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4-29 21:20
[2]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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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320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이단 사상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Systematic Theology, I, p. 3).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 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Ibid., I, pp. 134, 135).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Ibid., I, p. 141).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Ibid., I, p. 11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Ibid., I, p. 3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Ibid., I, p. 35).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不)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 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Ibid., I, p. 158).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Ibid., I, p. 5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Ibid., I, p. 20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Ibid., I, p. 237).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Ibid., I, p. 245).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Ibid., I, p.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p.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p.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p. 174).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Ibid., III, p. 284).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Ibid., I, p. 252).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 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Ibid., I, p. 263).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超)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Ibid., II, p. 40).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Ibid., I, p. 116).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Ibid., I, p. 267).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 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Ibid., II, p. 29).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Ibid., II, p. 94). ('역설적'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바른'이라는 뜻임.)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Ibid., II, p. 109).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Ibid., II, p. 10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Ibid., II, p. 131).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Ibid., II, p. 17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Ibid., II, p. 153).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蓋然的)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p. 15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probability)--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Ibid., II, p. 155).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Ibid., II, p. 16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Ibid., II, p.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p. 409).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Ibid., II, p. 78).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p. 418).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의 이단 사상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內面性)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67], p. 15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Ibid., pp. 196, 197).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Ibid., p. 199).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Ibid., p. 153).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Ibid., p. 153).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분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Ibid., p. 156).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the thing itself)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 181).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Ibid., p. 185).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Ibid., p. 186).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p. 210).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이브,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숴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Ibid., p. 65).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Letters from Prison, p. 20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 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Ibid., p. 211).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1955],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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