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7-23 13:28
[1]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다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9,256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어 떤 분들은 하나님의 계명인 십일조를 부정하고 폐기된 율법이라 하여 비성경적이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향기" 카페 같은 경우가 있지요. 이런 자들에게 십일조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작성합니다. 잠시 용어약속을 해보면요, 율법이란 구약시대에만 유효했던 하나님의 법도를 지칭하구여, 계명이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오늘날도 포함)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법도를 칭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예 수 그리스도 향기 카페에 가보시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 라는 명분하에 십일조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카페는 십일조 폐지뿐만 아니라 주일성수도 부정하며 대형교회의 성전건축 및 교회 안에서의 목사체계도 강력히 부정하는 카페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주장한다 하십니다. 이에 많은 여린 성도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여론몰이의 십일조 폐지론을 보고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결심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은 바로 온전한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온전한 주일성수>는 우리의 모든 영적 주권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우리의 모든 물적 주권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온전한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그 믿음에 대한 최소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에 십일조와 관련해서만 설명을 드리오니 부디 은혜삼아주시고 앞으로는 십일조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십일조는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증거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예향"카페와 같이 십일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성경 근거는 신약에는 십일조를 내라는 구절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렸다, 라는 구절이 없는 것이요, 구약에 그렇게 숱하게 기록된 십일조는 성전제사용이요 율법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 바, 더 이상의 율법인 십일조를 지키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구속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들 하시는 것이지요.

 

 

 

특 히나 십일조는 세계적으로 극소수만이 지켜오고 있으며 십일조로 인하여 교회의 온갖 폐단이 발생하였고, 십일조보다는 사실 연보(구제)가 더 성경적이며 십일조의 폐단을 떠나서 성경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이었기에 오늘날에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 약에 한 구절만이라도 십일조를 드려야 함을 제시하였다면 오늘날 이런 갑론을박의 논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를 수호하는 주의 종이나 우리들이 제시하는 구절이 있는데요, 근거 구절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라기 3장 8-10절과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말 3:8-10)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러나 십일조를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위 성경구절을 섣불리 제시하다가는 되레 뒤통수를 맞을 것입니다.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릅니다. 속상할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였는지 모릅니다.

 

 

 

먼 저는 말라기 3장 8절을 보시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도둑이라고 믿고 계시지요? 맞습니다! 그런데요 위 말라기 구절에는 심각한 번역의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 1

 

 

 

이 것은 오류라기보다는 오해인데요, 말라기 3장 8절~10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느헤미야 선지자의 13장 14장을 보시면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 부패와 타락의 길로 치닫던 제사장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8절의 십일조 도둑은 백성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였던 것입니다!

 

 

 

오류 2

 

 

 

말 라기 3장 10절의 내용 중에는 "나를 시험하여 보라"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도 십일조만큼은 시험하여 보라 허락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정~ 의심나면 시험하는 마음이라도 한번 실천해보라고 강권들 하십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시험하여 보라"는 것은 명백히 번역의 오류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숱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 6:16)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 10:9)

 

 

 

구 신약을 통틀어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시험하면 아니 되며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바인데, 유독 말라기 3장 10절만큼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십일조가 무엇이 길래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을 시험해볼 만큼 대단한 것인지요.

 

 

 

그 런데요, 말라기 3장 10절에서 제시된 "나를 시험하여"의 시험하다, 라는 히브리어 원문은 "빠한"입니다! 별개의 의미로서 성경에 기록된 "시험하다"의 히브리어 원문은 "나싸"입니다. 나싸는 영어로 말하면 "test", "tempt" 가 되는 것이요, "빠한"은 "prove"가 되는 것입니다.

 

 

 

10 Bring the whole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Test me in this," says the LORD Almighty, "and see if I will not throw open the floodgates of heaven and pour out so much blessing that you will not have room enough for it. <NIV>

 

 

 

10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KJV>

 

 

 

즉, 말라기 3장 10절에 제시된 "나를 시험하여"의 히브리어 원문은 "빠한", 영어로는 prove(증명하다)인데, 유독 우리나라 성경번역에서는 이것이 test(시험하다)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으나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다 시 성경구절, 에베소서 5장 10절을 보시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하셨습니다. 이것도 우리 성경번역의 오류입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시면 "도미카조"인데요 이것은 영어로 prove(증명하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이것을 test(시험하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 해가 되시죠? 그러니 우리는 십일조나 기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으로 그리고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이지 하나님을 향해 뭔가를 흥정하라고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는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가르치거나 부추김을 받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결 론을 말씀드리면 말라기 3장 8절~10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선 제사장들을 향해 그들이 십일조를 바르게 관리, 사용하며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림으로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며, 섬기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류 3

 

 

 

10 절의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도 번역의 오류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 오늘날 주의 종들은 whole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온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인데 영어로는 모든(all)에 해당됩니다. 분량을 다 채웠다는 의미의 whole(온전함)로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 단순히 "모든(all)"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러므로 이 말씀이 일반 백성에 대한 책망이라는 것은 자의적이고 잘못된 해석인 것이고요, "온전한 십일조"는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떼어 먹지 말고 다 드리라는 의미에서 강조된 것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들을 향하여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고 "모두 다" 성전 곳간에 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류 4

