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1-14 19:38
존엄사는 안락사와는 다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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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022  

존엄사는 안락사와는 다른 것인가?

들어가는 말

한국의 사회변동이 미국의 사회변동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생명윤리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시행정부가 금지시키고 있던 배아줄기세포연구지원을 오바마행정부가 공식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배아줄기세포추출작업을 제한적으로 승인하고 나선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는 존엄사법리논쟁에서도 확인된다. 1990년과 2005년에 잇달아 있었던 미국법원의 존엄사 합헌판결의 선례를 따라서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존엄사허용을 요청하는 소송사건이 제기되어 지방법원을 거쳐서 고등법원에서까지 합헌판결을 받았고, 여세를 몰아서 일부 의원들이 존엄사법안까지 발의한 상태다.

이상에 열거한 최근의 존엄사에 관련된 한국과 미국의 법원들의 판결이나 발의한 법안들 은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특징들은 매우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1) 문제의 판결들이나 법안은 모두 환자 자신의 직접적인 의사표명이 없는 상태에서 일부 환자 가족들이 대신하여 제시한 추정적 의사표명을 환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리판단이나 추정판단에 의지하여 판단하는 경우 이 판단들이 환자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나 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2) 문제의 판결들이나 법안은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들의 상태를 정신기능이 죽어버리고 다만 동물적인 생명만이 남아 있는 상태로서 사실상의 사망의 상태라고 판단하고, 인간이 이와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생명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상호 연계된 문제들이 제기된다. 하나는 식물인간상태의 인간은 정말로 정신기능이 죽어 버린 것인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은 즉각 가라앉아 버리고 논쟁은 존엄사를 찬성하는 진영의 완승으로 끝나 버릴 것이다. 정신기능이 죽어버린 인간의 생체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를 정신기능이 죽어 버린 환자로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이며, 그 근거는 확실한 것인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면 존엄사라는 명칭 자체가 정당한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부터 시작하여 안락사와 관련되어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들의 바른 정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게 된다.


이 글은 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에 대하여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식물인간상태와 그 이후의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제시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게 있어서는 단지 생물학적 생명만이 유지되는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성경적 근거 위에서 논증함으로써 기독교적 관점에서 존엄사를 합법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거부해야 하는 인간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어서 필자는 죽음에 관련된 환자의 자기결정권 그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추정판단이나 대리판단 그 자체가 환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존엄사라는 용어 그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존엄사라는 용어가 부적절한 용어임을 밝히고 진정한 의미의 진료의 중단의 의미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I. 식물인간상태와 뇌사 상태의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 생명만 유지하는 상태인가?

이른바 존엄사논쟁은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를 인간학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에 따라서 그 방향이 결정된다. 그러면 식물인간상태란 무엇인가? 식물인간상태를 논의할 때 식물인간상태보다 더 악화된 상태인 뇌사상태 비교하는 것이 유익하다.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란 대뇌기능은 상실되었으나 뇌간과 뇌간 반사기능은 살아 있는 환자로서, 혈액순환, 소화기능, 신장기능, 호흡기능이 살아 있는 환자를 말한다. 혼수상태보다 더 악화된 상태인 뇌사상태는 다시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존재에 필요한 요소들을 인지하는 능력은 상실되었으나 뇌의 기능의 일부가 남아 있는 뇌피사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뜻하는 뇌간사 상태다.

