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20 13:57
[1]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 목회의 윤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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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64  

 

바울의 목회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 목회의 윤곽

 

1. 들어가는 말

바울이 교회 역사에 주는 영향력은 크다. 바울이 기독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가 하는 논의가 나타날 정도다.1) 그만큼 교회에 미치는 바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영향력은 종종 바울서신이 기독교 신학과 교리에 점유하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나타난다. 특별히 루터 이후 개신교 신학과 교리는 바울서신에 큰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2) 그리고 이런 무게는 바울서신을 쉽게 교리 서신으로 보는 시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서신이 교리를 전하기 위해서만 쓰인 글은 아니다. 바울을 신학자로 볼 수 있고, 바울이 신학자로서 자기의 신학적인 담론을 서신에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신학자인 동시에 사역자였다. 선교와 목회를 감당한 선교사이자 목회자이다. 따라서 바울서신은 선교적 측면과 목회적 측면을 또한 반영하고 있다.3) 바울서신에 선교사 입장이 나타나는가 하면,4) 목회자의 면모가 잘 배어 있다.

본 글은 이러한 모습 중 목회자 바울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학자 바울의 신학과 사상을 알아야하고, 선교사 바울의 선교 전략과 방법도 배워야 하지만, 목회자 바울의 목회철학과 방법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 바울에 주목하면서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목회’를 숙고하는 것이 필요하다.5)

따라서 본고는 1) 먼저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를 연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살핀 후, 2) 바울서신이 보여주는 바울의 목회 모습을 연구하고, 3) 그것을 현실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바울서신과 교회목회

바울신학이란 말은 쉽게 들을 수 있다. 성경학자와 목회자가 종종 사용한다. 바울신학이라는 통로로 바울서신은 교회의 교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바울목회라는 말은 생소하다. 바울이 목회자로서 활동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바울서신과 교회의 목회를 직간접으로 연결시키는 시각은 그다지 보편화 되지 않는다. 바울서신이 교회 목회에 그다지 깊게 반영되는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울서신은 목회와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울서신에 바울의 목회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 있었다면 했음직한 목회적 가르침과 활동을 서신에 담아 보내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로 보면 이미 목회 활동이다. 그렇다면 바울서신이 교회에 신학적 영향력을 미치는 것처럼, 교회 현실 목회에도 영향력을 미쳐야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의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를 연결하는 시각이 왜 어색해 보일까 하는 의문이고, 둘째는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가 왜 꼭 연결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첫 번째 의문은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 사이의 연결을 가로막는 장벽을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 의문은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를 연결하려는 시각의 정당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2.1. 목회 현장과 바울 서신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 사이의 연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목회는 현장에서 배운다는 통념이다. 교리는 바울서신에서 배우지만, 목회는 현장에서 배운다고 종종 생각한다. 바울서신은 교회의 중요한 사상과 교리의 터전이지만, 목회는 현장에서 경험되고 축적되며 습득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따라서 바울서신이 목회를 가르치고 있다거나 바울서신에서 목회를 배운다는 생각에는 좀처럼 이르지 못한다. 바울서신 안에 이미 목회가 있지만, 바울서신과 목회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현장에서 목회를 배운다는 통념에 막혀 있다.

이런 통념의 밑바닥에는 목회가 선배 목회자나 교회 전통으로부터 습득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후배 목회자가 선배 목회자에게서 목회를 배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또한 좋은 목회 전통이 교회에서 이어지는 것도 마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전제가 바울서신과 목회의 가교(架橋)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좋은 선배 목회자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위에 바울이 있고, 바른 목회 전통을 따라 가면 그 위에 바울서신이 말하는 목회가 있기 때문이다. 선배 목회자인 바울은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자신의 목회를 가르치고 있고, 바울이 실시했던 바람직한 목회 방식은 바울서신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현장 목회의 전통과 선배도 중요하지만, 바울서신이 가르치는 목회가 현실에서 배제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바울서신이 제시하는 목회가 우선될 필요가 있다. 선배 목회자나 교회 전통의 꼭대기에 바울과 바울서신이 있기 때문이다.6)


2.2. 바울서신: 목회의 보고(寶庫)

바울서신과 교회 목회를 연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울서신이야 말로 목회를 가르치기에 적합한 책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바울서신이 목회의 의도를 가지고 쓴 편지라는 점이다. 보통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 부르지만,7) 바울서신 전체를 목회서신이라 부를 수 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목회를 격려하고 목회에 대해 가르친다는 점에서 목회서신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바울서신도 실제 진행되고 있는 목회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목회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목회에 있어 제도와 틀을 제시하기에 목회서신이라 부를 수 있지만, 후자는 실제 목회의 다양한 영역과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또한 목회서신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 부를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바울서신 전체를 목회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바울서신이 성경의 그 어떤 책보다도 목회를 잘 드러내는 책이란 점이다. 어쩌면 성경 전체가 목회의 원리와 지침을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구약 성경의 그 어떤 본문보다도 바울서신은 목회의 원리와 전략뿐 아니라 그 방법과 지침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본문이다. 이것을 네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바울서신은 구약성경에 비해 시간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편이다. 구약의 사건과 역사를 통해 목회 지침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바울서신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쉽다.

