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24 22:32
연옥 ( Purga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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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934  

연옥 ( Purgatory)

1. 연옥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
2. 무서운 연옥
3. 금전적인 문제로 동기화된 연옥설
4. 성경의 가르침
5. 교리의 역사성
6. 결론

1. 연옥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  
   교회와 좋은 관계속에 있었지만, 완전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연옥이라고 알려진 중간 장소에서 형벌을 받고 고통을 당하면서 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로마교는 발전시켰다. 완전한 교인의 상태에 도달한 신자만 즉각적으로 천국을 간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세례 뒤에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지옥에 들어간다. 교회와 교제를 하면서 부분적으로 성화된 많은 사람과,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연옥에 들어가게 되며, 어느 정도의 기간을 걸쳐서, 모든 죄가 깨끗이 정화될 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며, 그 후에 그들은 천국으로 가게 된다. 

세례는 전에 지은 모든 죄, 즉 원죄와 자범죄를 없앤다고 로마 카톨릭은 말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고 즉시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하였다. 기독교 순교자와 고위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다른 신자들은 세례뒤에 지은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반드시 연옥에 가야 한다. 순교자들이 행한 희생적인 행위, 특별히 교회에 영광을 가져다 준 사람들은 연옥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연옥설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죄를 두 종류로 나눈 것이다. 이런 구별은 분명하게Dr. Zacchello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두가지 종류의 죄를 지을 수 있다; 치명적인 죄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이다. 치명적인 죄는 하나님의 법 또는 교회의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죄는 정결케 하는 은혜를 전부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치명적인 죄로 불리운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하나님과 교회의 법에 대항해서 적은 그리고 용서될 수 있는 위반을 한 것이다. 이런 혼란스럽고 비 성경적인 교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종류의 형벌이 치명적인 죄에 부과된다, 영원한 벌( 지옥에 영원히 있는 것)과 일시적인 벌( 연옥에서). 영원한 형벌은 세례, 고행성사 또는 온전한 회개에 의해서 없어질 수 있지만, 일시적인 형벌은 이런 성례로는 삭제될 수 없지만, 고행 , 자선, 미사를 집행할 수 있도록 사제에게 돈을 지불하고, 면죄부에 의해서 취소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치명적인 죄를 위해서 연옥에서 겪어야 하는 일시적인 형벌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치별적인 죄가 사제에 의해서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런 선행( good work)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으면, 그는 연옥에 들어가야 하고 그의 영혼이 온전히 정결하게 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SecretsofRomanism, p. 101).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지만, 그의 공의는 죄인들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는 가정에 연옥설은 근거한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기 전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모든 형벌을 받을 것을 하나님이 요구한다는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인간의 생각에도 맞지를 않는다. 죄인이 지은 죄를 용서하였지만 그리고 여전히 그것에 대한 형벌을 받도록 감옥에 보낸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연옥에서 친척이나 친구들의 영혼들이 불꽃 가운데서 큰 고통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도 자신의 공의가 만족될 때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카톨릭 성도들은 가르침을 받는다. 오직 이 땅에 있는 사람들만이 이런 고통을 단축시키거나 편한케 할 수 있다고 한다. 연옥은 교황이 특별하게 관할을 한다고 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죄를 사해주는 것은 ( 또는 고통에서 구원해주는 것) 그의 특권이다. 이 권세는 고통을 감소하고, 기간을 줄여주고, 없애주도록 교황에 의해서 행사될 수 있다. 이런 한계 안에서 교황의 대리자로서 사제들도 행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권세를 좋은 사람이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돈만 바라고 사악한 사람들의 손에 이런 권세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교리로 부터 나온 온갖 종류의 악한 일들과 그 결과를 역사적으로 점검해보면, 절대로 이 교리는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지 않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2. 연옥의 무서운 국면들 