식물인간상태와 뇌사상태의 환자에게는 다만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만이 남아 있다고 보는 해석의 배경에는 인간의 생명을 전기적 생명(the biographical life)과 생물학적 생명(the biological life)으로 나누는 레이첼스(J. Rachels)의  사상이 깔려 있다. 레이첼스는 욕구와 열망을 가지는 것, 즐거움을 향유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 사물을 이해하고자 원하는 마음, 우정의 형성, 결정을 내리고 기획에 참여하는 것을 전기적 생명의 증거라고 보고, 전기적 생명이 없는 단순한 육체적 생명만이 유지되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단정한다. 레이첼스의 틀에 의하면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는 전기적 생명은 상실된 채 생물학적 생명만 남아 있는 환자다. 전기적 생명이 상실되었다 함은 정신 혹은 영혼이 소멸되어 없어져 버렸다는 뜻이다. 이 해석은 인간의 영혼의 기원과 실재를 뇌신경세포의 작용의 산물로 파악하는 전형적인 유물론적 관점을 반영한다. 레이첼스의 해석에 따르면 이 환자는 동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요, 따라서 이 환자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의 소멸이라는 개념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생각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인간 안에 넣어 주신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다. 그러나 이 몸은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었다. 이 몸 안에 하나님이 생기를 넣으셨다. 생기는 영을 뜻한다. 하나님이 영을 창조하셔서 몸에 넣어 주시자 몸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혼이 몸  속에 들어오자 비로소 몸이 생물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학적 생명이 시작된 것이다. 영혼은 생물학적 생명을 작동시키는 원리다. 인간의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영혼이 들어 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혼을 말하지 않고서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밖에서 창조되어서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 와 거주하기 시작한 영혼은 인간의 신체가 생물학적 생명을 다하고 해체되어도 결코 소멸되어 없어지는 일이 없으며, 의식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한번 창조된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며 의식적으로 활동한다. 영혼의 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적 인간관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많은 성경본문들이 영혼은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의식적인 존재와 활동을 계속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증거한다. 를 들어 보자.


a. 사후의 영혼이 그의 현세에서의 모든 일들을 기억한다. 부자와 나사로는 자신들이 현세 안에 있을 때 누구였고,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가를 안다(눅16장). 마지막 심판 날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땅 위에서 한 일이 어떤 일들이었는가를 안다. 예컨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실을 예수님께 상기시킨다 (마7:22).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그들이 행한 일이 따라 온다는 말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한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다(계14:13).


b. 성경은 사후의 영혼들이 현세에서 안면이 있던 사람들을 알아본다고 말한다. 예컨대 바벨론의 왕 밑에서 섬기던 신민들이 지옥에 들어온 바벨론 왕을 알아보고 조롱한다(사14:10,11).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고(눅16장), 죽은 영혼으로부터 현세 안에서 선대를 받은 친구들이 그를 알아보고 영접한다(눅16:9).


c. 욥은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욥19:26), 육체적 죽음으로써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이후에도 영혼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혼이 감각활동을 계속하여 있음을 증거한다. 물론 사후 영혼의 감각활동은 육체를 입은 영혼의 감각활동과 같은 방식은 아니며, 활동의 구체적인 방식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감각활동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d.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누가복음16:19-31)는 사후의 영혼들이 살며 기억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도한다.   


e. 바울이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빌립보서1장 23절에서 한 말이라든가, 사후의 신자의 상태를 “주와 함께 거하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고후5:8)은 사후에 영혼이 의식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표현들이다.


f. 만일 인간의 의식적 활동이 중단되어서 영혼에 결핍이 생겼다면 히브리서 12장 23절에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의식적 활동이 더 예리해지고 완벽해져야 영들이 온전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g. 계시록 6장 9,10절에는 순교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만일 영혼의 의식이 죽었다면 어떻게 이처럼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식물인간상태의 인간의 경우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식물인간상태의 인간이 생물학적 생명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적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영혼이 그 안에 살아서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따르면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는 전기적 생명을 포함하는 영적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을 모두 가진 전인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로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뇌사상태에 있는 환자에 대해서도 판단이 달라질 이유가 없다. 뇌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의 존재와 활동 여부가 뇌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은 영혼의 의식적인 존재와 활동이 뇌에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서 영혼이 소멸되거나 의식적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뇌기능은 정지되었지만 음식물과 산소를 공급해 줄 때 신진대사가 이루어진다면, 생물학적 생명은 유지되는 것이고 생물학적 생명이 유지되는 한 영혼은 그 안에 머무는 것이며, 전기적 생명은 유지되는 것이다. 생물학적 생명이 중지되는 시점 - 통상적으로 아무리 그 시점을 일찍 잡아도 심폐사 이전으로는 잡을 수 없다 - 에 영혼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몸을 떠나서 계속하여 존재하며 의식적으로 활동한다. 여기서 영혼의 존재와 활동에 있어서 뇌의 기능은 무엇인가가 문제되는데, 영혼이 신체를 떠난 이후에조차도 현세에서의 모든 생활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음을 볼 때 기억이 뇌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뇌의 기능은 영혼의 의식적 존재와 활동을 외부로 표현하는 메카니즘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식물인간상태에 빠진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나 식물인간상태에 있다가 의식이 깨어난 이후의 환자들의 일치된 증언은 식물인간상태에 있었던 기간 중에도 의식이 있었으며 주위에서 하는 말들이나 행동들을 모두 듣고 느끼고 알고 있었으나 다만 적극적으로 반응을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식물인간상태나 뇌사상태에 빠진 환자도 영적 생명과 육체적 생명이 모두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는 이상 이 환자의 남은 수명의 기간의 길고 짧음에 근거하여 환자를 차별화시켜서 다룬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의 기대수명이 하루 남은 자와 이틀 남은 자, 일주일 남은 자와 이주일 남은 자, 한달 남은 자와 일년 남은 자를 다르게 대우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기독교적 인간관은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와 뇌사상태의 환자를 생물학적 생명만을 살고 있는 자로 전제하고 이 환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접근하는 모든 시도에 대하여 이 상태에 처한 환자들도 다른 정상인들에 비교하여 조금도 그 가치와 존엄성이 떨어지지 않는 인간으로 볼 것을 요청하며, 이 근거 위에서 이 환자들을 대할 것을 요구한다.


