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8-02 10:23
종말론의 올바른 해석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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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027  

종말론의 올바른 해석 방향

 

 

1. 생활 속의 종말론

 

종말론은 생활 속에 녹아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바울은 사람의 죽음인 개인적 종말에 대해서도 말하고 주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일반적 종말(우주적 종말)에 대해서도 말한다.(살전 5:1-5) 그리고 모두가 조바심과 두려움을 갖고 있는 재림의 날에 대해서 믿는 자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그날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살전 5:2) 종말이 바울의 생활 속에 접목되어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적시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매 순간은 종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표리관계에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말하는 종말론은 영생을 지키고 더 나아가 영생을 쟁취하는 노력을 하게 한다는 종말론의 궁극적인 당위, 즉 종말론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성경적 종말론과는 거리가 먼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종말론을 연구하여 갑론을박한다면 저들이 말하는 수다한 이론 속에 빠져 들어가 쓸데없이 혼잡한 미로를 헤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종말론은 조물주, 즉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 세계가 움직인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종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선악과에 손을 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지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서 뱀의 유혹과 인간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인간의 죽음은 곧 피조물의 끝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오염된 피조세계를 회복시켜야 하는 일이 생기면서 종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의 연구에 있어서 창조와 타락,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종말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영의 실재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는 것, 즉 피조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터를 잡고 종말론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론가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영의 실재인 하나님에 의해서 종말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지 못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지적추론에 의해서 이론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우주적 종말, 즉 일반적인 종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우주적 종말, 즉 일반적 종말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마태복음 24장) 즉, 인간 세상의 끝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고 각 사건의 배후에서 영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배후 세력에 대한 심판이 곧 종말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배후 세력을 분명하게 거론하고 이들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계 20:11)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사건들을 보면 기획은 하늘에서 하고 그 결과는 땅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묵시록의 패턴이다. 이 패턴을 이해하지 못하면 종말의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종말은 인간의 행동과 그 행동을 결정하는 악한 영들에 대한 분별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지적인 추론만을 가지고는 그 실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단서를 얻곤 하는데, 과거의 사건이 선과 악의 대결에서 얻어진 영적 전쟁의 결과라는 점에서 이런 접근 방법은 옳다고 본다. 만약 선과 악의 대결에서 얻어진 영적 결과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결과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항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삼상 17:47)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접근해야 한다. 처음부터 실패한 인간의 손에 종말이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지적 추론이 설득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종말론은 철저하게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야 하고 영적인 분별과 계시에 의해서 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종말을 향해 가는 존재이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각주참조) 결국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인간의 종말은 악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종말론은 악의 실체를 인정한다. 악의 실체가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정치권력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이 오염된 세상, 즉 세상의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종말론의 연구는 이 세상의 정치권력의 구조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배후 세력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구의 종말론 학자들이 세상의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움직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에서 인간들을 경악하게 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곧 종말을 연구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종말이 세상의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 징후가 드러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종말론은 우리 생활 속에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관찰되어야 하고 영생을 지키는 역할을 하여야만 바울이 말하는 생활 속의 종말과 연결될 수 있다. 바울은 종말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서신 속에서 필요에 따라 설명할 뿐이다.

 

이렇게 종말을 별도로 분리해서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악의 실체가 세상을 지배하고 그 악을 응징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종말의 과정이라는 것을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암시한다. 따라서 악이 지배하는 세상의 표적이나 그 세계를 응징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일하심이 믿는 자들의 생활 속에서 감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렇게 감지되는 징후들이 성경의 내용과 어떻게 맞물리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종말론을 해석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 세상의 종말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2. 종말론 해석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위치

 

