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5 20:11
[4]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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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93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훼퍼는 급진파로 분류되며 또한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이다. 인용된 그의 책은 다음과 같다: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New York: Macmillan, 1959.

Ethics. New York: Macmillan, 195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Macmillan, 1967. 
 

 

 1.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145)

 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146)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147)

 3.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148)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149)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150)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1

 4.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152)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153)

 5.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154)


 6.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영감[문자적 영감]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155)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156)

 7.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하와,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서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157)


 8.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158)


 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159)


 10.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160)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161)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

오스카 쿨만은 구속사(救贖史) 학파(the Heilsgeschichte)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Christ and Tim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London: Epworth, 1958.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rev. ed., 1963].

Salvation in History. New York: Harper & Row, 1968. 
 

 

 1.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162)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163)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164)

하나의 전체로서의 구속사는 ‘예언’이다. 여기에 역사와 신화 간의 대조를 초월하는 점이 있다.165)

그 과정 전체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객관적으로는 오직 계시의 대상일 뿐이며 주관적으로는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므로, 그것들은 오직 예언일 뿐이다.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결정을 통한 확증은 여기에서 가능하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성경의 책들(역사서)에 언급된 것은, 완전히 믿음과 독립된 역사적 시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열려 있다.166)

 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와 본질들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167)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168)

 3.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16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17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171)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 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172)


 4.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내가 발견한 바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용감하고 기쁜 원시적 기독교의 소망과, 불멸적 영혼의 잔존에 대한 평화로운 철학적 기대 간에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73)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174)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혼의 불멸]의 이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17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1968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 뮌헨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이었고 판넨베르크 학파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Revelation as History. New York: Macmillan, 1968.

Jesus--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8 [2nd ed. 1977].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The Apostles' Cre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72. 
 

 

 1.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176)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의 현재 사건들의 규명된 목표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것들이 일어난 후에만 하나님의 신성이 감지된다. 이와 같이, 계시를 역사의 끝에 두는 것은 계시의 간접성에 근거한다.177)

바울의 복음은 그가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해석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이 그 완성된 형태로, 들리는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의 저작 사이에 바울의 사상에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에 반대되는 가장 작은 증거가 아니다.178)


 2.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은 텍스트에 적힌 진술 하나하나에 대해 모두 무오류(無誤謬)의 진리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 . . 이럴 경우 오히려 성경 본문 자체가 지니는 진정성을 말살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179)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178)

 3. 사도신경의 진리성(眞理性)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181)

사도신경의 표현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182)

 4.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의 최초의 물질과정들의 미래이었다.183)


 5.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가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184)

신학은 예수의 처녀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185)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186)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러므로,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187)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188)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189)

 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를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190)


 8.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191)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192)

물론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의 죽음간의 이 교통은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193)

 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선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194)


 10.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방식에서 나온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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