2) 신약 성경 중에서도 바울서신은 교회 성립 이후의 역사를 다룬다. 따라서 교회 목회와 연관하여 이해하기가 좀 더 간편하다. 창세기부터 사도행전 이전까지에는 (지역) 교회의 존재가 직접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8) 교회 목회에 대한 가르침을 얻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 하지만 바울서신은 교회(와 그 교회의 어떤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기에 훨씬 간편하게 목회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3) 바울 서신은 성경의 그 어떤 책보다도 교회 목회의 이슈를 직접 다루고 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도 교회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따라서 목회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책들에는 목회적 교훈이 종종 간접적으로 투영되어 있어서 그것을 깨닫는 특정한 방법들이 요구되기도 한다.9) 하지만 바울서신은 좀 다르다. 바울서신은 교회의 실제 문제를 직접 다루면서 그 해결책과 각종 지침을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4) 바울서신은 교회 목회의 다양한 세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교회의 지도 체제 (cf. 살전 5:12-13; 엡 4:11; 딤전 3:1-7; 딛 1:5-9 등), 교회 안의 갈등과 분파 문제 (cf. 롬 14:1-15:13; 고전 1:10-4:21 등), 교회에서 은사의 활용 (cf. 롬 12:3-8; 고전 12-14장 등) 등을 자세히 거론한다.10) 또한 바울서신은 다양한 교회의 모습에 맞는 적절한 목회 방법을 보여준다. 예컨대, 고린도전후서는 문제 교회를 목회하는 방법을 더 잘 알려주며,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개척한 새 교회를 여러 모로 돕는 목회 방법에 좋은 지침을 줄 수 있다.

이런 네 가지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서신은 목회를 가르치기에 아주 유익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목회의 철학과 방법을 배우기가 좋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서신 전체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서신은 목회의 보고(寶庫)이다. 따라서 목회를 말할 때 바울서신을 주목해야 한다.


3. 바울서신이 보여주는 목회

그렇다면 자연스런 다음 논의는 바울서신이 가르치는 목회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바울서신은 다양한 목회 모습을 제시한다. 각 서신은 다양한 목회 지침을 제시하면서 각각의 독특한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여러 시각과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제별로 묶어 분류할 수도 있고, 또한 각 서신의 특징별로 정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함께 고려하여 본고는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바울서신에 나타난 목회 윤곽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회 목회의 본질과 방향(로마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2) 교회 형편에 따른 목회(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3) 교회 정치와 목회 전략(디모데전서, 디도서), 4) 목회자의 본분과 개인적 권면(디모데후서, 빌레몬서).


3.1. 교회 목회의 본질과 방향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점은 교회와 목회의 본질과 방향이다. 교회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목표와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다루는 측면이다. 이것은 목회의 본질과 방향에 직결된다. 바울서신 이곳저곳에서 이와 관련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도 로마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에베소서에서 교회와 목회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바울의 분명한 생각과 시각을 찾을 수 있다.

이 세 서신은 교회 목회와 관련하여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세 서신 모두 바울이 개 교회 목회에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하기보다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가보지 않은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고(롬 1:13),11) 골로새서는 주로 다른 사람의 사역으로 (예컨대, 에바브라의 주도적 사역으로) 이루어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며(골 1:7; 4:12),12) 에베소서는 아마도 여러 교회에 회람할 의도로 쓴 편지이다(엡 1:1).13) 세 서신의 이런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성격은 각 교회에게 교회의 본질과 목표, 방향을 체계적으로 알려주어야 할 목회적 필요와 연결된 듯 보인다.

 

둘째는 세 서신 모두 이론적 설명이 각 서신 전반부에 등장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 권면이 후반부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론적 설명과 구체적 권면이 로마서에서는 1:18-11:36과 12:1-15:13에 등장하고,14) 골로새서는 1:3-2:5과 2:6-4:6에 나타나며,15) 에베소서에서는 1:3-3:21과 4:1-6:20에 기술된다.16) 이렇게 이론과 권면으로 엮어진 구성 형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규명함으로 마땅히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의도와 연결된 듯 보인다. 교회의 본질과 방향을 밝힘으로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려는 목회자 바울의 목회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3.1.1. 로마서: 교회와 목회의 본질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서신이다.17) 아마 바울은 당시 널리 퍼져있는 왜곡된 유대 율법주의의 영향을 염두에 두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18) 따라서 로마서의 신학적 배경에 유대주의자와의 논쟁이 스며들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가 신학적 논쟁만은 아니다.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마교회가 그 논쟁에서 승리하여 바람직한 교회가 되어가기를 바라는 목회적 의도가 있다.19)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여 교회를 온전히 세우려는 목회자의 바람으로 글을 쓴 것이다. 결국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이해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공동체, 즉 바람직한 교회로 자라가기를 원하는 목회자의 심정과 시각이 로마서에 깔려 있다.