실제적인 성도들이 연옥의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교리는 로마교 성도들의 죽음과 장례식에서 두렵고 무서운 장면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교리의 영향아래에서는, 개신교에서 처럼, 죽음이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교 가정에서 태어난, 성경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고, 그들 교회의 가르침을 은연중에 믿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속에서 살다가 죽으며, 연옥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에서 고통과 고뇌속에서 보내야 할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생명과 죽음의 권세를 사제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제들을 두려워하고, 굽실거리며 사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형벌을 담당하였음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심지어 로마 카톨릭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히 2:14-15]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에 매여있다’는 이런 말들은 헌신적인 로마 카톨릭 성도들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들의 모든 삶이 추상적인 연옥설에 얷매여 종살이를 하고 있다.  

연옥에서의 고통은 죄와 불순과 완고함에 따라서 정도와 기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온화하며, 몇 시간 정도만 지속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천년이 지속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연옥에서의 고통은 끝이 있지만, 지옥에서는 없다고 한다. 연옥에서의 모든 고통들은 마지막 심판과 함께 끝이 날 것이며, 연옥은 결국 텅텅 비게 될 것이다.
고통의 강도에 대해서, 유명한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Bellarmin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연옥의 고통들은 매우 심각하고,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어떤 고통도 능가한다.”
Cardinal Hayes의 허락을 받은, 연옥에서의 삶에 대한 지침서는 말한다;
“교부들에 의하면, 연옥의 불은 지옥의 불과 영속 기간을 제외하고는 다르지 않다. 지옥에서 부도덕한 사람과 연옥에서 의인에게 고통을 주는 똑같은 불이다. 그러나 연옥에서 주는 불의 고통은 정도에서 적을 뿐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겪는 어떤 고통을 능가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기간이 지옥의 불을 연옥의 불보다 더 무섭게 만드는 것이다.”

추기경Spellman의 인가를 받은 또 다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연옥에서 행해지는 고통중에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되는 것도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John M. Haffert, SaturdayinPurgatory). 


로마 교회는 연옥의 고통의 본질과 강도에 대해서 공식적인 설명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신교의 독자들과 청중들을 위해서 의도된 책들과 강연은 매우 부드러운 언어로서 연옥을 설명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책임을 피해서는 안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상대적으로 약한 형벌에서 부터 활활 타오르는 무서운 불못에 이르는 고통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사제들의 인가를 받고 배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성도들을 두렵게 하는 도구로서 연옥설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과 연결해서 찰스 핫지의 설명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발톱을 감춘 호랑이의 발은 벨벳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이 발톱이 드러났을 때에, 찢고 죽이는 무서운 도구로 바뀐다.” 

게다가, Dr. Augustus H. Strong이 적합하게 말하였다:

“ 고통 그 자체는 개선의 힘을 갖지 않는다. 성령의 특별한 회심시키는 영향력이 동반되지 않는 한, 고통당한 영혼을 더 강팍하게 하고, 적개심을 품게 한다. 이런 성령의 영향력이 죽음뒤에도 여전히 완고한 사람들에게 행사된다는 성경적인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와 반대로, 죽음뒤에 도덕적인 조건들이 그들의 영원한 조건이 된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마음이 강팍한 자아 반역적인 죄인들에게 회심의 동기는 그들의 마음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동기들을 이 땅에서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시한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났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철회되고, 회심을 위한 어떤 동기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혐오하는 영혼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죄인의 마음) 불평과  저항만을 보여준다(SystematicTheology, p. 1041).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물을 수 있다: 부활의 몸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연옥에서 어떻게 영혼이 불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로마교 신학자들은 연옥에서 영혼들은 다른 종류의 몸을 가진다는 이론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육체에 대한 본질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 몸을 가지고 영혼은 고통을 당한다고 말한다. 어떤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설과 같은 가정에 근거한 것ㅇ다. 어찌보면 성경과 모순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로마교는 종종 두려움의 종교로서 기술된다. 연옥 교리는 두려움의 중앙에 놓여 있으며, 사제들에 대한 두려움, 고백성사에 대한 두려움, 미사를 빠지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고백성사에 대한 형벌, 화가 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등이 있다. L.H. Lehmann은 아일랜드에서의 자신의 소년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계속되는 두려움에 대한 감정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천성적인 두려움은 사실, 카톨릭 나라인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고 양육받은 모든 어린아이들의 삶에 뚜렷한 특징중에 하나이다. 이런 두려움은 죽음 뒤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두려움이 이땅에서의 삶에 모든 부분을 차지한다. 실제로 더욱 큰 두려움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죽고 난 다음이다(TheSoulofaPriest, p. 34).” 


