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를 함께 믿을 수 있을까? 서울신대의 현 상황은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신학적 혼란을 주고 있다. 사도들의 전승과 교회사의 중요한 신조들,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존 웨슬리도 성경의 무오성과 전능자에 의한 6일 창조를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계시이며 신적인 권위를 갖는다.
창세기의 앞부분은 무에서 유의 창조, 종류대로의 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의 역사성,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죽음, 노아홍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교리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이 진화의 방식으로 우주만물과 인류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사람이 아니며,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아담의 타락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현생인류는 영장류에서 선택된 자들의 후손일 뿐이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창세기의 앞부분을 비유나 풍유로 해석하고, 정통적인 성경이해를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로 비판하며 배격한다.
유신진화론은 심각한 신학적 논리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신진화론자들은 과학주의에 빠져있다. 과학주의란 과학만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한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과학 그 자체와 과학자들의 세계관(과학주의)은 엄연히 다르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모든 주장이 과학은 아니다.
유신진화론에 의하면 창세기 앞부분은 과학발달 이전의 미개 사회의 신화적 사고가 반영되었기 때문에 현대과학과 상충하는 구절들은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과학과 신앙이 상보적(相補的)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을 준거점으로 삼아 성경을 재해석하거나 수정할 뿐이다.
과학의 패러다임은 늘 변한다. 17세기 초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롤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대체한 것이지, 성경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과학이론은 패러다임들 상호간의 경쟁관계를 보여준다. 자연발생설은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폐기되었다. 과학이론은 계속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과학의 잣대로 창세기 본문을 수정하겠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다.
영국 왕립학회는 런던에서 올해 4월 15-16일 ‘표준 우주론 모델에 도전한다’는 주제로 회의를 열었다. 회의 공동 주최자인 수비르 사르카르 교수(옥스포드대)는 빅뱅우주론에 대한 믿음이 종교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빅뱅우주론의 이론적 근거는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평가했다.
과학법칙은 패러다임이며 귀납의 연역적 한계에 갇혀있다. 그런데도 과학주의는 빅뱅우주론과 진화론을 마치 무흠한 진리처럼 숭배한다. 과학주의는 역설적으로 과학자의 비과학적인 편견이다. 검증되고 관찰되는 것만 지식이 된다면, 형이상학적 명제와 성경적인 명제는 진리가 될수 없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의 핵심전제를 그대로 답습한다. 진화론의 핵심은 ‘약육강식, 자연선택, 돌연변이’이다. 수많은 약자가 도태되고 소멸되는 진화하는 세상을 만든 신(神)을 과연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울신대도 교단의 신학적 방향성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와 아담의 역사성, 원죄교리를 믿었던 이명직 목사와 조종남 박사를 마치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분처럼 해석하는 것은 왜곡이다.
일반대학교가 아닌 교단 목회자를 양성하는 서울신대가 교회의 정통주의 신앙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유신진화론을 허용하면 안 된다.
서구 유럽교회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진화론, 비평신학, 그리고 동성애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텅빈 예배당뿐이다. 유신진화론은 기독교를 쇠퇴시킨 원인이지 쇠퇴를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없다.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말씀에 의한 창조, 노아홍수의 역사성, 주의 재림의 약속을 조롱하는 거짓 교사의 등장을 이미 예언했다(벧후 3:4-5).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 진화론과 창조를 겸하여 믿을 수는 없다. 우리 교단은 유럽교회의 실패를 거울삼아 유신진화론을 경계함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