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5 20:12
[5]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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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760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독일의 신약신학자이며,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Scribner, 1965.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 Scribner, 1971. 
 

 

 1.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19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 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197)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 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 나왔을 것이다.198)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199)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200)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2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절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202)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203)

 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204)


 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칭의(稱義)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205)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206)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207)

 

   피에르 드 샤르댕(Pierre T. de Chardin, 1881-1955)

피에르 드 샤르댕은 카톨릭 예수회 신부이며 철저한 진화론자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Hymn of the Universe.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Divine Milieu: An Essay on the Interior Life. New York: Harper & Row, 1965.

Science and Christ. New York: Harper & Row, 1968.

The Future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9. 
 

 

 1.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208)


 2.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209)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210)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211)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212)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213)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214)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 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 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215)

 3.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216)


 4.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217)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218)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219)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크리스터 스텐달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장이었고 신자유주의 학파로 분류된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ited by Krister Stendahl. New York: Harper & Row, 1957.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8.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and Other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Edited and Published by National Geographic Society, n.d. 
 

 

 1. 마태복음은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22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221)

 2.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222)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223)

 3.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224)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225)


 4. 기독교의 절대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드러나게 다르다.226)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린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227)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228)

 

 

 4. 교회에 끼친 영향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상당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이 배교적이 되었고 미국의 교회들도 1920년대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미국 교회들의 변질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예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오늘날 각 교파 교회들 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잘 증거한다. 
 

 

 1967년의 제프리 해든의 설문 조사

1967년,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이 미국의 성직자 10,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7,441명의 응답 결과가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인용 혹은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미국 교회의 평신도들이 아니고 성직자들(목사들)이 얼마나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증거한다:229)

(1)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UMC) 성직자들의 60%, 감독교회(ECA) 성직자들의 44%, 연합 장로교회(UPC) 성직자들의 49%, 침례교회(ABC) 성직자들의 34%, 루터교회(ALC) 성직자들의 19%, 미주리 대회 루터파(MSLC) 성직자들의 5%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2)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51%,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0%,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35%,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13%, 미주리 대회 루터파 성직자들의 7%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3)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7%,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47%,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14%, 미주리 대회 루터파 성직자들의 7%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4)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 미주리 루터파 성직자들의 24%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1985년에 시작된 '예수 세미나'

1985년 약 125명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하였다.230) 그 결과, 1988년 예수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빨강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으로 예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를 표시했다. 또 1993년에는 오복음서: 예수님이 참으로 말씀하신 것(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994년 초까지 이 세미나의 대략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며,231) 이것은 오늘날의 성경 연구가 얼마나 배교적인지를 잘 나타낸다:

(1) 예수의 말들의 오직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1) 예수의 말들의 오직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2) 주기도도 예수의 말이 아니다.

(3)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4)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5) 예수는 죽은 자들로부터 결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6) 예수는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

(7) 성경에 묘사된 신화적 의미의 지옥은 없다.

(8) 예수는 독신이 아니었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1999년, 이 세미나를 주도하는 로버트 펑크는 미국의 한 연합그리스도교회의 강연에서 "[성경에서 예수의] 말씀들 중에 확실한 것은 20퍼센트도 안 된다,"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의 신성(神性)과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나 비유들과 재치 있는 말들은 역사적이다," "니케야 신조는 넌센스이며 수정할 가치가 없다," "고대 교회의 신조들은 상상의 산물들이다"라고 말하였고, 그는 그 모임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인 다음과 같은 21개의 명제들을 배부하였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창세기 이야기의 비(非)문자적 해석은 원죄의 교리를 종결지었다.

(4)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5)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하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6)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7)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8) 예수가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9) 속죄의 교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sub-rational) 또한 윤리적이지 못하다(sub-ethical).

(10)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1)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2)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젼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3) 예수는 인간의 선함을 믿었다.

(14) 예수는 축제(celebration)를 믿었다.

(15) 예수는 성적 방향성[타고난 기질]에 근거한 경계선을 포함한 사회적 경계선을 거부하였다.

(16)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보자들은 없다.

(17) 예수는 예배 의식들을 믿지 않았다.

(18) 하나님의 나라는 끝없는, 영구적 방랑의 여행이다.

(19) 다른 신화들이 그렇듯이, 성경의 정경(正經)은 시대에 맞추어 축소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20) 성경은 객관적 행동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

(21) 예수의 비젼의 재구성은 항상 수정되어야 한다.

 

   2004년 바나 연구회의 보고

2004년, 바나 연구회(Barna Research Group)는 미국 개신교 목사들의 49%가 다음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5)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다, (6)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 (7)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 할 개인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두 개의 가장 큰 교단 중, 성경적 견해를 가진 목사들의 비율은 남침례교회가 71%로 가장 높았고, 감리교회가 27%로 가장 낮았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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