3.  금전적인 문제로 동기화된 연옥설
  

고백성사를 제외하고, 로마교의 어떤 다른 교리도 연옥교리만큼 복음을 그르치고 사람들을 사제들의 종으로 만들었던 것은 없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테젤(독일의 도미니크 수사; 속죄장(면죄부)의 판매를 둘러싸고 Luther와 논쟁한 사람), 루터, 종교개혁 시대에, 그리고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의 압도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었던 남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를 보면 이런 현상을 눈으로 볼 수가 있다. 매년 수 백만 달러의 돈이 꾸며낸 고통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로마교에 바쳐지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불가능하다. 얼마의 수입이 연옥교리와 연결되어서 이루어지고, 얼마만큼이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지고 있는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액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연옥 교리는 사제들의 금광이라고 불리울 정도이다. 수지맞는 수입의 원천이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이 교리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연옥에서의 고통의 기간이 헌금, 사제들의 기도, 미사에 의해서 짧아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선물과 미사와 기도는 죽음 전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 또는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 의해서 드려질 수 있다. 더 많은 것이 살아있는 동안에 드려질 때에, 죽어서 고통받는 기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죽을 때에 사제들이 임종을 맞이 하는 사람에게 간다. 그는 종부성사를 집행한다. 엄숙하게 사면을 선언한다. 임종 1년 뒤에, 연옥에서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드려진 미사에 대한 정확한 헌금이 친척들이나 형제들에게서 거출이 된다. 또한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로마 교회가 돈을 받고, 노골적으로 구원을 판매한다.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교회의 사역은 합당한 선물과 봉사로서 보상되어야 함을 모든 사람들으 공감한다. 로마교는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이는 단체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로마에서 이런 모든 행사에 대한 값이 명시되어 있다.
로마교가 빈곤한 나라에서 웅장한 성당과, 사원과  수도원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연옥 교리때문이다.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 나라에서는 이런 일들이 많다. 비참할 정도로 부서진 가옥중에서 웅장한 건물들이 모든 도시마다 세워져 있는 것을 멕시코와 같은 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교리의 실제적인 효력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렐리아, 멕시코, 상대적으로 카톨릭이 우세한 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황이다. 심지어 한 나라의 1/4 또는 1/3의 재산을 카톨릭이 소유하고 있을 정도이며, 여전히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미사를 위해서 드려진 돈에는 정해진 금액이 없다. 이것은 기독교를 더렵히고 그리스도 시대 이후에 수세기 동안 교회에서는 전혀 행한 적이 없는 혐오스러운 교리이다.

이 싯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다. 교황과 교황을 위해서 일을 하는 사제들이 연옥에 있는 영혼의 고통을 줄이고, 수정하고 끝낼 권세를 실제로 갖고 있다면,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류에 대한 기독교인의 봉사차원에서 공짜로 그리고 기껏이 끝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원들은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있는가! 성인의 공로와 갖고 있는 많은 재산을 통해서 그들의 빚을 갚아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속에 영혼들을 고통받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로마교는 진정한 답을 갖고 있는가?

