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5 20:10
[3]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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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69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루돌프 불트만은 불트만학파의 시조이며 신약신학자이었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Scribner, 1958.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Oxford: Basil Blackwell, 1970.

Theology of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Scribner, 1951-55.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1. 
 

 

 1. 성경의 신빙성과 역사적 증거성을 부정한다.

그 두 이야기들은 역사적 서술들로서 조화될 수 없다. 실상, 그렇게 하려는 어떤 시도도 각 이야기의 독특한 의도를 파괴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16-20에 나오는 두 장면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믿을 만한 역사적 전통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78)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메시아 혹은 인자(人子)는 유대교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난의 예언들에서 인자라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이 재해석되었다는--혹은 더 낫게 표현한다면, 독특하게 부요하게 해석되었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러한 재해석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사건들 후에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79)

만일 그 계시가 그[공동체=초대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그 공동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이 기도에서도 그 안에 계실 것이다. 사실 누가 기도하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 공동체이다.80)

비록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로마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정죄되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할지라도, 요한의 묘사는 거의 더 나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81)

 2.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82)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83)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8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85)

 3.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86)


 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르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87)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88)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89)


 6.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90)


 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91)

여하튼, 아주 초대교회는, 비록 예수를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92)

[요한복음 10장] 17절 이하에서 복음서 기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라는 신화적 진술을 했고, 예수의 권위의 증명을 위한 유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풍자적 대답을 첨가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했다.93)

 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94)


 9.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9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96)


 10.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대는 망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개입 선포가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즉, 세상의 가까운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그 기대가 망상으로 판명되었을 때--그의 신 개념이 또한 망상적이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97)


 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공관복음서의 전통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언제(혹은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말들이 없다. (인자의 '오심'을 가리키는 파루시아라는 말도 기독교의 최초의 시기에는 '돌아옴'으로가 아니고 '도착, 도래(到來)'로 정확히 이해되었다).98)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99)


 12.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100)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폴 틸리히는 구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선에 있다고 표현된다. 그의 사상들은 매우 과격하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64.


 1.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 101)


 2.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102)


 3. 특별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103)


 4.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10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105)

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107)


 6.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108)


 7.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10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110)


 8.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111)


 9.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112)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113)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114)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115) 
 

 10.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116)


 11.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117)


 12.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119)


 13.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120)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121)


 14.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122)


 1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123)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 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 124)


 1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125)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126)


 18.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127)


 1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진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케 하는 인상은 그의 자기 복종적 사랑의 인상이다. 이 사랑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마지막 말이라고 확신하는 응답적 사랑을 사람 안에 일깨운다.128)

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존재가 소외의 상태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 미치는 효력에 대한 묘사이다.129)

하나님의 속죄적 행위는 그가 실존적 소외와 그것의 자멸적 결과들에 참여하심이라고 이해해야 한다.130)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실존적 소외에 참여하심이 드러나게 된다.131)


 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132)

신들과 반신(半神, 절반쯤의 신)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순간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133)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심지어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13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아마 그럴 것이라는]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13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136)

 2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137)

 2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138)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139)

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이라고 한다.

'재림'의 상징. 140) 

24.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려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141)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은 가장 극적인 상징들 중의 하나이다.142)

[영원한 죽음은]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액면 그대로 해석되면 완전히 모순되는, 영원과 죽음이라는 두 개념들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의 결합은 영원으로부터 ‘떠난’(away) 죽음, 즉 영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시적 시간성에 내버려져 있음을 의미한다.143)

 25.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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