II. 환자의 자기결정권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의사는 일방적으로 의술을 베풀고 환자는 이 은혜를 수납한다고 본 후견주의적 모델로부터 의사는 환자의 병세, 진료, 그리고 진료의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환자는 의사의 제안에 동의하면 소정의 진료비를 지불하고 진료를 받는다는 계약모델로 전환되는 것과 발맞추어 환자의 요구권(claim rights)이 강화되었다. 환자에게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자기의 삶의 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천부적이고 자연적인 권리로서 주어져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생명을 종결시킬 권리도 또한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말기적 질환에 시달리는 환자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종결시켜 줄 것을 의사에게 요구하는 경우에 그 요구가 환자 자신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의사는 환자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한다.

물론 환자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제약 없이 죽음을 요구하는 모든 환자의 요구를 다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할 환자들의 범주를 제한시키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첫째로, 이들은 대상환자의 범주를 구체화했다. 예컨대, 18세 이상 / 6개월 이내에 죽을 말기질환자 /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 보유자 / 정신질환자는 제외 / 고통이 죽음보다 더 악한 상태일 것. 둘째로, 이들은 안락사가 가능한 상황에 대해서도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예컨대, 의사가 제공한 죽음에 이르는 재료를 환자가 이용할 수 있을 것 / 환자가 말기질환 또는 추적이 불가능하거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야기시킨 질병을 가지고 있을 것 / 환자 자신의 결정에 의하여 죽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할 것 / 정신질환 상태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떤 강제력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을 것. 디모디 이 퀼 (Timothy E. Quill) 은 이 외에도 위로간호의 충분한 시행 / 환자와 의사의 긴밀한 관계 / 또 다른 경험 있는 의사와의 협의 / 문서화 등을 첨가했다. 셋째로, 환자의 질환 및 이에 수반되는 고통의 정도가 클수록 환자의 요구를 들어 줄 가능성이 커지고, 그 정도가 약할수록 가능성이 작아진다.

그러면 환자가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환자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결정은 의사나 후견인들이 해야 하는데,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자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환자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바틴은 자율권은 불간섭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의 자율권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제공할 의무와 연관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한다. 안락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장애상태에 있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 이때 의사가 환자를 긍휼히 여긴다면 환자에게 편안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죽고자 할 때 도울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진술한 자결권을 옹호하는 두 가지 논거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먼저 의사가 환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방편으로서 환자의 자결권실행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환자에게 죽음의 자결권을 부여하고자 시도하는 자결권옹호론자들의 의도가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에 대한 긍휼의 실천에 있으며, 안락사를 시행하는 의사가 단순히 이기주의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환자들은 아무리 심각한 고통 속에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경우가 많으므로 환자의 자율성을 경솔하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환자의 호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때 환자는 무거운 고통,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재정적인 압박, 의료재원의 공정한 분배를 원하는 사회의 정책 등에 떠밀려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죽음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환자의 속마음은 사람들의 접촉과 애정과 같이 있어 주는 것과 격려를 요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환자는 죽어가면서도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하며, 절망에 대항하여 영혼의 힘을 북돋우어 주는 말과 행위를 요구한다. 이때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멈추게 하겠다는 단순한 긍휼(humaneness)의 실천의 차원을 넘어서서 죽어가고 있지만 살아 있는 자 (living-while-dying) 의 인간성 (humanness)에 주목해야 한다. 대부분의 말기질환자들은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경우에도 자신들의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며 고통을 통과하는 삶 속에서도 가치를 발견하며, 가족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려는 불변의 욕구를 가지며,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죄라고 생각한다.

