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교훈인 혼합주의
구약성경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 가운데 유일하게 이 발람 한 사람에 대해서 신약 성경은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 민수기 22장부터 25장까지 내용을 읽어보면 얼핏 보아 그의 잘못을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한 모습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발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선 알아보아야겠습니다. 발람이라는 이름이 가진 뜻을 보면 ‘백성을 파멸케 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유브라데 강변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브돌 주민인데, 브올의 아들이고 술사(術士)입니다(민 22:5, 신 23:4; 수 13:22). 그러나 암몬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민 22:5, 23:7, 31:8).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도착할 당시 암몬,˙모압 등과의 관계에 얽혀 등장하였으며 당시 그는 일류 술사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이미 이 지방에서 유능한 예언자(술사)로 잘 알려져 있었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이 그를 초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고, 술사이므로 조언을 해 줄 때 상습적으로 답례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무속인들이 복채를 받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영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많은 선물과 높여 크게 존귀케 해 주겠다는 말에 나귀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까닭은 그 일이 자신의 직업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발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타고 가던 나귀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길을 가로 막아 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노하였을 때에, 나귀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말을 하기시작하자 마침내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도록 허락되어 위험을 알고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조건으로 발락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발락에게 가더라도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씀으로 볼 때 그는 이스라엘 출신의 예언자와는 전혀 다른 면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락이 그의 풍속대로 발람에게 일곱 제단을 쌓게 합니다(1-6절). 발람은 이스라엘을 절대로 저주할 수 없다는 말에 발락은 불평합니다(7-12절). 그는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일곱 제단을 쌓습니다(13-17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의 위용을 그 내용으로 하는 발람의 두 번째 예언과 그 예언에 극히 분노하는 발락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18-26절). 발락이 브올 산꼭대기에 다시 제단을 쌓습니다(27-30절)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 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가니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발람이 발락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할 일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발락은 바알 산당으로 발람 선지자를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진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발락에게 제단을 쌓도록 하였고 여호와의 계시가 어떻게 임하는가를 위해 그 산에 올라갑니다.
이때 하나님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한 것은 장소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22:4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이 2백만이 넘는 무리들을 보고 놀라서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발락은 다시 발람을 데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일부만 보일 수 있는 곳 비스가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 부분만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에서는 발람도 자기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발락의 기대치는 무너졌습니다. 발락의 생각은 이렇게 하면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줄 알았는데 저주는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이곳까지 인도하고 계시는데 그들의 힘이 들소의 힘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 후에 얼마 동안 발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다가 다시 이스라엘을 부패시키는 자로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기울어지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시사했는데, 이제 그 계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떨어지고, 곧 그 원수를 미디안 사람에게 갚았는데, 그도 그때 죽임을 당했습니다(민 31:8,16,). 비평설(批評說)은 발람의 기사를 몇 가지 조화하지 않는 자료로 구분하여, 특히 민수기 22:22~34의 나귀 이야기는 전체 줄거리에 모순하며, 22:21에서 22:36로 옮겨지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22:35은 양자를 잇는 가교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가 악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그의 단독 여행으로써 동행자가 없는 것, 유브라데에서 모압까지 나귀를 타고 가는 여행의 부자연한 것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평설은 신약의 정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단순한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를 탐욕과 우상숭배를 끌어들인 거짓 선지자로 단죄하고 있습니다(벧후 2:15; 유 1:11; 계 2:14). 구약은 단순히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신약은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으로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즉 마음의 상태에 의해서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결과적으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행동에까지 미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자체로 이미 행동한 것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엇보다 지킬 것이 마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잠 4:23). 마태복음 5:28은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마음의 동기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엄격함 속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퀘넨(Kuenen)은, 민수기 22:2~24:25에 기록된 발람과 31:8, 16에 기록된 발람이 각각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후자를 포로 후 시대의 문서에 돌리고, 22:2~24:25에 기록된 발람은 참 선지자이며, 포로 전 왕정시대 사람이라고 합니다. 페더슨(Pedersen)은, 발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술사와 선지자가 처음에는 같은 종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잠언 16:10의 ‘카삼’(qasam)이란 말은 점술(divination)을 의미하는 말인데 좋은 뜻(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였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학설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성경은 원칙적으로 점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올브라이트(Albright)는 발람이 바벨론의 바루(Baru) 제사장이었다가 여호와 종교로 개종하였고, 후에 이스라엘을 반역한 자라고 주장합니다. 델리취(Delitzsch)는, 발람이 브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마술사였던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곧 ‘브올’이라는 말의 뜻이 ‘멸망시킨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은 마술에 의하여 사람들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발람이 이런 마술을 행하는 자의 아들이었다면 그 역시 마술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이와 같은 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비평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며, 특히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편집설을 지지하면서 모세 오경은 여러 세대에 걸쳐 편집된 것이므로 그 진정성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 태도는 신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영적인 의미를 가르치고자 하는 의도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발람의 행위는 민수기 그 자체로 보면 그를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이었고 술사였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관습대로 돈을 받고 예언을 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엄격하게 말하면 술사로서의 직임이 우선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예외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속인들도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을 사용해서 말하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당나귀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을 하게 하셨듯이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엄격히 예언자의 인격이나 영적 성숙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종 예언자와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위해서 엄격하고 오랜 훈련을 시켜 그 인격을 성숙시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발람의 경우가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신약 시대에도 신실한 예언자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 학교에서 거친 훈련을 통과하여 나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예언의 영’에 의해서 예언하는 경우에 예언하는 사람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숙한 예언자와 일시적으로 예언의 영에 의해서 예언하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지만 믿지 않던 시절의 구습을 좇아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혼합주의’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다른 종교에서 개종한 사람은 그 종교의 행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끌어들입니다. 그 예로 ‘삼보일배’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혼합주의가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발람의 교훈’에 포함되며, 이를 성경은 ‘니골라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골라당은 발람의 교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혼합주의를 따르는 무리를 말합니다. -장봉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