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7-21 17:27
[1]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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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016  

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제1장 신약성서의 배경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구약성서가 완성된 이후 신약성서가 기록되기까지 약 사백년의 역사와 신약성서가 다루고 있는 시대와 장소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1. 역사적, 정치적 배경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모든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국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좌절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야훼를 믿는 전통과 신앙에 기초한 미래의 희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신앙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율법을 편찬하고 준수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였다. 이 움직임을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고 부른다. ‘메시야(Messiah)’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구약성서에서 왕이나 제사장에게 ‘기름부어’ 임직(任職)하게 하였던 전통에서 유래하는데, ‘민족을 구원해 줄 임무를 띤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제국이 무너지고 페르시아 제국이 수립되었을 때 잡혀간 유대인 중 일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수리하고 다시 쌓으며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독립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인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었지만, 적지 않은 세금을 지배자들에게 바쳐야 했고, 군사적으로 무장할 수는 없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점점 큰 꿈으로 부풀어갔다.

기원전 332년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대 헬라(Greece) 제국을 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이외에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이 상황은 예수 시대까지 계속된다. 헬라 풍의 도시 문화와 오락, 군사 문화가 팔레스틴에도 파급되었다.

기원전 175년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땅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티오커스 대왕은 이스라엘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지역을 강력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에 기원전 167년 맛다디아라 불리우는 한 시골 제사장이 중심이 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64년 가시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음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인 독립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42년 유대인들은 세금 면제의 혜택을 받았고, 기원전 104년 드디어 왕이란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스몬 혹은 마카비(Maccabees) 왕가가 탄생한 것이다.

 

마카비 가문이 쟁취한 이 정치적 독립은 메시야 대망 사상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을 낳았다. 이 사건을 그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에,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한 메시야 대망 사상은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조건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다윗 왕의 후예가 아니라 마카비 가문 출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현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현실을 메시야 대망의 꿈이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더 절박한 민족적 희망으로 계속 자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64년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왕위 승계 문제로 첨예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었던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로마군이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 이상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방인 출신의 헤롯 가문을 ‘유대인의 왕’으로 등장시켰다. 이 후 종교적으로는 유대인 대제사장이, 정치적으로는 헤롯 가문이, 군사적으로는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시저가 살해당한 후 로마의 쌍두 통치 체제를 형성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헤롯 대왕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대왕은 한 때 쫓겨나기도 했지만 이 두 친구들과 로마 군대의 도움으로 기원전 37년부터는 확고하게 유대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야(헬라어로 ‘그리스도’)의 출현을 불안해하면서 늘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존경심을 살 만한 인물은 가차없이 살해하는 한 편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들이 존경하던 마카비 가문의 한 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했다. 그가 거금을 들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수리, 증축한 것도 이런 정황에서 비롯된 사업이었다.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병으로 죽자 그가 다스리던 팔레스틴은 크게 셋으로 분할되었고 로마 원로원에 의해 헤롯 대왕의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팔레스틴의 노른자에 속하는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은 아켈라오스라는 아들이 상속받았으나, 그는 서기 6년경 폐위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는 로마 황제가 직접 총독을 파송하는 황제 소유영(所有領)의 총독 정치가 시작되었고 치안을 위해 황제의 근위대가 파견되었다.

서기 26년에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로마의 군대를 앞세운 완고한 군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로마의 법과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나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했다. 필라투스를 임명한 사람은 당시 황실의 근위대장이었던 세자누스였는데 그는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강력한 정적이기도 했다. 서기 31년 세자누스가 반역모의로 처형당한 후부터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자누스와 관련있는 인물들을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 필라투스 총독의 임기 후반기는 이렇게 지지기반을 잃은 지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리우스 시저의 지중해 통일 이후 다른 민족들보다는 비교적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통일을 결정지은 알렉산드리아의 전투에서 유대인들이 율리우스 시저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립국가를 형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계속되는 강대국의 지배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이방인들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한 편으로는 현실적 절망감이, 다른 한 편으로는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점점 커가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감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때로는 무기를 들고 지배국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기 65년 유대인들 중 과격한 일부 열심당원들이 무기를 들고 로마에 대항하여 잠시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하지만, 서기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대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산산이 파괴되었다. 그 후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서기 135년경 다시 한 번 거국적으로 모여 군사 행동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기까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 특히 예루살렘 부근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고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사라져 갔지만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한 민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범세계적 종교로 인식되었다. 예수의 생애와 활동이 그 전환기 역할을 했다. 서기 70년의 유대 민족의 몰락은 유대 사회의 마지막을 의미하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세계 종교로 도약하는 획기적인 전기였다. 기독교의 세계적인 색채는 사실 구약성서에도 폭넓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유대 사회가 한 민족 사회로 자리잡고 있는 동안 그들의 고유 신앙인 것처럼 인식되었을 뿐이다.