실제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해바이켜줄 능력이 있지만 돈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이런 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잔인하고 비 기독교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의 기본적인 규칙에 의하면 교회가 항상 이런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사해야 하는 봉사가 아닌가? 심지어 동물에게도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불속에서 꺼내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까? 영혼이 해방되기 전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또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할부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은 연옥교리가 무엇때문에 고안된 것인가를 보여준다. 연옥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천국으로 직행을 한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사제들에게 돈을 지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연옥교리는 , 적어도 미국에 있으며, 교육을 받고 지적이며, 연옥교리가 얼마나 증거가 없는 주장이며, 박약한 교리인지를 사제들은 알것이고, 얼마나 잔인한 교리인가를 인지할 것이다.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많은 돈이 수금되어지고 있다. Stephen L. Testa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연옥교리는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며 어마 어마한 소용돌이라고 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이 갖고 있는 적은 돈까지도 빼앗으며, 있지 않는 것을 교환해서 엄청난 부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기에 부자들은 자기의 유산들을 교회에 맡겼고,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가 가장 부자가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바쳤다. 여러 나라에서 교회는 모든 투자된 금액중에서1/2 또는 1/3의 재산을 가질 정도록 커졌다. 커다란 성당을 짓고 감독의 집을 지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오두막집에 살게 만들었다. 무너지는 집에서 살고 있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 주위에 엄청나게 비싼 성당들과 주교의 집들이 세워지는 것을 오늘날도 멕시코와 유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많은 카톨릭 국가들이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세상적인 권세와 재산들을 교회가 빼앗겼으며 정부가 차압을 하고, 가난한 농부들에게 나누어졌다. 이탈리아에서 1870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교황의 세상적인 지위를 1929년에 회복시켜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 교회는 부자가 전처럼 부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이 로마 교회의 전제주의와 독재주의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booklet, TheTruthAboutCatholics,Protestants,andJews, p. 14).”  



   그리고 Dr. Robert Ketcham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 주어진 상황에서, 사제들이 언제 교구민들에게 언제 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언제John Murphy가 연옥에서 나오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가? 연옥에서의 탈출은 친척들에 의해서 지불된 미사에 의존한다. 하나 또는 두개의 미사를 너무 일찍 멈추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가 나온 다음에 친척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미사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사제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 우리가 미사를 멈출 수 있는지를 사제들은 어떻게 아는가? 연옥에 대하여 사제들만이 알고 있는 어떤 영적인 연결을 갖고 있는가?”

로마 카톨릭 사제들은 언제 영혼이 연옥에서 나오는가를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쓴 사제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 교리가 로마 카톨릭에서 나오도록 만들었던 동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5년이 되었다. 갑자기 사제가 미망인을 불러서 연옥을 위한 미사를 드려야 한다고 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남편은 미사후에도 나오지를 않았다. 후임으로 온 사제가 또 한번의 미사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서 행해지는 미사는 사기이고, 공갈이며 돈을 착취하려는 목적이라고 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곳이 전혀 있지 않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유하게 하기 위한 재판관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으며, 뇌물을 요구하는 경찰관을 신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경에 있지도 않고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반대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사제들을 우리가 신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행위들은 사기이다. 단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을 사제들의 권세아래 있게 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의 모든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4. 성경적인 가르침

        연옥의 교리가 비 성경적이라는 것은 쉽게 증거될 수 있다. 성경은 이런 교리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 연옥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논증이 성경을 통해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연옥에 대하여 지나가는 말로도 전혀 하고 있지를 않다. 대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 5:24]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혼에 대하여 어떤 저주는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강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늘날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분명한 구절을 통해서 죽은 영혼은 즉각적으로 천국으로 갔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였다(요 19:30). 부분적으로 그의 고통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고, 완성된 것이다. 죽음 뒤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에 대한 것을 성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어두운 곳으로 나아갔던 사람은 빛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눅 16:26]  (26)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사도 요한도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일 1:7-9 ]   (7)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따라서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것이 용서를 받는다. 어떤 것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없어지는 죄는 남겨있지 않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또 한다: “[계 14:13]   (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참으로 많다. 그는 어떤 연옥설을 알고 있지 않았으며, 떠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일고,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빌 1:23) 하였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여기에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몸을 떠나게 되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고후 5:8). 빌립보서에서 그는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래서 죽는 것도 좋다라고 하였다(빌 1:21). “무엇을 해야만 구원을 받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고 직선적인 답을 주고 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여기에는 사제에게 고백성사를 해야 한다는 구절을 예상할 수 없다. 고행에 대한 언급도 없다. 연옥과 행위가 따르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그리스도의 속죄죽음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을 갖지 않는 이유이다(롬 8:1)

