던 시기부터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을 위하여 사용하던 책들이었다. 늦어도 3-4세기 사이에 외경은 거의 제외되었고, 27권만이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2) 복음서의 형성과 집성

 

복음은 우선 구두로 전달되었고,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직접 선포되었다. 그렇다면 복음서들이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형성과정을 거쳤을까? 아마도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까지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복음서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최초의 자료를 ‘Q자료’라고 불렀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말 ‘Quelle’를 줄인 것으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Q외에 ‘증빙서’라고 하는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 마태가 개별적으로 특별히 참고했던 자료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복음서가 기록된 이후에도 많은 복음서들이 교계에 나돌았지만, 4 복음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가 지닌 영향력과 가치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들이 신앙공동체의 마음에 들었다.”(Brueggemann)

 

2) 그 밖의 책의 수집

 

누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은 4복음이 따로 수집됨에 따라 분리되었다가, 복음서와 서신이 수집되던 중에 그 둘 사이를 연결을 지어주는 책으로 인정되었다. 공동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 것은 2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다. 묵시록(默示錄)들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으나, 2세기 후반 경에는 인기가 떨어져서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의 광범위한 수락을 받았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논쟁을 겪어야 했다. 실상 현대 교회에서도 여전히 그 책을 정경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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