 

 

 

또 10절에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에서 <쌓을>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후반에 나오는 말씀 중 "쌓을"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글입니다. 어떤 성경번역에는 <쌓을>을 작은 글씨로 써놓은 것도 있는데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원문에는 없는, 아니 작은 글씨로 적은 이 단어가 언제나 가장 큰 소리로 읽히고 강조되면서 마치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치 복 받는 것으로 외쳐지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결 국 말라기 3장 8~10절의 잘못된 번역과 외침으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십일조로 인하여 도둑이 되어 버렸고, 십일조만 드리기만 하면 복을 엄청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기복주의 신앙으로 흐른 분위기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 물질만 드리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물질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실 때는 반듯이 영계의 공의가운데 채워야할 공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물질은 하나의 표현이요, 통로일 뿐입니다.

 

 

 

이제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마 태복음 23장 23절도 보시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하셨구요.

 

 

 

십 일조 수호의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이 신약구절에도 주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셨으니 십일조는 신약에서도 유효하다, 라고 주장을 하지만, 십일조 반대론자들은 이런 주장을 일축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이므로 그 때까지는 율법에 속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라 주장하지요.

 

 

 

먼저는 이 구절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박 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가 언급되어있는데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면요, 당시에 지배계층들은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부과함에 있어서 자생식물에게도 십일조를 부과하였습니다. 즉 산이나 강, 바다 같은 곳에서 자생(自生)으로 자라나는 식물(박하, 민트 등)을 얻었을 때에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 라고 계명을 만든 것입니다. 자신들도 또 그러하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지켜온 것입니다.

 

 

 

이 에 주님께서는 바로 뒤 구절 24절에 보시면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하셨습니다. 당시 지배계층들이 십일조를 거두고 드림에 있어서 얼마나 위선과 거짓이 가득했는지 단적으로 책망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당시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자생식물이나 일상에서의 작은 수입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드림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고 자만적이었습니다. 푸성귀 몇 포기도 십일조 한다, 라는 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찼고 이에 그러한 것들도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려는 탐욕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이 에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드리려는 정신에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거늘 그러한 정신은 져버린 채, 표면적으로는 하루살이도 걸러내어 십일조를 드리는 거룩함을 보이나 뒷단에서는 약대는 꿀꺽 삼켜버리는 그런 거짓과 위선의 마음을 책망을 하신 것이지요.

 

 

 

그 렇기에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를 놓고 볼 때, 단지 신약에 명시되어 있다하여 이것은 십일조를 드리라는 의미다, 라고 주장하기에는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대론자들도 이 구절의 의미는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이 아님을 제대로 알고서 덤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십일조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십일조의 근원을 파헤쳐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일조가 무엇인지(본질)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율법 전의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성 경의 십일조 기록 중 가장 앞선 것이 아브라함(창 14:20)과 야곱(창 28:20-22)의 십일조입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십일조는 율법을 뛰어 넘는 행위로 오늘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선포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법칙으로 십일조가 존재했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 러나 이러한 주장은 십일조 반대론자들에게 있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종종 십일조 수호론자들 안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땅의 소산이 아니요, 전쟁의 승리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어~? 전리품도 수입인데 왜 이에 대한 십일조가 인정받지 못할까? 민수기 31:25-30에 전리품은 500분의 1 또는 50분의 1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되어 있는데,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십일조(10분의 1)와 전리품은 그 성격이 다르다, 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단 일회성으로 기록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다, 라는 정황을 찾을 수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십일조도 드린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원하였을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28:20-22를 보시면, 야곱의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조건부 십일조”를 서원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본래 정신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것이며 오히려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는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될 모습이기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요, 십일조는 고대사회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던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종교관습이고 조세제도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도 그 연장선에 있을 뿐, 율법 이전에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라는 증거로서는 미약하다, 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분명 성경은 창세기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사건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음은 우리가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입니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283 [2]신 정통주의 웹섬김이 07-21 7002
2282 [1]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연대기 웹섬김이 07-21 6234
2281 [2]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연대기 웹섬김이 07-21 6573
2280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 웹섬김이 07-21 12186
2279 자유의지란 웹섬김이 07-23 8941
2278 [1]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다 웹섬김이 07-23 9257
2277 [2]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다 웹섬김이 07-23 7135
2276 [3]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다 웹섬김이 07-23 5785
2275 보혜사 (Counselor) 웹섬김이 07-23 6639
2274 은혜로운 설교하는 법 웹섬김이 07-23 6865
2273 가톨릭의 연옥설 웹섬김이 07-23 6998
2272 하나님의 전신갑주 7단계 웹섬김이 07-23 5515
2271 악령이 어떻게 영적 지도자들을 공격하는가? 웹섬김이 07-23 7672
2270 성장하는 교회학교 부흥의 공통점 10가지 웹섬김이 07-26 6162
2269 [1]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사상요약 웹섬김이 07-26 6161
2268 [2]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사상요 웹섬김이 07-26 6564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