로마교의 창시자라는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따라서 우리는 같은 죄에 대해서 두번의 형버를 받을 수가 없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  [히 10:17]   (17)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죽음 뒤에 의인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우리들로 하여금 믿도록 강요하는 연옥에 대한 가르침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자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이 교리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로마교는 분명히 알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수세기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했던 이유일 것이다. 
연옥은 하나님의 공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은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단번에 성취되었고, 하나님은 두번에 걸친 형벌을 실행하지 않는다. 한번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속된 영혼은 땅과 하늘의 중간지역에 가지를 않는다.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 갈보리의 희생은 어떤 연옥의 필요성이 없이 모든 죄를 없애기에 충분하다. 

로마 카톨릭은 임종을 맞는 사람에게 나아갈 필요가 없다. 그가 진실로 로마교의 교리를 믿는다면, 그는 오직 죽음너머의 활활 타오르는 불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 뒤에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연옥과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알때에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죽음뒤에 믿는 성도들에게는 어떤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기쁜 소식임에 틀림이 없다. 
로마교는 어디에서 연옥 교리를 찾아내었는가? 네개의 성경구절이 인용이 되었지만, 이 주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마 3:11]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고전 3:15]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유 1:22-23]
  (22)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벧전 3:18-20]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위에 언급한 구절중에 어떤 것도 연옥에 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으며, 이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만한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벧전 3:18-19절은 언듯 보면 그럴싸하다. 그러나 신중히 살펴보면 이런 구절은 단순히 부활해서 살아나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이 구원자임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자임을 증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로마교는 연옥설을 마카비아서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구약이 끝난 다음에 쓰여진 유대인의 책이다. 물론 위경이며, 개신교에선는 권위있는 책으로서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증거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직접 구절의 인용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 뒤에 유다는 군대를 모아 아둘람 성으로 갔다. 일곱째 날이 다가오자 그들은 관습대로 몸을 정결하게 하고 그곳에서 안식일을 지냈다 

다음 날, 장사 지내는 일이 시급해졌으므로, 유다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자들의 주검을 거두어 조상들의 무덤에 친족들과 나란히 묻어 주려고 갔다. 
그런데 죽은 자들마다 그 옷 속에서 율법으로 유다인들에게 금지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전사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시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의 방식을 찬양하였다. 
또 그렇게 저질러진 죄를 완전히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간청하였다. 고결한 유다는 백성에게, 전사자들의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카비 후 12:39-45).”


이 구절들은 실제로 연옥교리를 가리치지 않는다. 이 문맥에 어떤 것도  영혼이 고통을 받는 불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이다. 먼저 이 구절들로부터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이런 기도가 합당하다고 추론한다. 두번째로, 이런 기도는 죽은 자를 위한 구원을 위해서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한다. 추가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견해에서, 이런 구절들은 많은 것을 증명한다. 치명적인 죄가운데 죽은 군인과 우상 숭배로 죽은 자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카톨릭 자체의 교리에도 모순이 된다. 치명적인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은 곧장 지옥으로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장 지옥으로 가며 지구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에 의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연옥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연옥에 대해서 듣지 않은 사람들은 이 구절로 부터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연옥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중요한 교리를 불안정한 구절에 의존해서 만들었다.


