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7 13:14
오해하기 쉬운 예정론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469  

오해하기 쉬운 예정론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버림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뿐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까지도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겠는가? 

첫째, 나는 예정 속에 들어 있을까?

둘째, 저 사람은 어떨까?

째, 전도가 필요 없지 않을까?

넷째,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섯째, 인간이 기계나 동물 같은 운명에 놓이지 않는가? 숙명론에 빠져서 체념하여 사는 것일까?

여섯째, 만약에 구원이 다 예정되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슨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는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셨고 죽으셨는가? 

위와 같은 끝없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정 교리는 어려워서 크게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시켜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사람들도 있고,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며 예정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다」(롬 9:13)라는 이중 예정(二重 豫定)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예정론은 사도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에 의해서 강조되어 오는 중요한 진리 중에 하나이다. 


2. 예정에 대한 성경의 근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 15:16)는 말씀을 비롯해서 17:6,12과 같은 곳에 요한 복음의 예정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가장 많이 나온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장 4-5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느니라」하였고, 그 외에도, 행 4:28, 고전 2:7, 엡 1:11, 딤후 1:9 등에서도 예정에 관한 말씀이 있다. 


3. 신앙에 유익한 예정론 

성경에 나타난 예정에 대한 말씀은 대부분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예정 신앙은 바울의 신앙고백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구원받고 보니, 그 구원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데, 그 구원의 비중을 더욱 생각하여 소급해 올라가 보니, 결국 창세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죄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창세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확실한 것이요 견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정 신앙이 대단히 유익한 것이 된다. 신앙인 에게 유익한 정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정이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감당하시고 인간을 구원과 생명으로 선택하고자 결정하신 사건, 곧 은혜의 선택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예정의 때는 창세전이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으로 뜻을 합하여 예정하신 것이다. 

셋째, 예정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세상 전체가 구원의 대상으로 넓게 예정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골고루 비를 내려 주시듯이 지으신 만물과 만민을 사랑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넷째,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예정의 범위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면서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게 된다. 

다섯째,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감사하게 되고 확신을 가지고 예정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도하게 된다. 「버림과 선택」은 믿음의 결과로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아직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큰 믿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예정론은 기독교의 어느 교리보다도 오해의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교리이다. 클로스터 박사는 그 이유를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고 말한다. 알미니안 주의자들과의 다툼의 요소이기도 하다. 이 글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예정을 살펴보고 그후에 개혁 교회가 정립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예정론)을 고찰 하면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1. 칼빈의 예정론 - 기독교 강요 중심으로 

예정이란 칼빈 신학의 중심교리이며 칼빈의 모든 가르침은 예정에서 비롯된다고 알렉산더 슈바이처와 페르디난드 크리스찬은 주장한다. 그 이후에 역사가들과 교의학자들은 예정을 마치 입증할 필요조차 없는 신앙의 주제처럼 주장하는 말을 75년 동안이나 반복하여 왔다. 
칼빈은 예정의 두 가지 형태, 즉 선택과 유기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강요의 다른 판에서 칼빈은 점점더 예정의 교리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 하였으며, 그 교리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고자, 예정에 관한 몇가지 특별한 논문을 저술하였으니,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제롬 볼세크를 반박하여 1551년에 저술한 "영원한 예정에 관한 논의"(1562년 출판)와 1552년에 피기우스에 반대하여 쓴 두 번째 저서"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가 있다. 
하지만 칼빈은 이중 예정의 교리를 그의 신학의 주요 골자로 삼기 위해서는 아니라 생각된다. 예정의 교리는 교회론적이며 목회적인 열정 때문에 강조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베른레는 "그것은 지나치게 강조 되어져서는 안되며 예정에 대한 믿음은 칼빈주의의 중심교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많은 신학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중요한 교리로 생각하고 있다. 

예정론에 의하면 구원의 놀라운 복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모든 자들에게 예외 없이 자신의 선택을 계시하시며 구원 하신다. 그러나 유기된 자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며 천국의 영광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선택 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구별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행하시며, 우리에게 관련해서 볼때에는 비록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한 표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들의 공통된 교리였던 선택을 자신의 교리로 채택하였다.

