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8-02 10:17
[2]구속사적인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학상의 원리들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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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241  

 

이처럼 신앙과 이성은 상호 관계를 이루고 있듯이 중생한 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협력되고 있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로 자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그 지식으로 견고하게 되는 것인데, 만일 신학을 바로 아는 것이 없이 신앙하고자 한다고 하면 무지한 신앙, 맹목적인 신앙, 이방종교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교는 신학에 바로 선 가운데서 성경해석을 옳고 바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조직신학(조직신학은 교의신학으로도 말해진다)에 밝아 있어야 한다. 조직신학은 기독교의 신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여 신앙의 의의를 명시하는 신학범주의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이며, 신학 전반에 걸쳐 그 역사적 이해와 신학적 방법, 문제성과 위치를 논리적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종합, 체계화시킨 독자적이고 특수한 학문이다. 이때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참고;  벌콥의 조직신학을 번역한 고영민은 역자의 말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역사신학의 관계를 조직신학을 상위에 두고 있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그 예비학, 보조학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 논문의 연구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범주에서 조직신학이 성경신학과 역사신학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등장하고 가르쳐졌다고 할지라도 조직신학이 갖는 교리적 신학의 이해에 의한 체계화는 성경신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각의 신학적 이해에서 되어진 것이며, 또한 교회사의 역사에서 발생되어진 신학의 이해에 대한 논쟁과 그 확립에서 조직신학이 체계화되어 등장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및 역사신학은 서로 상하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응하는 관계에 의한 신학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때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그 신학이 왜곡되어 가르쳐지게 될 수가 있으므로 조직신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은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병행해서 상호이해 관계를 가져나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하는 자는 신학의 연관성을 갖고서 조직신학만이 아니라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밝아야 한다. 그것은 신학의 올바른 이해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신앙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까닭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가 복음을 말로만으로 전하는 것이 아닌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는 것이 되며, 설교를 듣는 믿는 성도 또한 많은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되려면, 조직신학을 비롯한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에서 다루어지는 신학의 이해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설교하는 목회자가 신학의 원리에 충실하여서 성경해석을 한 바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고 할 때 믿는 성도들을 바른 신앙과 생활로 이끌어 참으로 건전한 믿음을 보존하고 지속하게 하는 유익을 끼친다. 사도 베드로는 그가 쓴 서신인 베드로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6-18). 여기서 ‘무식한 자들’은 성경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本意)에 대한 이해가 없어 알지 못하는 자, 그러니까 성경의 뜻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을 말한다. 또한 ‘굳세지 못한 자’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앎으로써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자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진리인 복음의 원리를 아는 것으로서, 그래서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푼다. 그러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만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믿는 성도들에게 미리 경고하였다. 경고를 받아 미리 알았으면 이제는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당하는 무법한 자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라고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믿는 자가 그들의 미혹에 이끌려서 자신들이 알고 믿음으로 굳게 있었던 복음에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학에 충실하여 성경을 해석한 설교는 믿는 성도들을 거짓 복음 사상, 이단 사상과 그 행위로부터 보호하고, 능히 그 사상과 행위를 미워하고 대적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길러 주게 된다(참조. 계2:-3:, 계21:1-7; 유1:3-4). 사단은 신학의 이해가 없이 신앙하는 자들을 틈만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단절시켜 넘어뜨리려고 미혹한다. 사단은 거짓 선생들을 조정하여서 그들도 알지 못하는 복음을 훼방하여서 믿는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그들이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살게 하여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게 한다(유 1:1-19).

믿는 자의 신앙이 신학의 원리에 탄탄히 서 있으면 교회가 갖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다른 복음에 대처해 나갈 수가 있다.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사이비 기독교나 이단은 항상 교리적으로 접근해 와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왜곡시키며 훼방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리에 굳게 서있는 자는 흔들리지 않으며,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을 굳게 잡고 이 믿음을 아무나 빼앗지 못하게 한다. 이 믿음에 서있는 것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에서 갖게 된다(고전11:26). 그러므로 설교자가 신학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신앙에 있을 때 그가 하는 설교는 구속사적인 설교이다. 
    
이상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또한 문자적, 역사적, 상징적의 상호 해석적 관계에 의한 해석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시가 지닌 의미가 하나님이 말씀하여 기록하게 하신 문자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한 역사적 사실의 배경에서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야 하며, 때로는 은닉적인 비밀로서 상징하고 있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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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빈(J. Calvin)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주석에서 목사직을 처음 언급하였는데, 그는 교회에 시대를 초월하여서 항시 존재해야 할 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를 말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 목사와 교사는 서로 분리된 직분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목사요 겸하여 교사의 개념을 띠었다. 사실 목사의 설교는 선포적 개념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성도를 교훈으로 양육하여 가르치는 교육적 개념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  우화주의는 주로 동물이나 식물에 비겨 교훈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해석이나 설명을 말한다)

 

3) Hermann Bavinck, Magnalia Dei, 김영규 역, "하나님의 큰 일",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pp.27-28.

 

4) Jhon M. Zinkand, 김영철 역, “성경과 하나님의 언약”, 서울 : 여수룬, 1989, p.28.

 

 5) Loraine Boettner가 쓴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은 ‘개혁주의 예정론’이나 홍의표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책명은 ‘칼빈주의 예정론’이다.

 

6) 구약 성경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한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벗겨져 밝히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까지 주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7)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뜻과 계획은 ‘신적작정’(decree)이란 용어로 사용된다.

 

8) 여기서의 '인 치심을 받았으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표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

 

9) 여기서의 예언은 한문이 ‘豫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預言’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일을 선지자[예언자]에게 맡겨 전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며, 그 맡은 장차 되어질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려주는 일을 한 자이다.

 

10) 구원하시는 원리 곧 구원 원리는 하나님의 의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또한 믿음으로 각각 그 의미가 쓰여 진다.

 

이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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