5. 교리의 역사  

 

후에 연옥 교리로 성장한 세균은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의 고대시대 , 아마도 인도와 페르시아 중에서 죽음 뒤에 불에 의해서 정결케 된다는 사상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집트와 후에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관습이다. 플라톤은 이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그이 철학 서적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죽음 뒤에 행복은 그의 죄에 대한 온전한 만족감을 가지기 전까지는 획득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자신의 죄가 너무 심각하다면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위대한 알렉산더의 정복 후에, 그리스의 영향력은 서구,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마카비 후서 제 2 장에서 이것을 발견한다. 랍비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서 자녀들이 죽은 부모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후에 유대인들의 사고 구조는 지하세계를  두개로 나누었다- 행복의 장소인 낙원과 고통의 장소인 게헨나-.

  이 교리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서라는 것을 역사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사도 시대의 초기 기독교에서, 말시온과 2세기의Shepherd of Hermes가 연옥설에 대한 설명을 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뒤에 그리스도가 지하로 내려갔고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설교를 하였다(벧전 3:19). 그리고 이겨낸 그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갔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초기 기독교의 예식에서 보여지며 이런 해석들은 죽은 자의 상태가 결코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기에 연옥의 교리를 암시한다고 하였다. 초기 교부 시대의 최고의 학자인 오리겐( 254년에 죽었다)은 불로서의 정화가 부활후에 발생해야 하며, 두번째로 모든 사람과 천사들이 하나님과 화복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 끝에 불로서 정결케 되는 우주적인 회복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430년에 죽은 어거스틴의 글을 보면 연옥 교리가 명확한 형태로 주어지고 있지만, 그것의 단계에 대해서 의심을 표하였다. 그러나 6세기가 되어서 , 590-604년까지 교황의 직분을 수행했던 대 그레고리 황제의 손에서 공식적인 모양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로 종말론이 중세기라는 암흑시대 동안에 이 교리에 첨가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하늘과 연옥으로 분리가 되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들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1439년에 열린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신앙의 항목에 이 교리가 선포되었다. 후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에서 1548년에 확정되었다. 그러나 연옥과 같은 장소가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일에 600년이라는 세월이 흐리고 다시 1000년이 흘러서 확정되었다는 것을 지성인이라면 믿을 수가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무섭고 신비적이 고안물들을 다 없애버렸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성경적인 관점으로 돌려놓았다. 부수적이지만, 동방 교회도 연옥설을 가르치지 않는다.

찰스 핫지의 다음의 말은 이 교리가 중세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영향력을 미치었는가를 보여준다: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던 모호하고 모순적인 견해들을 확정한 사람이 대 그레고리 황제이다. 이 교리에 모양을 갖추고 교회의 규율로서 정하였다. 정부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좋은 수입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이후로 이 교리는 로마교에서 환영을 받았다. 중세기의 전 기간동안 연옥 교리는 공중 토론의 주요한 그리고 지속적인 주제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대중들의 마음을 휘어 잡았다. 모든 사제들과 , 모든 수도생들은 이 교리를 지원하기 위한 모든 생각들을 고안해냈다. 연옥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권세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프란스시파들은 자기 계열의 수장이 매년 연옥에 내려가서 거기에 갇혀 있는 많은 형제 자매들을 구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카르멜회 수사들은 그들의 어깨위에 카르멜 수사들이 매고 있는 훈장들을 갖고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영원토록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동정녀 마리아가 했다고 주장하였다. 예술가들과 조각가들도 붓과 연장을 가지고 대중의 마음에 인상을 깊게 새기기 위해서 연옥의 공포를 묘사하였다. 어떤 사람도 이런 유행하는 신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식한 사람뿐만 아니라 학식있는 자들도 여기에 굴복하였다. 무신론자들과 신자들도 여기에 얷매였다… 성경에 충성하지 않게 되면 어떠한 미신도 막을 수 없음이 증거되었다. 사람이 이성적이고 참된 것을 믿지 않게 되면, 온갖 어리석은 것과  거짓을 믿게 된다( 조직신학 제 3 권 p.770).
    Dr. Ha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모든 카톨릭 성도들의 마음에 짐이 되는 연옥 교리는 초기 교부들이 가르치지 않았고 5세기까지 점차적으로 발전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서 출발을 하였고 순교자와 일반 성도들의 차이점이 터툴리안 시대인 200년에 발견되었다. 교화를 위한 불에 대한 언급이 그 후에 나온다. 그리고 불쌍한 영혼을 위한 미사가 그 후에 나온다. 연옥 교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에 해로운 종양이 부착된 것처럼 서서히 발전되었다 (FundamentalProtestantDoctrines, V, p. 7).


