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5 20:30
[12]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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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082  

4.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넷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는 그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 이야기들에서 순수한 전설(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418)

[바르트는 사가(saga)에 대해 설명하기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하였다.419)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같은 개념이다.]

또한,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비록 바울에게는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라고 말한다.420)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도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라고 말한다.421)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라고 말한다.422)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겠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믿는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423)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이 흙 한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설화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의미 있을 뿐이다.424)

또한,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보편적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현재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저의 미래이었고 선사(先史)시대의 도마뱀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 최초의 물질과정의 미래이었다.425)

 <성경적 반박>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내용이 아닌가. 창조를 부정하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 몇 개의 기본적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천지 창조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교리의 첫 번째 지식이다. 천지 창조를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나머지 중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5.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다섯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하나님을 가장 높은 이상적(理想的) 인격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 일관하지 않다”고 말한다.426)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427)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428)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혹은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429)

 <성경적 반박>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은 성경의 매우 기본적인 내용이다.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홍수 심판(창 6-8장)이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창 19장)은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의 충분한 증거다.

다섯 장으로 된 예레미야 애가서에는 '진노'라는 말이 14회나 나온다.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밝히 말한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 .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나 1:2-3, 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쳤다.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한다.

여섯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곧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한다.430)

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적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인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온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Gnostic, 靈知主義的)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31)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라고 말한다.432)


 <성경적 반박>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 사실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육신하지 않은 예수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다. 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일곱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433)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도 말하기를,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하고,434) 또 그의 다른 책에서도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이다”라고 말한다.435)

불트만(Rudolf Bultmann)도,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436)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은 그 계시적 사건의 근본적 요소, 즉 예수께서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라고 말하며,437) 또 “신학은 예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438)


 <성경적 반박>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자세하고 확실하게 증거한다(마 1:18-25).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절,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경을 믿는 자는 이 증언들을 부정할 수 없다.

누가복음도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밝히 증거한다(눅 1:26-38).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7절, "이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원문직역).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믿음을 판별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神性)과 연관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 사상이다. 예수께서는 당시 부활이나 천사나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8.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여덟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에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나 초자연적 기적들을 의심하는 성경의 비평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다. 몇 가지 예들만 들어보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motif),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라고 한다.439)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을 따를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440)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발생했을 것이다.441)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 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에서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에서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442)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전반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고 한다.443)


 <성경적 반박>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사두개인들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지적하셨다(마 22:29).

주 예수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너희 앞에서'라는 말씀들은 예수님의 기적들이 어떻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잘 증거한다.

제자들은 주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에 대한 목격자요 증인이었다. 사도행전 10:38-3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우리가 성경의 신빙성과 신적 권위를 믿는다면(요 20:30-31; 21: 24), 우리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모든 내용을 다 믿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내용들이다. 
 

 

      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아홉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형벌적 대속’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이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가라앉힘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고 말한다.444)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더욱 사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한다.445)

불트만(Rudolf Bultmann)도 분명하게 그러나 불신앙적이게 대속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46)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는 ① 속상 (贖償; expiation), ② 구속(救贖, redemption), ③ 유화(宥和, 진노를 가라앉힘; propitiation), ④ 화목(reconciliation) 등의 용어에서 나타나며, 그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셔서 택함받은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겼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진리를 증거하는 성경의 많은 구절들 중에 다음 몇 구절들은 아마 대표적인 것들일 것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헛된 행실로부터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열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우리가 ‘부활의 역사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도 부활을 믿는다고 언어적 유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부활은 역사적으로 ‘빈 무덤’을 만든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447)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은 아니다.448)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449)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450)

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451)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452)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453)

신들과 반신(半神)들의 부활은 익히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순간에 . . . 부활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야가 된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하였다.454)

역사적 연구는, [부활 상징에서]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455)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456)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457)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하였다(행 1:3).458)

처음 보기에는, 부활하신 주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에 대한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459)

 <성경적 반박>

그러나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자세하고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한다. 또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보이셨다고 말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다니 성경을 거꾸로 읽는 자들이다!

또 그 외에도 성경에서 몇 개의 중요한 구절들을 들어보자.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본적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구원받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특히,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임을 증거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15:3-4). 또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든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5:12). 또 그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한다(15:19).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의 진리와 관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승천의 역사성과 사실성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 그의 재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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