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7-21 16:20
[2]신 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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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001  

5. 속죄론

 

 

 

인간의 죄성을 중요시하는 신학이라면 어떤 신학이든지 물론 당연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한 한 역사적인 사실 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종교사학파의 역사 안에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되풀이해서 암송할 수 있었던 사도신경의 한 부분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 지"라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 신앙고백을 이 부분만 한다는 것, 즉 예수가 자기의 시야를 넘은 상황들의 한 희생물에 불과하고, 한 선한 목적을 위해 고상한 순교를 한 순교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그들의 '역사적 예수'를 향한 탐구 속에서 무심코 드러낸 그 똑같은 깊이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단순히 하나의 예언자로서만 여긴다면, 또 만일 우리가 예수의 생애를 시간과 공간 상의 연속체(time-space continuum) 내의 한 사건으로 축소시킨다면, 그렇게 되면 자연히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던 것과 똑같은 범주 안에 위치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익명의'(incognito) 그리스도의 베일을 꿰뚫어 보는 그런 신앙, 인간적인 인격을 넘어 신적인 인격에까지 도달하여 보는 그런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죽음.악에 대해서 승리하시는 것까지 감지한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전 5:19)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이상을 넘어,신정통주의 학파 내의 모든 저술가들을 총괄하는 그런 일반적인 진술을 형성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속죄에 관한 모든 이론들을 한낱 인간의 해석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그러한 한 신비를 설명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들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 중의 어떤 것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의 그 어떤 것은 그 자체로 타당하지는 않다. 우리가 신루터파(neo-Lutheran)라고 부를 수도 있을 구스타프 아울렌은 그의 연구서 [Christus Victor] 안에서, 아벨라르두스주의적인 견해 및 그 이후에 자유주의 안에서 주관주의적이며 범형론주의자 계열들(범형론: exemplarism; 희랍 철학에서 이데아가 만물의 범형이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하나님 곧 창조주가 인간 및 만물의 범형이며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세의 학설)을 따라 발달한 학설들이 너무 인본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안셀무스에서 발전해 나온 정통주의자의 보속이론(satisfaction theory)이 비록 진리에 더욱 가깝기는 하지만 너무 '합리적이며', 치밀하고, 이론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울렌은 중세의 견해 및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위하여 '이론'(theory) 이라는 단어와 '교리'(doctrine)라는 단어를 모두 계속 사용하고 있고, 또한 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속죄 관념, 즉 그가 이른바 '고전적인 관념'(clas-sic idea)이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한다. 이 고전적인 속죄 관념이란 인간의 합리적인 체계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학적이며 심리학적인 이율배반들을 포함한,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시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속죄에 대한 이 신정통주의의 이론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지개의 끝이 어디냐라고 묻는 것같이 희미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저술들 속에서 우리는 별로 큰 노력이 없이도 수많은 이론들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6. 종말론

 

 

 

세계 갱신을 기대하던 진화론적 낙관주의(곧 "기독교적 아메리카주의)는 기독교 종말론의 사생아였고 또한 한 르네상스적 인류학(Renaissance anthropology)이었다. 계시를 역사 그 자체와 인접하며 또한 "전체 피조물이 향하여 나아가는 어떤 아득히 먼 신적인 사건"에서 절정을 이루는 그런 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현대신학이 저지른 치명적인 과오들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이라는 역사적인 유비체 및 인간의 윤리적 성취 그 너머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저편에서부터 역사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온다.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신정통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정통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다. 다만 그들이 어떤 특정한 근본주의자들의 신학적 도식이나 종말론 형시들에 편만하여 있는 문자주의(literalism)와 아무런 공감을 갖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이 신정통주의자들은 아무런 도표도 내놓지 않고 또 그들은 다니엘서나 계시록 관점에서 현대의 사건들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신앙은 세상 끝날의 역사(end-history)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그 종국(the end of his-tory)에 관심이 있다.

 

 


7. 유아세례

 

 

 

 신정통주의 안에서 작용하는 실존적인 동기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렇게 중요한 발전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또 다르게 재미있는 것은 신정통주의자들의 지도자들 중 몇몇, 특히 바르트 같은 신학자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을 '시간과 영원의 교차로' 위에 위치시키고(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진리에 대한 열정적인 귀속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런 신학 안에서는 대리인이 행하는 세례 서약의 이론적 설명이 어려워진다.바르트는 성례전 뒤에 숨어 있는 신학에 대해 공개적인 도전을 한 최초의 인물로서-그는 교회의 풍습(practice)에 대해 무엇이라고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현명하게도 그것을 직접 행하는 당사자들에게 맡겨버렸다-한 사람이 세례에 의하여 들어가게 되는 관계성을 인격적으로 수용하는 것의 이런 면에서의 필요성을 계속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밖의 사람들은(브루너) 사도들이 오늘날 행하고 있는 교회의 관습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실까 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시인하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한 완강한 반대들이 쿨만(Cullmann)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운동 내에서도 생겨났다. 그리고 교회의 풍습을 조사 연구하는 특별위원회들이 몇몇 교단에 의해서 후원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교회개혁 위원회는 그 연구 결론에서 바르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한편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는 바르트의 견해들에 반대하는 반작용을 꽤 강력하게 펼쳤다.

 

 


8. 사회이론

 

 

 

 신정통주의 안에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교리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 안에서의 실존적 방법론을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이 신정통주의 운동 내에서의 하나의 분수계로서도 의미가 깊다. 이 분수계로부터 두개의 서로 다른 흐름의 강조점들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내재라는 자유주의적 낙타가 자신의 진영에 코를 들이밀까봐 겁을 집어먹고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무한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그는 브루너가 하나의 자연신학으로서 발달해가는 것을 조금 의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더욱 경계하는 빛을 띠어 갔다. 성령은 성령 자신이 창출하는 그런 접촉점 말고는 복음을 위한 어떤 다른 접촉점(point of contact,Anknuepfungspunkt)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브루너.니버 및 그밖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에 대해 같이 참여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였다. 즉 타락한 인간은 아직도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진정한 정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역사 안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비록 그것이 역사를 초월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은 그 현재의 역사적 및 사회적 형태들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신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다른 그 누구보다도 이 현재의 악한 세계 내에 가능한 한 최고의 상대적인 정의를 구해야 하는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에 종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심각히 씨름하여 왔다.이러한 행위 가운데에서 이들은 인류학.심리학.사회학.역사학으로부터 추출된 통찰들과 성경의 가르침들을 연결해 보려는 노력을 하여 왔다.

그들의 신학적 언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이론에 있어서도 이 신정통주의자들의 대표적 저술가들은 서로 제각기 의견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일치하는 바는 우리가 사회 내의 악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오히려 각 믿는 신자의 구속주이실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의 구속주이기도 한 예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언제나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브루너는 하나의 재구성도고 또 통제된 자본주의를 제창하였고, 한편 니버는 사회주의 좌파로까지 나아갔었다. 이 양자는 모두 우리 시대의 가장 올바른 형태로서의 국가를 하나의 민주적 정치.경제 체제로 보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인생의 이상적인 것으로서 아가페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창하면서도 한편 기독교적인 견해를 비현실적으로 감상화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평화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러한 평화주의는 우리 당대의 사회 안에 있는 그러한 정의마저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조: 신정통주의와 윤리, 위기신학, 신개혁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 장로교회, 개혁교회, 기독교강요, 칼빈주의 5개 신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범형론, 변증법적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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