이 논증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신학적 관점에서 나온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 (욥1:21) 시며,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12:10) 는 욥의 고백은 인간의 생명의 주관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도 청지기의 입장에 있다는 신학적 확신을 가질 때 자결권은 근원적으로 비평된다. 이 생명을 다룰 때 인간은 창세기9장6절이나 제6계명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도덕적 규범의 틀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수직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수평적인 사회학적 관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복합적인 사회적 구조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한 인간의 번영과 실패가 나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자기생명에 대한 자결권을 말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면 치매, 정신질환 또는 혼수상태 등으로 자기 의사를 표명하지 못하는 환자의 경우에 후견인이 환자를 대신하여 환자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결정을 내린다면, 이것은 타당한 결정인가? 그런데 이 행위는 환자의 자결권 옹호 논증 그 자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결권 옹호 논증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생명을 종결시킬 권리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환자가 명시적으로 생명종결을 요구하지 않았을 경우에 환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알란 마이젤 (Alan Meisel) 은 이에 대하여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1) 대리판단자가 환자가 남겨 놓은 문서, 육성, 가족의 구두증언 등의 자료를 토대로 결정하는 주관적 판단의 표준 (subjective standard). 이 판단에는 대리판단자가 환자가 남겨 놓은 자료들을 자신의 가치기준에 맞추어서 선별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뒤따른다. 또한 환자가 남겨 놓은 기록에 나타난 환자의 태도가 실제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나타나는 태도일 것임을 어떻게 보장해 줄 수 있는가, 곧 자료를 기록했을 때의 환자의 마음과 실제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환자의 마음이 동일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2) 환자가 남겨 놓은 자료가 없을 때는 환자의 가족이나 관련된 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환자가 원했을 것으로 상정되는 내용을 결정하는 대리적 판단의 표준 (substituted judgment standard). 이때 대리판단자는 “환자라면 어떻게 판단했을까?”라는 관점 보다는 “환자를 위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판단할 우려가 있다.


(3) 대리판단자가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판단하는 최선의 이익의 표준 (best-interests standard). 이때 판단자는 환자의 삶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판단을 할 우려가 있다. 


III. 정의의 문제: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 존엄사 그리고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

존엄사는 존엄사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락사와는 다른 것인가? 존엄사찬성론자들이 말하듯이 이른바 소극적 안락사와는 다른 것인가? 먼저 안락사의 정의부터 알아보고 문제가 되고 있는 존엄사의 의미문제를 다루어 보자.

‘좋은 죽음,’ 또는 ‘안락한 죽음’을 뜻하는 안락사(euthanasia)는 회복이 불가능한 극심한 고통이 뒤따르는 질병상태 또는 기타 이에 준하는 비상한 질병상태에 처한 환자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직접 또는 후견인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고 요구할 때, 의사가 직접 환자의 생명을 종결시켜 주거나 아니면 환자가 죽을 수 있도록 장치나 약제 등을 준비해 줌으로써 환자가 자살하는 행위를 도와주는 행위를 뜻한다. 환자자신의 요청은 안락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 환자 자신의 요구가 없는 한 고의적 살인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전선에서 실려 오는 부상병들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병상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정신병자나 장애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계획을 ‘안락사계획’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환자를 죽이는 행위도 안락사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히틀러의 계획은 환자 본인들의 의사를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락사계획이라기 보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고의적 살인계획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안락사와 고의적 살인을 구분하는 의도는 안락사가 고의적 살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안락사도 고의적 살인행위이지만 행동의 동기와 환자 자신의 의사가 표명되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뿐이다.

의사가 직접 환자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경우를 적극적 안락사라고 한다면, 의사가 직접 손을 대지 않는 경우는 소극적 안락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를 전제할 때 통상적으로 식물인간상태에 처해 있는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 수액, 영양액 공급을 중단시키는 행위를 소극적 안락사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용어사용이다. 이 행위는 의사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에서 이미 적극적 안락사라고 불러야 한다. 이와 같은 잘못된 용어사용으로부터 소위 소극적 안락사를 둘러싼 개념상의 혼란이 초래된다.