칼빈이 1537넌에 제네바에서 불어로 저술한 ""요리문답"은 예정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님께서 영원한 선택을 통하여 그의 자녀로 작정하시고, 천국의 후사가 되도록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며. 결실을 맺는다. 세상이 형성되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자들에게는 뚜렷하고 분명한 진리의 설교란 죽음이 들어있는 죽음의 악취일 뿐이다." 말씀의 설교가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결실을 맺으며, 버림받은 자들에게서는 오직 죽음만을 낳는다는 시실이다. 예정과 섭리의 비교는 이두 가지가 모두 하나님의 의지의 동일한 결정. 즉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결정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인간이란 창조의 직접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반대로 예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섭리의 조건이 되어서, 수단과 방법의 준비에 대해 제한을 한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을 작정하셨으며, 그리고 난 다음에 그가 현재의 생활에 관하여도 그렇게 작정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자." 

칼빈은 예정에 관한 문제를 신론과 연관지어 제기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하였다. 반면에 그는 예정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과 연관지어서, 선택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보다 명백히 밝히고자 하였다. 예정의 교리도 역시 구속에 관한 모든 고찰을 완결짓고 분명하게 밝혀준다. 지금 생명의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파되지 않으며, 언약이 전하여진 곳에서조차 그것을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의 놀라운 비밀이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성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여지가 없다. 거룩한 예정에 의해서 제기되는 문제점들은 불가피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부터 비롯되는 모든 은혜를 받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될것이다. 예정론의 문제점만 지적하는 사람들은 이 원리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많이 감소 시키는가를 알아야 하고, 어떻게 참된 겸손을 소유할수 있는지 말해야 한다. 저들은 구원의 원인을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두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과욕을 피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본래 감추어져 있고 비밀이어서, 주님만이 소명에 의해서 그것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들에게 제시된 믿음의 방법을 고수하지 아니하고, 예정의 미로 속에서 자신의 구원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것은 허황되거나 미친 짓이다 사람은 불경스러운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사색과 예정의 교리에 관한 합당한 지식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두 영역 사이의 한계는 성경이 제시하여 주며,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이 유익하며 건전한가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그래서 칼빈은 자기 자신의 설명을 위하여 오직 계시의 자료들만을 붙잡으려 시도한다. 예정이 성경에 의해서 가르쳐지고 있는 한, 예정은 받아들여야 하며 '연약한 심령' 들을 당혹케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예정에 관한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그가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닌데 어떤 것을 출판하여 교회에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피기우스는 예지에 근거하여 예정을 규정하려고 진력해 내려온 오랜 전통의 후계자중에 한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개개인의 미래 행위와 같은 외적인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미래에 닥쳐올 일들을 미리 알고 계시는 한 예정과 예지는 사실상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예정과 예지 사이의 차이점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지에 따라 이것은 선택하시고 저것은 버리신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혼란케 한다. 우리는 예정을 각 개인에게 그가 행하실 것을 미리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인간을 모두 동일한 조건하에 창조하지 않으시고, 어떤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이에게는 영원한 저주를 명하시기 때문이다. 유기와 마찬가지로,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 의지의 행위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다른 해답이란 없다. 예지와 예정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이 예지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장차 인간에게 내려주실 은혜에 의한 것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그 의지 작용이나 그것을 제한하는 외적원인에 종속시키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둔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뜻의 절대적 독립성과, 믿음에 있어서나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나 그 하나님의 뜻의 우선권 
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믿음이나 혹은 인간의 행위들에 관한 어떠한 예지를 지니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자유롭고 주권적인 선택의 작정을 결코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어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여기에서 기억할 것을 충고한다. "은혜는 결코 사람이 싫으면 거절하고 좋으면 받아 들이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슴이 그 움직임을 따르도록 유도하여 그 뜻하신 바에 따라 택하도록 하여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따라서 후에 따라오는 모든 선한 행위들은 그 은혜의 열매일 뿐이다." 중생은 그 인간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한다.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한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보장 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예정 자체를 더 강조하든지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 강조 하든지 간에,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께 돌아가게 된다. 선택이 그리스도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칼빈은 구원의 확실한 보장을 발견한다.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진 이 구원의 소식을 받을 때,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또한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더 이상 그분의 선택에 관하여 길게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서 선택하신 자들에 관해서, 그들 속에서 선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그들을 사랑하실 수 없으며 그들을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참여자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맡기는 영예를 베푸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의 소명이 선택의 표징이자 증거라고 우리는 가르친다. 확실한 표징 "우리가 열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우리에게 선포되는 교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 표징들은 결코 속이지 않아서, 오직 믿음만이 그 표징들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소명에서 선택에까지 이르는 결론을 얻을 수있다.


