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4-29 21:18
[1]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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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699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

 

칼 바르트(Karl Barth)의 이단 사상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i. p. 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p.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Ibid., IV, i, p. 508).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Ibid., pp. 29, 30)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Ibid., III. 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i.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Ibid., p. 62).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대한기독교서회>, 89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년 3월 30일, 9쪽).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씨 에취 다드(C. H. Dodd)의 이단 사상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Gos- pel, p. 297).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 thority of the Bible, p. 14).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Ibid., p. 16).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Ibid.,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Ibid., p. 24).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Ibid., p. 7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Ibid.,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이단 사상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93).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Beyond Tragedy, p. 3).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Ibid., p. 7).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 반대론(obscurantism)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Ibid., p. 10).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Ibid., p. 1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Ibid., p. 13).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Ibid., p. 1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Ibid.,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Ibid., p. 29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Ibid., p. 21).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dy, p. 290).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이단 사상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6).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Ibid., I, p. 27).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The Gospel of John, p. 1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Ibid., p. 28).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Ibid., p. 49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Testament, I, p. 50).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 ofJohn, pp. 118, 119).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여하튼, 아주 초대 교회는, 비록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Ibid., I, p. 51).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Ibid.,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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