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락사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 행하는 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 된다. 환자가 자기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는 의사만 밝히고 생명을 종결시킨 행동은 의사가 실행한 경우에도 환자는 자살을 시도했다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의사가 제공한 도움을 받아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는 당연히 자살의 요건이 성립된다. 반면에 의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락사는 살인 혹은 살인방조행위가 된다. 의사가 환자의 요청을 듣고 직접 환자의 생명을 종결시킨다면 살인행위가 되고 환자로 하여금 자살할 수 있는 도움을 제공했다면 살인방조 또는 자살방조행위가 된다.

안락사는 고의적 살인과는 달리 고통 받는 환자들을 도우려는 선한 동기에서 그리고 환자 또는 환자의 대리인의 뚜렷한 요구가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안락사의 비윤리성을 완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안락사를 윤리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로 안락사를 자비사(mercy killing)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락사를 자비사로 호칭한다고 해서 안락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은 호칭의 변화 안에는 안락사의 윤리적 정당성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논쟁의 핵심이 암시되어 있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하여 죽음이라는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만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이용하는 행위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면 자비사라는 명칭이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자비사라는 명칭은 안락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위선적이고 전략적인 '미화'가 될 것이다.

안락사를 전략적으로 미화하는 또 하나의 용어가 바로 존엄사다. 존엄사란 환자가 혼수상태 또는 이와 유사한 의학적 상태에 처해 있어서 자기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 단지 인공음식물투여장치나 인공호흡기와 같은 인공연명장치에 의존하여 육체적 생명만을 가까스로 유지하는 것 곧 전기적 생명을 상실한 채 생물학적 생명만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한 삶의 모습이라고 판단하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인공연명장치를 제거하고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미 본 논문의 II에서 논증한 것처럼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전기적 생명의 원천인 영혼이 몸 안에 실재하고 있음을 필연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에 존엄사 찬성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존엄사의 상황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떤 단계에 있든지 생물학적 생명이 유지되는 인간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동은 영혼과 몸이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이는 행동이다.

안락사와 유사한 것 같아 보이지만 안락사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없는 두 가지 의료행위가 있다. 하나는 간접적 안락사(indirect euthanasia)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잘못 분류되기도 하는 의료행위로서 이중효과의 원리(the double effect theory)에 의하여 도덕적 비판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서 어떤 간호사가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고자 하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의료행위의 절차와 준칙들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환자에게 모르핀을 투여했는데, 환자의 몸에 예상하지 못했던 우발적인 사태가 나타나 환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때 선한 결과를 의도했으나 실제로 나타난 결과가 악하다하더라도 악한 결과에 대하여 간호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이 경우는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는 환자의 의도도 없었고, 행위의 의도나 과정이 환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므로 안락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으로서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행위와 구분되어야 한다. 진료의 중단은 치료를 통한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적 질환의 상태에 있거나 자연적인 노화의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불가피한 환자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할 것을 요구할 때, 의사가 중층적이고 신중한 의학적 검토와 병원윤리위원회 등과의 협의 등을 거쳐서 환자의 요구에 응하여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뜻한다.


진료의 중단이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로부터 연명장치를 제거하는 행위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로,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의 경우는 환자 자신의 뚜렷한 의사표현이 있는 반면에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의 경우에는 본인의 명시적인 의사표명이 없다.


둘째로,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의 경우는 환자 자신의 질병이나 자연적인 노화의 과정이 죽음의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에게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의사의 치료행위 그 자체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셋째로, 죽는 속도에 있어서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은 환자의 전체적인 신체조건에 따라서 죽어가는 기간이 결정되는 데 비하여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에게서 연명치료를 치료중단시술 후 시술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단기간 안에 죽는다.


넷째로,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을 남김없이 다 받으면서도 인내하는 가운데 고통을 참아내고 고통의 의미를 물으면서 자연수명이 다하는 시점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인데 반하여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에게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제3자가 환자의 고통의 정도와 환자의 마음을 자의적으로 추정하여 “환자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취하는 행동이다.