구약시대의 역사, 구약성경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박해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대가를 치를 때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적 사건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종말론을 해석할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만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렸다는 식의 논지를 펼치는 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이들의 주장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즉 초림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지도자를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소출을 가져올 민족에게 주리라.”(마 21:43)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배척하고 못 박아 죽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는”(살전 2:16) 위치로 전락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기화로 유대주의 전반적인 체제가 폐지되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각주참조)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다스리는 공식적이고 신뢰할만한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 한 민족의 수종隨從을 받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전천년설의 주장에 대해서 유대 백성들이 세계 다른 모든 백성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더 받는다는 것과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거짓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난한다.(각주참조) 또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 이방인을 불문하고 구원의 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히 복을 받을 사유는 없어졌다고 주장한다.(각주참조)

 

그렇다면, 정말 저들의 주장대로 유대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것인가?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 다를 것이 없다는 뉘앙스이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앞으로 유대인에게서 특별한 사명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은 종말론을 유대인을 제외하고도 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 지엽적인 견해이다. 종말은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민으로 시작해서 천년왕국 직전에 있는 아마겟돈 전쟁까지 이스라엘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유대인은 영원한 선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대인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루살렘의 파괴와 성전이 파괴된 사실을 놓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증거라고 주장하는 반유대적인 대체신학의 견해이다. 대체신학은 유대인이 다시는 선택된 민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은 장자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민족은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 아니고 이방인들과 같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이 옳은지 성경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35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태양을 낮의 빛으로 주고 달과 별의 법칙들을 밤의 빛으로 주었으며 파도가 소리칠 때 그 바다를 나누었도다.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라. 36 주가 말하노라. 만일 그러한 법칙들이 내 앞을 떠난다면 그 때는 이스라엘의 씨도 내 앞에서 민족이 되는 것에서 영원히 끊어지리라”(렘 31:35-36) [한글킹]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우주에 걸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태양이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고 달과 별도 빛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지금도 태양은 빛을 발하고 있고 파도소리도 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셨다면 그들의 책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인식일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도 우리 손에 있다.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자들에게 대체신학은 유대인들을 연구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고 성경을 연구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대체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 분별력을 상실한 자들이 주장하는 학문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궤변들로 인해서 분별력이 없는 많은 양들이 실족하고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거짓신앙의 폐해가 무엇인지를 바로 보고 거짓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궤변들에 의해서 구약 성경이 무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은 저버리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시면 태양은 빛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다. 성경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유대인의 책이다. 기록자가 이방인인 경우는 66권 가운데 단 한 권도 없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보시는 시각은 아주 각별하고 독특하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영원을 약속하신 나라이다.(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 회복 시리즈 제6권 ⌜신앙의 진단과 쟁점⌟ 07. 신앙의 진단 6 -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걸쳐 지킬지니라를 참조하라.)

 

유대 민족이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 중심에 서있는 유대 민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이 메시아를 거부한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유대인 대다수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사건까지 그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는 성경의 기록을 다시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강퍅하게 하시는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유대인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끝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민족이다. 성경적 종말을 올바른 방향으로 풀어가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보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요 4:22) 구원의 중심에 유대인들이 있다는 것을 저버리고 종말론은 논한다면 그 방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마 5:18) 종말이 진행되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유대 민족이 있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고 유대 민족을 중심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종말은 예측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유대인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배제하는 자들의 영적 배경을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을 위한 권면 - 종말론을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가

 