 

 

2. 사회-문화적 배경

 

1)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틴의 사회-문화적 분위기

 

예수님과 기독교의 탄생은 아무런 사회적 배경이 없는 문화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와 그의 사역, 그리고 그의 사역의 결과로서 생겨난 원시(原始) 그리스도교는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틴의 특수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의 본질 그리고 초대교회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틴의 정황(情況)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의 전체 인구는 150만-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유대인은 50만-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틴의 남부인 유대지역에 살았으며, 수도 예루살렘의 인구는 수만에 불과했다. 예수께서 ‘천국운동’*의 대부분을 보낸 갈릴리 지역은 비유대인들이 유대인들보다도 훨씬 많이 살았기 때문에 종종 “이방인들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 사9:1, 마4:15)라 불리었다.

 

  *예수의 사역(전도사업)을 「천국운동」이라 부르기로 한다. 천국운동은 성서- 성경의 주제이며, 성서-성경의 종교가 지향(指向)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 로마 제국의 변방인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의 총독이 관할하는 속령(屬領)이었지만, 곳곳에서 발생했던 반란들을 보면, 정치적 및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유대 사회에 만연한 ‘메시야 대망 사상’이 그것을 반증하는바,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부와 권력을 움켜쥔 일부 상류층과 이름뿐인 신정정치를 표방하고 성전제도에 매달려 군림하는 종교지도층은 그 시대와 그 정황을 환영했겠지만, 대부분의 유대의 민초(民草)들*은 가지가지로 수탈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도리 없이 받아들이는 형편이었다.

 

  *당시 인구의 9할이 넘는 “땅의 백성들(am ha-ars)”을 말한다. 예수가 천국운동을 벌여나가면서 함께 했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요7:49)”들이다.

 

 

2) 예수 시대의 유대 사회의 제 당파들

 

신약성서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 헤롯당 등의 다양한 분파들이 서로 경쟁하며 또 때로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 바리새파 사람들(Pharisees)

이들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해 보다 엄격한 해석과 실천을 내세우던 “하시딤”(경건한 자들) 학파에 속하던 사람들이다. 소수였던 이들은 대다수인 유다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며, 모세의 율법을 모르며 그것을 엄수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하고 적대시하였다. ‘분리된 자들’이라는 의미가 있는 ‘바리새’라는 말이 그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바리새’는 성서에 95회나 나오는데, 이들은 대부분 예수님과 격렬히 대적하는 자로 등장한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으며, 이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내세의 보상과 징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들은 운명론자(예정론자)였다. 세상만사는 운명(예정)과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2) 사두개파 사람들(Sadducees)

이들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에 있었던 유다교의 한 당파이다. 그들은 솔로몬 시대 제사장 사독(Zadok)의 후예로서 보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상류 계급이다. 전에 셀류커스 왕조에 의한 팔레스틴의 헬라화 작업에서 외세와 거래함으로써 세력을 키워온 대제사장들의 후예였던 그들은 마카비에 의해 변절자요 배반자로 낙인찍히기도 하였다(마카베오 상1:15). 이들은 율법 연구와 그 엄격한 준수를 목표로 하는 중산층 바리새파와는 반대로, 정치적 권력이 신장됨으로 종교적 관심을 약화시킨 유대의 지주였고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중시하였고, 죽은 자의 부활, 영혼과 천사들의 존재 등은 부정하였다(행 23:8; 4:1-2). 복음서에 기록된 대제사장들이란 이들 종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3) 에세네(Essenes)파 사람들

 

신약성서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이 에세네파는 아마도 ‘하시딤’에 뿌리를 둔 것 같은데, 바리새파보다도 율법에 더 엄격했다. 그들은 대부분 결혼도 하지 않고, 재산을 공유하며 동굴 등에서 기도와 경전연구에 몰두하는 공동생활을 하였다. 예루살렘 제의와 예배는 타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에 의해 기록되고 보존되던 경전인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이 20세기 중반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유대교와 성서연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절제와 금욕을 실천하며 임박한 종말을 믿었던 에세네파 공동체는 제1차 유대전쟁의 패전과 함께 사라졌다.

