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8-13 18:13
재림이 지연된 지금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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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31  

재림이 지연된 지금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

최재석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눅 11:20)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은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임박한 예수의 재림을 더 강조한다. 바울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믿은 최초의 사람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임박한”(7:26) 재림을 언급하면서 처녀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재림의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7:29)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임박한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신약성서 안에 폭넓게 퍼져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재림이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혹은 속히 일어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13:26, 30: 마 24:34; 눅 21:32). 그리고 로마서(13:11), 히브리서(10:37), 야고보서(5:8) 등의 서신서에서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도 임박한 재림을 언급했다(1:1, 3; 22:7, 10, 12, 20).

그러면 그들은 왜 예수의 재림이 그렇게 임박했다고 믿었을까? 요한계시록의 기록자가 네로에게 모진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예수 재림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가 환상 중에 본 것을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임박한 종말이 정치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이 임박한 종말을 주장한 것은 로마의 정치적 압제가 종식될 날이 가깝다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고, 예수의 재림이 2천 년이나 지연된 지금 우리는 그 임박한 재림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예수의 재림이 한없이 지연될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성서에 관한 역사·은유적 연구를 바탕으로 지연된 재림을 현재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셀리 맥페이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은 언제나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복음’을 해석한다”라고 말했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재림에 의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인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악한 시대‘의 종말, 즉 로마의 정치적 지배와 불의와 폭력의 세상이 끝나는 것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 나라는 평등과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변화된 세상이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가 요구된다. 호세아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며”(6:6)라고 말씀하셨다. 잠언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21:3) 낫다고, 그리고 “사람이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28:9)라고 가르치고 있다. 복음주의자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우리의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는 제사와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위를 중시하는 호세아와 잠언에서의 언급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기도하라는 주기도문에서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주기도문을 기록한 직후에 두 절에 걸쳐서(6:14-15)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우리의 행위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엡 1:6)를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 아브라함의 부르심, 바울의 부르심 같이 행위와 무관하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경우를 본다. 그러나 신구약에는 은혜를 앞세우는 기록보다 행위를 중시하는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

구약에서는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시작으로, 십계명이 포함된 오경, 예언서 등에서 행함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의 기도와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네 복음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라고 말하는 로마서를 비롯한 서신서들, 그리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라고 기록된 요한계시록에서 행위를 강조한다.
 
행동한 천재 신학자 본회퍼가 교회가 행위 없는 값싼 은혜를 구한다고 비판한 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이러한 성경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나를 따르라』에 나오는 <값비싼 은혜>에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사하시는 기독교적인 삶의 ‘결과’이며, 이 삶은 한순간도 예수를 따르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계는 예수가 생존했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전쟁의 위험으로 인해서 조용할 날이 없다. 마을마다 교회의 첨탑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지만, 우리 사회는 권력을 쟁취하려는 정쟁으로 혼란스럽고, 흉측한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나며, 지배와 억압이 판을 치는가 하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누가 그리고 어떻게 이 악한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나라로 바꿀 수 있을까? 그 일을 할 사람들은 예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기독교인들이며 그들이 모인 교회들이다.

그런데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아주 먼 곳에 와 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일은 교회를 변화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임박한 재림이 실현되지 않자, 베드로후서에서 저자는 재림이 연기되는 것은 주께서 우리가 “회개하기”(3:9)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이 2천 년이나 지연된 지금 우리 교회는 회개하여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은혜를 앞세우거나 기도에만 매달린다. 이것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일이다. 본회퍼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값싼 은혜를 구하고 있다.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신다.

많은 사람이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지금,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지금, 교회의 터전이 흔들리는 지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변화된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기독교인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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