우리의 선택에 관한 확실한 보장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려고 주시는 은사들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여, 칼빈은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구원은 결정적이며 잃어버릴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하였 
다. 그는 "선택의 유효성과 확실성이 믿음에 의존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의 견해를 거부하였다; 믿음이란 단지 선택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이지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선택의 완전한 확실성과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머리되신 자를 의지해야 한다." 칼빈은 항상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든지 반드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되돌아간다. 
그밖에도, 그들의 선택은 우리의 의지나 장점에 상관없는 자유로운 선물인 견인의 은사를 포함하는데, 이는 선택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일관되게 공존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순종의 사랑을 성숙시켜주며, 견고케 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며 그분의 영원하신 섭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결코 실패할 수 없다. 선택은 오직 한 번에 영원토록 결정된다. 하나님의 의지가 바뀌어질 수 없듯이, 선택도 또한 때가 지난 것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참된 구성원들은 마지막에 멸망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며 확고한 후원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그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자들만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 즉 유기된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에서 제외시켜 그분의 자녀에게 주실 유업으로부터 그들을 배제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분의 의지이기 때문에 누구도 반문할수 없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잃어버린 군중으로부터 그들을 건져주시는 특별한 결정의 대상이며, 반면에 유기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초래한 파멸에 이르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그대로 내버려진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이런 작정이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적어도 이러한 놀라움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라고 우리가 그것을 인간의 이성에 따라서 생각할 때 그러하다. 그러나 사실 심판은 불공평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개념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의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유기의 작정에 관한 불가해성을 완전히 주장하는 한편, 버림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의하여 정당하게 정죄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그들이 파멸하게 되는 것은 정당하고도 공정하다고 말한다. 유기는 정당하게 시행되어져야만 하는 바, 그래서 선택과 같이, 감추어져 있는 신비에 의해서 정확하게 신자들의 안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며, 단지 전능하심만이 아니라 그것의 긍휼하심도 강조하는데 기여한다. "사악한 자들은 그들이 멸망하는 날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기에 속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 모두가 치욕을 만들기 위한 수단들이므로, 끊임없는 범죄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며, 또한 명백한 표징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정하여진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을 확실하게 해 준다.

종종 유기된 자들도 선택 받은 자들과 거의 흡사한 감동을 체험하게 되어, 자신들이 신자들의 반열에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 그들은 성령의 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은 그 영을 의식이 있게 , 그리고 생생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은 참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비록 선택받은 자들과 일시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을지라도,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 즉 담대하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부르고 간구하는 믿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서만 그 힘이 왕성하다. 사실 교회는 이러한 썩은 구성원들을 츨교시킴으로써 교회를 그들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에 이르도록 권고 하여야만 한다. 비록 현재로서는 선택받은 자들을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 하셨다. 이 예정은 오직 현재의 세상을 초월하여서만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될 것이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267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웹섬김이 12-24 5015
2266 연옥 ( Purgatory) 웹섬김이 12-24 2934
2265 기독교인이 전도하지 않는 9가지 이유 웹섬김이 12-24 2297
2264 예수님의 5가지 칭호와 의미 웹섬김이 12-24 2716
2263 구약성서에 대한 다섯가지 물음 웹섬김이 12-07 3224
2262 오해하기 쉬운 예정론 웹섬김이 12-07 3470
2261 [7]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3204
2260 [6]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2659
2259 [5]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2644
2258 [4]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2549
2257 [3]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2741
2256 [2]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2536
2255 [1]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웹섬김이 12-07 2921
2254 [2]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 단계별 특징 웹섬김이 12-05 2603
2253 [1]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 단계별 특징 웹섬김이 12-05 2754
2252 [14]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웹섬김이 12-05 3013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