 

(4) 열심당(Zealots) 혹은 혁명당원들

열심당(熱心黨)은 혁명당원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유대 민족의 자주독립에 ‘열심인 사람들’ 말한다. 열심당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외세에 협력하는 동족 유대인도 가차 없이 살해하였다. 그들은 항상 칼을 품고 다녔으므로 자객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다(행 21:38 참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열심당은 주후 6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리 사람 유다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한다(행5:37 참조). 요세푸스는 그들을 당시 유대교의 3대 분파였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에 이은 제4의 당파라고 불렀으며, 주후 66~70년 동안의 제1차 로마반란을 선동한 폭도라고 규정하였다. 이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주도하여 마사다(Masada) 요새에서 3년간 버티다가 전멸하였다.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시몬이 열심당원이었다(눅 6:15 참조).

 

기원 1세기 유대 사회에 각기 영향을 끼치던 여러 당파들은 알렉산더 이후 시작된 헬라화(Hellenization)에 대한 반동으로 출생하였다. 헬라화에 대한 찬반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서 그들의 입장은 각기 달랐다. 신약성서에는 위에 열거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에세네파 말고도 헤롯당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헤롯당은 어떤 정해진 분파가 아니고 헤롯 왕가를 지지하며 그에 기대어 사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틴 안팎의 종교적 배경

 

예수사건(예수운동)은 팔레스틴 내에서만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 운동을 계승한 초대교회(원시기독교)는 팔레스틴 즉 유대 땅을 넘어서 로마의 세계로 재빠르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재빠른 확장의 과정과 결과로서 지금 우리들이 신약성서라는 이름으로 읽고 있는 문서들을 생산해 내었다. 신약성서의 문헌들은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로마세계의 배경 하에서 기록된 것이다.

 

(1)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예배의 종말 그리고 그 평가

 

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하나님 예배의 “가시적인” 구심점이었다. 주전 10세기에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되었던 제1성전은 주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침공 때 무너졌고, 고레스의 칙령으로 주전 515년에 복구된 제2성전은 제1성전에 비해 규모와 웅장함이 덜했다(스3:12). 그래서 헤롯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주공사는 십년에 걸쳐 완결하였지만, 이 헤롯성전의 재건사업은 기원후 6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헤롯성전마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에 의해 그야말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막13:2)”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마12:4; 23:17,21),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셨다(막11:17). 예수님은 성전을 향한(성전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그의 열심을 성전정화를 통해 보여주셨고(요2:13-17), 마침내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시기도 하였다(막13:2). 초대교회에서도 관습적인 성전예배는 계속되었다(행2:43, 3:1이하). 그러나 새로운 ‘영적 종교’는 과거의 ‘물적 종교’에 연연할 수 없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였던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영적 종교)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라는 물리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이제 「예수 따르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했다(고전3:16)

 

(2) 기원후 1세기의 로마세계에서의 종교적 사상적 상황

알렉산더 대제 이후로 그의 후계자들도 그의 세계융합주의 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에 헬라화는 전 유럽세계로 확장되었다. 그리이스의 뒤를 이어 세계 제국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의 세계에서도 헬레니즘(Hellenism)은 모든 도시들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로마 시대의 어느 도시든지 전세계로부터 유입된 사상들의 교환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발흥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본래 예수운동은 팔레스틴의 시골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지방의 유대 전통에 근원을 둔 많은 사상들을 간직하였다. 그러나 <예수운동이 그리스도교화>*하여 로마의 넓은 세계로 나온 마당에는 유대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 신앙운동은 헬레니즘적 사상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고 점차 헬레니즘적 사상으로 동화되고 개조되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선포하던 분이 선포되는 분으로 되었다”라고 한다. 예수는 본래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는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이스-로마 시대의 상류 지식층은 전통적인 종교를 버리고 대신 스토아(Stoa) 철학 등 철학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세상과 자연과 인간이 신적인 이성, 즉 로고스(Logos)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 로고스 사상도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에 유입되었다. 또한 이때 유행한 플라톤(Platon)적인 이원론에서 강조하는 영혼의 불멸, 가시적인 지상적 영역이 천상적인 영역의 그림자라는 것들은 신약성서에 반영되어 있다. ‘개’(kyon)라는 말에서 유래한 견유학파(Cynicism)는 “방랑설교자”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들은 세속적인 쾌락과 사회적 제도들을 거부하고 아주 검소한 구도자적인 삶을 살면서 길거리에서 가르치기를 즐겨하였는데, 학자들은 이런 “방랑설교자”들과 사도행전의 복음전도자들과의 유사성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민들은 동방에서 유래된, 신비적 의식(儀式)이 가미된 감정적 종교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조로아스터(Zoroaster)교의 분파인 미트라교는 광명의 신 미트라(Mithra)를 신앙한 밀의(密儀) 종교로 윤리적이면서도 내세에서의 구원을 보장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전파되어 있었다.