그리고Alexander Hislop은, 로마 카톨릭 교리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연옥 교리는 이방종교 즉 바벨론, 그리스 그리고 로마 신화에서 채택된 것이라고 하였다: 

“ 성경을 제외하고 모든 종교에서, 죽음 뒤에 연옥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항상 발견된다. 어디를 가든지 고대 시대에, 이방종교는 죄인들을 위한 죽음 뒤에 장소가 있다는 증거를 남겨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을 때에 그 장소는 그들에게 맞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중간장소를 고안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에 갖고 있었던 죄들을 정결케 할 장소가 있어야 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연옥의 교리는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발견된다. 이방 로마에서, 연옥의 교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이집트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연옥 교리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리가 대중들의 마음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사제들의 탈취를 위한 조건들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연옥 교리와 함께 발전하였다. 그러나 어떤 기도도 사제들의 간섭이 없이는 효과가 없었다. 사제들의 중재는 돈을 지불함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땅에서 우리는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이방 제사장직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를 받은 친지들의 무너지 마음을 이용해서 장사를 한다. 사랑하는 고인들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데에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6  결론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중간 상태에 대한 성경은 놀라웁게도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적은 계시의 틈을 매우려는 사람들의 추측과 상상력을 낳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 뉴먼은 연옥 교리를 아주 미세하게 언급된 것에서 발전된 가장 분명한 예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상수리 나무가 아주 적은 씨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연옥교리가 자라날 씨앗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 
이 교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로마 카톨릭은 초기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교회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관습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기도는 죽은 자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즉각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성경을 지원을 받지 않는 다른 미신적인 행위라는 사실이다. 이방종교에서 들어온 많은 부패된 것들 중에 하나이다. 부패된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다른 부패한 교리를 증거자료로 제시하는 것을 옳지 않다.
연옥 교리에 상당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한가지 논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고, 이 땅에서 온전히 거룩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천국은 오직 온전히 거룩한 사람과 흠이 없는 사람만 들어간다. 이 두가지 논리는 자연스럽게 많은 질문들을 야기시킨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식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가 씻기움을 받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에, 어떤 정결케 하는 또 다른 장소가 있는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신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성경이다.

이 주제와 연결된 모든 구절들의 면밀한 연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정해진 곳은 오직 두 장소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를 위한 천국과 구원을 얻지 못한 자를 위한 지옥이다. 어떻게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는가에 대한 질문의 응답으로서, 온전한 거룩함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부여되는 것이라는 점이다(갈 2:6).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서 거룩해지지 않는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진술된 것처럼, 신자들의 영혼은 죽을 때에 거룩하게 된다.” 거룩함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의심이 된다면, 죽은 자의 부활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말씀하실 때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 8:3]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죽은 자들과 접촉이 가능하고 죽은 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이방 종교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였을 때에, 모세는  죽은 자를 위해서 선물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들을 본받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죽은 자와의 교통을 위하여 몸에 문신을 하거나 자해행위를 하는 것을 막았다. 신 26:13-14절의 말씀을 보면,

“ (13)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14)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죽은 자를 위해서 헌물을 하거나 죽은 자를 향해서 기도를 하는 것은 ( 마리아 또는 성인 또는 죽은 친척들고 형제를 위해서)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비 성경적인 요소들이다. 

 

임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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