종말론에 접근할 때 어떤 방법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가, 그 방법론을 논하지 않으면 종말론의 해석은 이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분야이다. 종말론이 어렵다면 무식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같이 배우지 못한 자들이었고 세상적인 표현으로 무식한 자들이었지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았다. 지금의 종말론이 어려운 이유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의 이론들을 성경의 내용인 것 마냥 해석하여 20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견고한 진들을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 수다한 이론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다한 이론이 난무하는 가운데 올바른 종말론의 접근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저들이 말하는 소위 전문가라는 자들도 그 분별이 어려울 만큼 지금의 종말론은 난장판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시를 따르지 않으면 풀 수 없는 요한계시록이 계시를 모르는 자들에 의해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생각으로 풀어져 왔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종말론을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지 그 해석의 기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요한계시록은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종말론의 접근은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많은 파열음을 낸다. “종말론의 접근은 성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요한계시록보다도 다른 성경의 본문 가운데 종말에 대해서 언급된 내용을(마태복음 24장과 같이) 요한계시록의 본문과 비교 분석하여 그 감추어져 있는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이 될 때 많은 곡절이 있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도 요한계시록을 둘러싼 의심은 끊이지 않는다.(각주참조) 심지어 종교 개혁자들인 칼빈과 루터도 요한계시록을 의심하였고 다른 서신서들보다 아래에 두었다. 요한계시록이 정경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을 제시하고 의심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의심이 끊이지 않았던 유는 요한계시록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종말론을 해석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론의 접근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다른 본문의 내용에서 언급된 종말에 관한 내용을 요한계시록과 연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다른 성경 본문의 내용(종말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과 대조하여 접근하지 않으면 이단이나 광신자들이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성경을 악용하는 전철을 밟게 된다. 이런 이유로 종말론을 다루는 요한계시록을 다룰 때는 종말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 본문과 대조하여 종말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상력은 다방면에 영향을 미쳐 왔다.(각주참조) 그러나 이 무한한 상상력은 균형을 잃으면 기괴한 상상력으로 돌변하게 되는데,(각주참조) 순기능보다 역기능으로 나타날 때는 사회적인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 상상력들은 사이비 메시아를 만들어 내어 집단 자살을 주도하기도 하고,(각주참조) 적그리스도로 교황이나 프리메이슨의 수장을 지목하는 등 불확실한 사실을 마치 결정된 것과 같이 말하게 하여 심각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이 상상력에 대하여 적극적인 성향을 띠어도 문제가 되지만 소극적인 성향을 띠어도 문제가 된다. 적극적인 성향은 광신 쪽으로 기울고 소극적인 성향은 요한계시록을 외면하는 쪽으로 기울어서 구원의 과정을 소홀히 하여 실족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요한계시록을 설교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종말론을 성경을 근거로 접근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종말론을 성경을 근거로 접근하지 않고 개인의 계시에 의존하거나 바코드나 베리칩 등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것을 마치 성경의 일인 것같이 말하면서 사회적인 현상에 의존할 경우, 이것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본문과는 다르게 해석되어 휴거의 후유증과 같은 많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성경의 내용과 동떨어진 기괴한 상상력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을 성경 본문의 내용(종말에 관해 언급된 내용들)과 대조하여 접근해야 할 것이다.

 

2. 성경의 본문은 자구적字句的 해석을 원칙으로 접근해야 한다

 

종말론은 어떤 성경의 구절보다도 자구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옳다. 지나치게 상징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비유는 비유대로 이해하면 되고 상징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상징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뼈대를 잘못 이해하여 구조적 흠결에서 나타나는 논리 모순에 의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 하나의 예가 요한계시록에서 거론된 지명이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각주참조) 이러한 해석은 대단히 위험하다. 성경에는 많은 지명地名이 나온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명은 실재 장소이고 상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없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지명이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어 다르게 변경될 수는 있을지라도 지명이 상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지명이 상징으로 되어 있다면 성경은 허구가 되고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아마겟돈Armageddon’은 ‘므깃도Megiddo’를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고,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마곡Magog’이라는 지역은 에스겔서 38장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이 아니라 실재 장소인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오는 지명을 다른 곳에서는 실재 장소로 이해하면서 요한계시록에서만 상징으로 이해한다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성경은 자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석이다. 정석을 비틀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정석을 비틀면 정석 이외의 수가 나오는데 그것은 속임수이다. 마찬가지로 천년왕국은 천년왕국이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석이다.(자세한 것은 09-1-2. 천 년이라는 숫자와 천년왕국의 사실 여부를 참조하라.) 천년왕국을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비틀어서 이해하면 종말론은 미궁으로 빠진다. 성경을 자구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발견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적인 방법은 자구적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배우는 것이다.

