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30 12:39
[1]목회자가 계속 성령충만 받는 비결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601  

목회자가 계속 성령충만을 받는 비결 


성령충만함을 받는 방법은 성령께서 완전히 나를 맡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사도행전 2장 14절처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를 주관하도록 성령께 맡김을 의미한다.

운전기사가 자동차를 운전하듯 성령이 나를 운전하심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를 분 명히 인식하면서 성령충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같이 알아보기로 한다.

 

Ⅰ. 성령충만의 양상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행2:1). 오순절은 그 해의 첫 수확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드리는 절기요, 유월절 후에 맞이하는 큰 명절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맥추절 감사예배를 드리기도 하거니와 밀, 보리의 수확만이 아니라 처음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야 한다.

이렇게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오순절을 지키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오순절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매주일의 첫 날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는대로(고전16:2)드려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삶이 오순절을 지키며 사는 삶이라 하겠다.

이렇듯 오순 절을 지키며 사는 사람에게 성령은 오셔서 그를 지배하신다.

성령충만이란 바로 성령이 오셔서 지배하심을 뜻한다. 
사도행전 2장에 자세하게 기록된 사실, 즉 사도들에게 성령충만한 은사가 임한 일도 오순절날 일어난 일이었다.

 

1. 귀에 들리는 소리
그날 모인 이들의 귀에는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렸다.

바람같은 소리라 했으니 바람소리는 아니다.

이미 평소에 듣던 경험대로 그 같은 소리일 뿐, 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이 소리의 방향은 하늘로부터 왓으며 그 상태는 급하고 강하게 부는 돌풍이나 태풍을 상기할 만하다.

이 소리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다 했으니 이 들려진 소리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임이 분명하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들려진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한 구석에만 나타났던 국부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었다.

온 집에 가득하게 들려진 전체적인 것이었다.

 

2. 눈에 보이는 현상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불의 혀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갈라지듯이 보여졌다. 불도 혀도 아니라 그같이 보내졌을 뿐이니, 이미 평소에 눈에 보였던 경험대로 그 같다고 표현됨은 바로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저들에게 보여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 한 것으로 보아 어느 개인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같이 골고루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분명히 주관적이 아니고 객관적이다.

국부적이 아니요 전체적이다.

여기에는 시.청각의 양상만 수록되어 있지만, 우리는 오관을 통하여 오각으로 모든 것을 식별한다.

비록 여기서 후각, 미각, 촉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시.청각은 이들의 대표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감각들이 다 성령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한 감각만 그 지배 아래 빠져서는 안된다.

성령이 모든 감각을 다 지배할 때 비로소 성령의 충만이라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청각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혹은 시각에 무엇이 보였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성령의 충만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어느 한 감각만이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청각은 모든 감각의 대표적 역활이라 할 것이다.
 동역자들과 산에서 찰야로, 혹은 어떤 조용한 곳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내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어떤 은사가 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화하는데는 많은폐단이 생긴다.

그러므로 보편적, 전체적, 객관성 있는 은 사는 공개되어도 좋지만 주관적, 부분적, 국부적인 은사는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아가4:12) 으로 간직하는게 좋다.

만일 이런 것을 공개하여 객관화 보편화하려 한다면,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손해를 입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은 이런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Ⅱ. 성령충만의 핵심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충만함으로 나타난 것이 방언의 은사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 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바대, 메대를 위시하여 그레데 아라비아 등 15 군데에서 모인 사람들이 다 각각 방언이 다른데 이들이 다 알아듣게 말하니 저들이 놀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2:7~8).


본래 방언이 혼잡케 됨은 바벨탑 때문이었다.

성경에,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없으리로다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창11:6~7).

이렇게 해서 인류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충만 후에 교회가 설립되면서 이 문제가 해소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점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핵심적인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이었다.

베드로의 능력있는 설교에 3,000명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다.

교회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이 서로 통용해 썼고, 모이는데 힘썼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믿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였다(행2:43~47).

모범적 교회의 양상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 나타난 놀라운 현상들은 모두 성령충만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가장 핵심되는 구절이 우리가 다 우리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도다(11절)이다.
성령의 충만을 단지 흥분되고 요란스럽게, 은혜받는데에만 둔다면 큰 착각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다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능력있는 설교에서 대중이 모이고 회개의 역사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큰 일이 나타난 것에 성경은 강조한다.
오늘날 교회와 전도자들은 이 핵심을 분명히 드러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선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마16:26).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신다(눅15:4).

성 삼위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이 구원의 설계 는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설계하신 바이다.