한편 환자가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의학적 치료를 통한 회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수일 안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 분명한 불가역적인 뇌사상태에 진입해 있을 때, 환자가 사전에 유언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뇌사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자신의 장기를 적출하여 타인의 생명을 살리도록 해 달라”는 의사를 표명했다면,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요한복음15장13절 말씀을 존중하여 환자의 죽음을 예상하면서도 장기를 적출하는 시술을 행하는 것은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해 두는 행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양로원에 있는 노인이 폐렴에 걸려 있는 경우에, 이 노인이 양로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환자라고 판단하여 진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가 죽게 만드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폐렴 그 자체가 치사에 이르게 하는 질환은 아니라 할지라도 노인의 경우에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해 두면 치사에 이르는 질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의사가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치료를 중단한다면 살인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소위 존엄사 논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는 생물학적 생명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의식적인 존재와 활동을 계속하는 전인이 살아 있는 인간이다. 심지어 이 관점은 생물학적으로 비가역적인 사망에 이르는 상태에 있다고 판단되는 뇌사상태의 환자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뇌사상태에 들어가서 뇌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도 뇌를 제외한 다른 신체기능이 전체적으로 살아 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혼이 신체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의식적인 존재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아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식물인간상태에 있는 환자에게서 연명장치를 제거하는 행위는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영혼이 살아 있고 신체가 작동하고 있는 한 남은 기대수명이 짧은가, 긴가는 판단의 표준이 될 수 없다. 환자의 기대수명이 단 몇 시간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해도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죽음의 시점은 아무리 앞당겨서 잡아도 심폐기능이 정지되어 더 이상 신체가 작동하기를 중단하기 이전으로 소급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비가역적인 뇌사상태에 들어가 있음이 의학적으로 분명한 경우에, 본인이 이웃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이웃사랑의 정신에 의거하여 뇌사상태에 들어간 기간에 장기의 적출을 사전유언을 통하여 분명히 밝히고 그 의사를 뇌사상태에 들어가는 시점까지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면 장기적출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일은 고려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식물인간상태에 있는 환자의 가족들의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부담과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지만 이 점들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해서 식물인간상태의 살아 있는 인간을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자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료보험제도를 대폭 강화시켜 환자의 가족들이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고, 네델란드나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처럼 시나 국가에서 고용비용을 담당하는  의무간병인제도 등을 통하여 환자가족들이 일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의 장기적인 제도적 지원장치를 마련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며,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에게서 연명장치를 제거하는 행동을 합법화하는 근시안적이고 반생명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2) 환자 자신의 직접적인 의사표명이 없는 한 모든 형태의 추정적인 대리판단은 환자 자신의 본의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과 환자 자신의 마음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점과 환자 자신의 입장 보다는 대리판단자의 입장이 더 크게 반영될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환자자신의 판단을 대신할 수 없다. 최근에 사전유언제도가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지만, 사전유언을 하는 순간의 환자의 생각이 실제상황이 일어났을 때의 환자의 생각과 일치되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과 삶에의 충동은 본능적인 충동이지만 죽음에의 충동은 본능적인 충동이 아니라는 인간학적 진리에 근거해 볼 때 보류되어야 한다. 만일 사전유언제도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앞 항에서 말한 장기기증의 내용을 담고 있거나 “내가 식물인간상태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내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 한하여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식물인간상태에 있는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종결시키는 행위를 존엄한 죽음이라고 부르는 관행은 고쳐져야 한다.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가 고통스러울 것이며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불확실한 자의적 판단에 의거하여 영혼과 육체가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는 환자를 죽이는 행동일 뿐 결코 존엄사라고 불려질 수 없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식물인간상태의 환자에게서 연명치료장치를 제거하는 행위는 무의미한 진료를 중단하는 행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은

첫째로, 치료를 통하여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하거나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이 되고,

둘째로, 환자 본인이 명확하게 진료의 중단의사를 표명하고,

셋째로, 진료의 중단이 죽음의 원인이 되지 않고 질병이나 노화가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고,

넷째로,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과정에 설사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경우에 한하여 허용되어야 한다.

이처럼 고통이 수반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내다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존엄한 죽음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엄한 죽음은 인간의 모든 순간의 삶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과 동전의 앞뒷면이다.


(4)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이 어떤 순간에도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진리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오니”(욥1:21)라는 욥의 고백처럼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취하실 수 있다는 생명주권의 사상이다.

 

이상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성산생명윤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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