 

3. 종말론은 신학의 이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본문은 자구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지만 자구적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계 1:1)로 시작한다.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증거하였다.(계 1:2)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다 기록한 책이다. 즉,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경은 사사로이 푸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벧후 1:20)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계시로 배울 때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계시록을 해석하는 자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을 인간의 지식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계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요한계시록은 계시를 풀기 위해서 계시를 필요로 하는 책이다. 그런데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계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음성이 모두 성경에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계시록을 풀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천사를 보내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면서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책이다. 즉, 직접 음성과 환상으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계시록을 푸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음성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환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을 통해서만, 즉 계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을 계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 풀고 있다는 것이다. 애를 낳아보지 않은 자들이 애를 낳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은 우매함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계시를 이해하였다면, 그리고 계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와 계시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을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이것이 지금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실상이다. 이들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가짜 복음을 들고 진짜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풀어내는 종말론, 이렇게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풀어낸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해석사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의 역사가 대부분 비극으로 막을 내린 이유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잘못된 해석이 주된 원인이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계시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헬라어 원본 자체가 계시가 아니고는 풀 수 없는, 비문법적인 조잡한 문장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게리 윌스Garry Wills의 글을 보면, 요한계시록은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Kai그리고'를 사용해서 단순하게 연결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니체Nietzsche의 말을 빌려서 만약 하나님이 신약성서를 작성했다면 하나님은 분명 놀라울 만큼 그리스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문장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구절들을 지루할 만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X가 말하기를 ... 그리고 Y가 말하기를 ... 그리고 X가 말하기를 ...”이라는 식으로 문장이 단순하게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다.(각주참조)

 

이런 글들을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을 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계시에 의존하지 않으면 풀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한다. 경은 사사로이 푸는 것이 아니다.(벧후 1:20)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계시로 배울 때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시가 성경의 내용과 어긋나지 않을 때 올바른 해석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이론적 추론에 터 잡아 종말론을 접근한다면 아무리 탁월한 학자라 할지라도 종말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를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

 

4. 종말론의 해석은 성경 본문이 멈춘 곳에서 멈춰야 한다

 

종말론은 더하거나 빼면 안 된다. 이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계 22:18~19 종말론을 논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지금의 종말론 논쟁은 이미 그 도를 넘었다. 종말론을 거론한 책들을 보면 유추 해석이나 확대 해석이 도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경고의 선을 넘은 것이 대부분이다.

 

종말론은 구조상 많은 질문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거의 모든 곳에서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어느 부분에서 논리적 추론이 단절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 부분은 성경을 읽는 자들이 믿음으로 연결시켜야 하는 믿음의 영역이다.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유추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말하는 것은 분명하게 문제를 일으키고 성경의 경고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회복시리즈 09. 성경적 종말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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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 [3]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 웹섬김이 10-18 2909
2214 [2]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 웹섬김이 10-18 3058
2213 [1]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 웹섬김이 10-18 3211
2212 원죄의 본질과 정의 웹섬김이 10-18 2859
2211 십계명 비교(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웹섬김이 09-30 3323
2210 심판의 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웹섬김이 09-30 2852
2209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진짜 이유 웹섬김이 09-30 3029
2208 성적 타락을 피하고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6… 웹섬김이 09-30 2785
2207 [2]종말에 관계된 성구 웹섬김이 09-27 2469
2206 [1]종말과 관계된 성구 웹섬김이 09-27 2707
2205 신약 27권 성경순서 및 내용 요약표 웹섬김이 09-26 5250
2204 구약 39권 성경순서 및 내용 요약표 웹섬김이 09-26 2870
2203 영들을 분별하라 웹섬김이 09-26 2654
2202 다시 회복되어야 할 전도설교 웹섬김이 09-11 2969
2201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은 몇 년일까? 웹섬김이 09-11 2825
2200 [2]목회자의 영적 침체와 자기 관리 웹섬김이 09-05 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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