임기응변으로 죄의 비탈길로 달음질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 셔서 성자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이것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만세 전에 벌써 작정되었고 때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한생명을 구원하는 이 설계가 이렇게 이루어졌다.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여러 곳에서 온다른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이 들려진 것이다.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인데, 그 죽음을 성자 예수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믿으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일이란 바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한다. 구원이란 죽음에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성령충만의 핵심은 주님이 속죄하셨다는 사실과 이 구원의 복음이 저들에게 들려진 일이라 하겠다.
사실 방언이든 능력있는 설교이든, 죄를 바로 깨닫고 예수의 속죄를 믿어 생명을 얻기만 하면 된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큰 일, 즉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가 없다면 이는 헛 일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기만족에 도취하고 만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신앙이 교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를 깊이 인식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예수를 오래 믿고도 방언을 못해 하는 말따위가 나올 수는 없다.

성령충만의 핵심은 죄를 인식하고 생명을 다시 찾는 하나님의 큰 일이다.

 

Ⅲ. 성령충만의 실제
성령충만의 실제는 어떠한가. 신비로움만을 찾는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갈구하되 육신의 황홀감을 위주로 한다.

이는 육신의 만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육체적 이상 현상이 나타남을 기대한다.

예를 들면, 손을 떤다거나 심지어는 온몸을 떤다.

그럴 때 그들은 성령충만했다고 만족해 한다.

어떤 문제에 몰두하여 기도할 때는 손을 흔들다가도 빨라져 극에 도달하면 이상한 전율이 일기도 한다.

물론 성령충만하는 경우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성령충만의 전체 모양은 아니다.


 사실 방언의 은사가 그렇게 문제시 될 것은 없다.

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게다가 그 은사로 말미 암아 주님의 은혜를 내 몸에 체험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일이다.

하나님의 큰 일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더더욱 귀 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방언을 배우고 가르치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도 이 방언의 은사에 도취하는 그룹들을 보았다.

각각 그 양상이 다른데 어느 그룹은 빠-빠-빠 하기도 하고 따-따-따, 또-또-또하기도 한다.

어떤 일에 몰두하여 간절히 사모하면 그런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 모임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것이 곧 성령충만인 줄로 생각한다.

밤새도록 한가지 일을 놓고 기도한다. 
말에 가속도가 붙고 어떤 한 글자를 반복해서 계속 빠르게 발음한다.

영적 기도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마치 실성한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간절히 구하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그 단순한 되풀이를 통역하기도 한다.

이를 기도의 마이크로 필름기도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까지로 족하다.

사실 모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한번의 마이크로 기도로 족할 뿐이다.

그 기도 모임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자신들과 같은 방법의 기도를 요구할 수는 없다.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해서는 안된다.

국부적 은사를 전체적 보편적 은사로 적용할 수는 없다.

마이크로 기도는 전자현미경을 통해서 드려지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하게 시작했던 것이 어떤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면 전자현미경도 잊고 그 흥분에 혼미하게 되어 미신화되기도 한다.
 영의 역사를 경솔히 평해서는 안된다.

표준은 주관 객관의 조화, 부분 전체의 조화, 국부 보편의 조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

또한 이러한 영적인 문제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십자가의 대속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는 일이 중요하다.

흥분과 자아만족으로 끝이 난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큰 일을 드러낼 공간이 없게 된다.

일일이 영의 신비함을 들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속죄와 구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영에 속한일이라 할 수 없다.
 또 한편 도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성령충만에는 반드시 생활의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회개하여 죄에서 돌아선 사람이 어찌 변화가 없겠는가만은, 윤리적 도의적으로 수양을 통한 교육적 효과를 영의 역사에서 기대하는 것은 잘 못이다.
 의지적으로 사는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다짐으로써 도의생활을 조절한다.

그들은 심지어 덕을 함양하고 선을 쌓음으로써 죄인식을 하지 못한다든지 또는 이를 부인하기도 하는데 이는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죄에 대한 인식없이 도의생활만으로서 속죄구령의 복음신앙을 대치할 수는 없다.
생활의 변화, 성격의 개선 등으로 성령의 역사를 대치할 수는 없다.

영의 지배 아래서 옛 모습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

어느 집단에 가입하여 술을 끊고 담배를 끊었다고 해서 이를 성령충만의 은사 로 볼 수만을 없는 일이다.

오로지 죄인식으로 속죄함을 받은 확신에서 성령충만의 역사를 바로 받는다.
 또한 사회사상면에서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잘못이해되는 일은 너무 비일비재하다.

이사야 선지가 가난한 자에게, 포로된 자에게, 눈먼 자에게, 눌린 자에게(사61:1~2) 복음을 전파한 것처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잠19:17)이라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육적 가난은 일시적이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죄의 포로된 자에게, 영안이 먼 자에게, 죄의 짐에 눌린 자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요19:36)고 하셨듯이, 우리의 주관심사는 죄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함 받으면 눈도 떠지고 앉은뱅이는 일어선다.