 

(3) 디아스포라 유다교와 70인역

 

전술한 바와 같이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에는 50-60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인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로부터 바빌론은 물론 동부 지중해 도시들 전체에 퍼져 있었다. 유대인들의 대규모 해외 정착은 바빌론 포로 때에 시작되었다. 고레스의 귀환 칙령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이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작이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도, 패전의 상처로 황폐된 팔레스틴 땅에서의 살림이 어려웠던 많은 유대인들은, 더 나은 정착지를 찾아 유대 땅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른다.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타지(他地)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대체로 조상 전래의 신앙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제의적 종교생활은 불가능하여, 회당(Synagogue)*이라는 공동 집회처를 만들어 책 즉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점차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주전 3세기 경,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를 형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세계의 언어인 그리이스어(koine)로 사용했기 때문에 조상들의 성서인 히브리어 성서를 읽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이스어로 번역하기를 원했으며 그 결과로 탄생된 성서가 희랍어 성서인 70인역(LXX; Septuagint)이다.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 Canon)이라고도 불린다.

 

  *후에 초기기독교는 대부분 이‘회당’을 통하여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물론 이 성서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와는 여러 모로 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구약성서가 ‘생성중’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희랍어 번역인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 Canon)은 이집트 프톨레미 왕(기원전 282-246년)의 명령으로 70여 명의 유다인 학자들(장로들)에 의해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전설 때문에 70인역(LXX)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70인역은 오경이 기원전 250년경에, 역사서와 예언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시서와 지혜서 및 기타 책들은 기원전 100년경에 번역됨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70인역에는 히브리성서(MT)*에 없는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외경(外經)이라고 부르는 부분 즉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 상.하권의 일곱 권과 다니엘서 일부(3:24~90,13~14장), 에스델서 일부(10:4~16:24) 등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구약성서는 AD 500년까지 완벽한 모음체계가 없었고 본문은 유동적이었다. 주후 600-950년에 이르러 마소라(Masoretes)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완전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고안해내었으며, 본문을 표준화시키기도 하였다. 이 결과를 마소라 사본(Masoretic Text; MT)라고 한다.

 

본래 외경까지 포함하고 있는 70인역은 헬라적 유대교의 경전뿐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의 경전이었다.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성서 외경이 구약성서나 다름없이 인용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고전2:9, 눅11:49, 요한7:38, 엡5:14, 약4:5~6, 유14~15). 유대교와의 갈등 속에서 계속 성장한 초대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 구약성서에 더 의존하게 되고 그것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자, 유대교는 70인역을 버리게 되었다. 제롬과 그 이후의 몇몇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우수성을 주장했으나 카톨릭교회(천주교회)는 실제로 70인역을 따랐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히브리어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된 불가타성서(Vulgate; 라틴어 번역)에 70인역의 외경을 포함시켜 공인성서로 인정함으로써 70인역을 포함한 모든 책들을 경전으로 인정한 결과가 되었다. 개신교는 카톨릭교회와 갈라지면서 70인역 구약성서를 버리고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택했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서 읽혀지던 외경은 개신교의 경전 밖으로 축출당했다*.

 

  *오늘날 개신교의 구약성서의 범위와 구조의 문제는 커다란 신학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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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7 [5]초보자를 위한 열단계 기독교 교리 웹섬김이 07-29 2993
2166 [4]초보자를 위한 열단계 기독교 교리 웹섬김이 07-29 3039
2165 [3]초보자를 위한 열단계 기독교 교리 웹섬김이 07-29 2874
2164 [2]초보자를 위한 열단계 기독교 교리 웹섬김이 07-29 3077
2163 [1]초보자를 위한 열단계 기독교 교리 웹섬김이 07-29 3509
2162 성경이 사실임을 증거하는 12가지 증거 웹섬김이 07-28 3136
2161 예정과 자유의지의 성격의 규명 웹섬김이 07-28 3871
2160 교회에 잠입한 신XX 구별하기 웹섬김이 07-21 3045
2159 교회성장을 돕는 5가지 요인 웹섬김이 07-21 2986
2158 [인물강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웹섬김이 07-21 3581
2157 [3]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웹섬김이 07-21 3634
2156 [2]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웹섬김이 07-21 2965
2155 [1]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웹섬김이 07-21 4017
2154 [인물강해]/ 바돌로매 웹섬김이 07-21 3664
2153 구약성경의 배열순서의 원리 웹섬김이 07-21 7755
2152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지 말아야 할 12가지 웹섬김이 07-15 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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