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07 13:10
[5]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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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643  

5) 실제적 위로를 제공해 준다. 

이 예정론의 교리는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으로 위로를 줄 수 있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은혜로 선택해 주시고 그 선택하신 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한 마지막까지 버림받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문제될 수 없는 정신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이미 칼빈이 당시 핍박받는 교회의 성도들을 변호하고 위로를 주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를 작성했던 것처럼 이 예정론은 핍박받는 교회를 위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최고의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실제적인 위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8:33-39)


6)선교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본 주제는 예정론을 반대하게 될 때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이기도 하다. 즉 예정론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 사역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것을 침묵하거나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특히 미국장로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려고 할 때 예정론이 선교사역에 방해가 된다는 사상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급기야는 3장의 예정론 내용을 역사적 개혁신학의 선에서 해석하지 않고 보편구원론적인 개념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더 나가서 "선교장"이 추가되기 했다. 먼저 3장의 바뀐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관한 교리는 전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의 교리와 조화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의 아들의 은사는 모든 세계의 죄를 위한 화해로 이해하며, 그의 구원의 은혜를 구하라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멸망한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은, 하나님은 어느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구원을 준비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제공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가 범한 죄 이외의 죄 값으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체의 내용이 알미니안적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은 모든 인류가 구원받도록 하는데 있어서 "조화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장"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로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장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면 예정론은 복음전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마지막까지 선교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선택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악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일지라도 전도의 손길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굳이 "선교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33개 조항 전체가 이미 예정론을 밑바탕으로 해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예정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모든 장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복음전도에 대한 가장 깊은 초석으로 이미 예정론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예정론과 관련해서 좀더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


1) 조직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


오늘날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예정론의 위치를 "신론" "구원론" 중에 어느 쪽에 두는 것이 좀더 바른 개혁신학의 선에 있는 것인가?를 정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점들이 있다. 이미 베트너와 같은 신학자도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전개함에 있어서 첫 부분에서 예정론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유의할 만한 일이다. 그는 먼저 기독교 체계의 다른 교리들만 전개시켰고 심지어 당연히 이 교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일곱 군데에서조차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교리를 충분하게 전개시킴으로써 그 전 체계의 최후를 영광스럽게 장식하였다"38)라고 언급하면서 예정론을 구원론에서 다루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예정론을 신론에서 다루어 왔고 또한 그렇게 신론에서 다루게 될 때 개혁신학의 본질적인 특성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바빙크의 지적을 통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베트너의 주장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정론은 비록 기독교 강요에서는 구원론적인 내용에서 포함되어 있으나 칼빈의 신학사상체계를 보게 되면 이미 1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장에 골고루 이 예정론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원론에만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 보면 예정론이 신론에 더 깊이 기초되어 전신학의 내용의 기초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에 좀더 깊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형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루터는 쯔빙글리나 칼빈과 같이 예정론을 옹호했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 들면서 예정론의 이해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면서 구원론에 집중하면서 예정론의 형태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구원론에서 예정론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결국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부터 보다는 사람의 잃어진 상태로부터 예정을 이끌어 내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39) 

이렇듯 점차적으로 루터의 초기 입장과 전체 종교개혁의 입장을 희생시켜 나간데 비해서, 개혁파의 입장은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그의 논의를 단순히 인간학적 근거에만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근거에 두면서, 즉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 논의를 이끌어 내면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이점에서 그들은 로마서 9-11장에서 죄론과 은총론에서 시작하여 선택론에로 나아가고, 에베소서1:3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도 바울의 예를 따라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바울이 선택을 언급하면서 신론에서 구원의 모든 축복을 선택으로부터 이끌어 내었던 것과 같이(9:29이하, 1:4이하) 개혁신학자들은 신론에서 예정론을 제시하는 구조를 확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40) 

 신앙의 생활은 참으로 선택론을 고백케 하는 조건이 되나, 선택의 사실은 모든 영적 은사의 원천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과 첫 원인인 것이다. 이것은 칼빈만이 아니라, 해밍(Hamming), 부쳐, 올레비아누스 등의 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정이 신론의 한 부분인가(선험적 순서), 아니면 구원론의 시작과 중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가(후험적 순서) 하는 것이 꼭 원칙상 본질적 차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개혁신학자들은 선험적 순서(신론)를 따랐고, 루터파와 알미니안, 그리고 로마카톨릭과 대부분의 근대 교의학자들은, 점차 후험적 순서(구원론)를 취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 차이는 개혁파가 예정론을 선험적이고, 철학적이며, 결정론적인 신론 개념에서 이끌어 낸 것에 있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신론과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칠 때마다 성경의 교리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신은 더욱 철저하게 구별되어 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차이의 참된 원인은 칼빈주의에게 있어서 예정론이 단지 인간론적이고 구원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는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예정론의 가장 주된 목적으로 확립되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42) 

따라서 조직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의식보다는 성경의 계시에 더욱 충실하여 우선 순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을 우선한다면, 신론이든, 삼위일체든, 인간론이든 모든 교의가 구원론 이후에 자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교의학을 다룰 때에, 진리를 신자들의 의식에 주관적으로 들어온 것인 양 다루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한 것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이러한 방법만이 종교적 관심으로서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3)


2)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우리는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을 살펴보면 모든 조항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정확한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제 1 조항에 대해서 즉, 항변파의 예지예정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거부하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전이냐, 타락후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이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참여자들의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도르트신조의 공식적 입장은 '타락후 선택설'로 종결지어졌다. 그러나 화란의 엄격한 신학교수의 고마루스(F. Gomarus) '타락전 선택설'을 고집하였다. 고마루스 외에도 마코비우스(Maccovius)가 있었다. 그리고 남부 화란, 오베리셀(Oversel), 그리고 프리슬란드에서 온 대표자들은 이 문제를 결정치 말고, 양 파 모두를 만족시키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선호했었다. 곧 도르트회의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은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 참여했던 다른 화란 신학자들은 4명인데, 그 중에서 3(Johannes Polyander, Antonius Thysius, Antonius Walleus)의 공통된 입장과 이에 서명한 Sibrandus Lubbertus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여기에 F. Gomarus는 서명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예정은 주께서 은혜로우신 그의 뜻의 기뻐하심에 따라(1:5,11; 11:5) 온 인류로부터 죄로 타락하여 이렇게 잃어버렸던 어떤 사람들을(9:15,16)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던 영원하고(1:4; 25:34) 완전 자유롭고(9:15) 불변한(9:11; 11:28,29) 하나님의 결정이다."44)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정리하여 언급하자면, 타락전 선택설은 선택이 타락의 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작정을 예정의 가치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타락후 선택설은 타락이 선택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들 양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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