성령충만의 역사는 죄를 인식하여 예수의 속죄로 새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큰 일이시다.

인위적으로 사회 혁명을 일 으키거나 또 경제 문제만 해결되면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령의 역사는 죄인식에 있다.

경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이 교회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충만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 듯하다.


 성령충만의 실제는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행18:5)라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 말씀은 말씀의 지배를 받 아 하는 말이다.

다른 번역에는 도의 절제를 받아, 즉 도의 지배를 받음이니 성령이 그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 지배를 받아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였다(행18:5).
 성령충만하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지배 아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라 밝히는 일이다.

성령은 나를 주장해서 이 일을 하게 하신다.

성령의 충만으로 어떤 이상한 행동이나 또는 이 적과 기사가 나타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성령의 충만으로 그런 역사를 하는 것이야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나 몸의 동작이 이상해지고 이적기사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원칙 아래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좋으나, 그러한 증거도 없이 일어나는 현상들은 거론의 가 치가 없는 것이다.


 하나의 실례로써 에스겔 선지를 통하여 실물교수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자(겔47장).

이 말씀은 에스겔이 실제로 받는 실물교육이었다.

성전동문 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제단 남편으로 흐르더니 북문으로 나 가 동문 밖에 이르러 보니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왔다.

성소에서 흐르는 물, 밖으로 스미어 나오는 물은 성령 의 예포이다.

성령의 예포는 기름, 비들기, 바람, 구름, 불 등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서는 흐는 물로 묘사되었다.

처음부터 콸콸 나오는 물은 아니다.

스미어 나오는 물이 큰 강이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도 이와 같다.

오순절엔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역사하였다.

그러나 고요하게 역사 하기도 한다.

예레미야에게 역사하신 것이 그렇다 (왕상19:12~13).
 에스겔은 인도하심을 입어 그 광경에서 다시 실물 교수를 받는다.

그를 인도한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이르더니(겔47:3).

물이 발목까지 영향을 줄 뿐이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건너게 하신바 그때는 더 깊어져서 물이 무릎에 오르게 되었다. 
물의 저항을 받으니 자유를 그만큼 물에 빼앗기게 된다.

또 일천 척을 척량하고 물을 건너게 하신 바 물이 허리에 오르게 된다.

물의 지배를 더 받게 되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건너게 하시는데 깊어서 건널 수 없었다.

그 물이 너무 창일(漲溢)하여 헤엄칠 물이요, 사람이 자유롭게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는 실물교육이었다.

그 뜻은 너무나 분명하다. 물에 전직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령을 받았으되 발목까지 물이 차있을 때는 자기 할 짓을 다할 수 있었다.

공도 차고 달리기도 한다.

무릎까지 차게 되면 발목의 상황과는 달라진다.

두 팔은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물이 허리까지 왔을 때는 몸은 비록 꼼짝못해도 세상구경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이 창일하여 깊어지면 물의 지배를 완전히 받을 뿐이다.
 성령충만의 실제는 성령의 지배아래 전적으로 사는 것이다.

내 할일 다하고 세상 일 마음대로 다 구경하고, 내가 나를 마음대로 주장하는 일 등은 있을 수 없다.

나에게 나의 주장이 부분적이라도 들어간다면 성령의 지배를 전적 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충만의 실제는 성령과 내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합작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 그것은 일은 내가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조금 밀어달라는 뜻이 포함되 는데, 성령충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성령이 일할 뿐이다.

나 자신은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283 알기쉬운 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 웹섬김이 01-11 2755
2282 이스라엘 바벨론 포로기의 역사 웹섬김이 01-11 2845
2281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는지 알 수 … 웹섬김이 01-10 2734
2280 기도용어 ‘축복해 주시옵소서’ 는 틀린말 웹섬김이 01-10 2638
2279 목회자들 성대질환 비상 웹섬김이 12-30 2890
2278 예배생활 초신자 생활가이드 웹섬김이 12-30 2723
2277 기도생활 초신자 생활가이드 웹섬김이 12-30 2645
2276 헌금생활 초신자 생활가이드 웹섬김이 12-30 2952
2275 [2]목회자가 계속 성령충만 받는 비결 웹섬김이 12-30 2513
2274 [1]목회자가 계속 성령충만 받는 비결 웹섬김이 12-30 2602
2273 [4] 교회성장의 원리 웹섬김이 12-30 2723
2272 [3] 교회성장의 원리 웹섬김이 12-30 2996
2271 [2] 교회성장의 원리 웹섬김이 12-30 2809
2270 [1] 교회성장의 원리 웹섬김이 12-30 2958
2269 영, 혼, 몸에 대한 성경적 이해 웹섬김이 12-24 2627
2268 기독교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12-24 3022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