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5 20:08
[2]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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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237  

3. 이단 사상의 예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들의 예들을 전부 다 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또한 불필요하다. 많은 이들은 전체적으로 불신앙적이고,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것은 다음에 인용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예들을 통해 분명하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임을 부정하고,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역사를 분리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 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1. 성경은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7)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8)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9)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10)

 2.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11)

축자(逐字, 단어)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


 3.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13)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14)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15)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16)

 4.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17)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18)

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19)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20)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6.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21)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22)

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우리의 세계가 예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23)

8.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24)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25)

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28)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2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30)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31)

1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32)

11.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33)

하나님의 ‘예’[용납]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3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36)

13.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은 스캔들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다.”37)

14.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38)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39)

 

   씨 에취 다드(C. H. Dodd, 1884-1973)

C. H. 다드는 영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신약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Authority of the Bible.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29.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32.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51(1936).

About the Gospe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 sity Press, 1953.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40)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41)

요한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42)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43)

2.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44)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45)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 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 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46)

3.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도덕에 위험물이 된다.47)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48)

4.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49)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50)

5.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51)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진다.

그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 즉 우주의 의미를 표현하는 생애의 기록이다. 영원한 로고스[말씀]가 이해되는 것은 바로 이 생애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서이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 . . 그 서두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어질 수 있다: ‘모든 실제적 존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그 신적 의미 혹은 원리이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바로,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으나 실제상 그와 분리되지 않는, 이 원리이다’.52)

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귀라고 간주한다.

요한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심 자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승귀와 영광이기 때문에 . . . 부활이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어느 저자들에게 가지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의를 거의 가질 수 없다.53)

그리스도의 승천이나 승귀(昇貴)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지만.54)

8.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56)

9.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57)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58)

10. 재림과 심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부정한다.

그 서신의[데살로니가후서의] 첫 번째 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구절(7-10절)은--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것이 문체에 있어서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고 논평했는데--유대교적이든지 혹은 유대-기독교적이든지 간에 실상 당시의 어떤 묵시 문학의 인용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거기에는 그 내용에서나 그 일반적 어조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59)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라인홀드 니이버는 미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회윤리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Beyond Traged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38.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43.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55. 
 

 

 1.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60)

2.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61)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62)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63)

3.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64)

4.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반대론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65)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66)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67)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68)

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69)

‘처녀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70)

7.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71)

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72)

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73)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상징은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고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내버려질 수도 없다.74)

10.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75)

11. 마지막 심판을 부정한다.

신약의 상징론에서 에스카다(eschata) 혹은 ‘마지막 일들’은 세 개의 근본적 상징들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그리고 부활이다.76)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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