이런 의도 때문에 바울은 먼저 새 공동체(새 이스라엘, 새 인류)를 창조해내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참조 1:3-4; 1:9) 무엇인지 1:18-11:36에서 길게 설명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게 된 공동체, 즉 로마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12:1-15:13에서 구체적으로 권면한다.20) 로마서 12:1-2는 이런 설명과 권면을 연결하는 구절이다.

이처럼 로마서는 복음을 가르침으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며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권면하려는 바울의 목회 철학을 잘 보여준다. 로마서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사람 공동체이며, 목회의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공동체(새 이스라엘)를 세우는 활동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생각한 교회와 목회의 본질을 잘 반영한 서신이고, 따라서 독자는 로마서에서 교회와 목회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예수로 말미암는 새 공동체, 새 이스라엘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목회하는 셈이다.

 

3.1.2. 에베소서, 골로새서: 교회와 목회의 목표와 방향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교회가 무엇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두 서신 모두 시작부터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다루면서(참조. 엡 1:1; 골 1:1) 그 뜻의 실현이 거룩한 교회로 나타나는 것임을 밝히고(엡 1:3-3:21; 골 1:3-2:5), 그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엡 4:1-6:20; 골 2:6-4:6).21)

이런 과정에서 두 서신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 실현을 묘사한다. 두 서신 모두 전반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거룩한 교회로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고, 후반부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 거룩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권면한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점을 매우 체계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새 이스라엘, 새 인류)을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인치심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엡 1:3-14). 그 실현의 결과는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케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인데(엡 1:22-23), 그 교회는 개별적 측면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며(엡 2:1-10), 공동체적 측면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합하여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엡 2:11-22).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바라는 목회 기도를 한다(엡 1:15-23; 3:1-21). 그 바람은 결국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권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4-6장). 먼저 거룩한 교회가 지녀야 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원리적으로 제시하고(엡 4:1-24), 이어 구체적으로 풀어 권면한다(엡 4:25-6:20).22)

골로새서도 기본적 틀에서는 에베소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아 새롭게 창조되는 새 사람(인류)을 말하면서(골 1:13-20), 그것이 골로새 교회에 실현됨을 선언한다(골 1:21-23). 이것이 그리스도로 새 사람(인류)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이다(골 1:1, 9). 바울은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바라는 목회 사역을 감당하며(골 1:24-2:5), 이런 목회 사역의 권면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풀어간다(2:5-4:6). 교회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요지 격으로 제시하고(골 2:6-8), 그 자세한 내용을 소극적 측면(2:16-23)과 적극적 측면에서(3:1-4:6) 구체적으로 표현한다.23)

이처럼 두 서신 모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거룩한 교회(새 인류)됨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며, 그 하나님의 뜻이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서신은 바울 목회의 목표와 방향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인류, 즉 거룩한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이고, 그것을 이루는 방향으로 목회가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거룩한 공동체 실현이라는 목회의 목표를 말하면서 목회가 이루어져야 하는 마땅한 방향을 말하고 있다.


각주)----------

1) 참조. Wilson, Paul: The Mind of the Apostle;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idem, <예수와 바울>;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Wenham, <바울: 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이 논의는 바울 연구에 빠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논의의 무게와 판국을 이해하고 가늠하려면, Wenham, <바울: 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pp. 19-63을 참조하라.

2) 어쩌면 이런 생각은 로마서 3:21-26이 ‘로마서, 아니 성경 전체의 가장 중요한 자리이자 주요 핵심’이라고 지적한 루터의 짤막한 표현에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재인용. Moo, Romans, p. 218.)

3) 바울을 신학자, 선교사, 목회자로 보는 생각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에 대한 학자들의 판단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바울신학자들은 종종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에 신학적, 선교적, 목회적 측면이 함께 있다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Dunn(<로마서 1-8>, pp. 68-73)은 로마서의 기록 목적을 ‘변증적’, ‘선교적’, ‘목회적’ 측면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참조. 이한수, <로마서 1>, pp. 31-37.

4) 예컨대, 최종상은 바울이 지니고 있는 이방인 선교사로서의 의식이 로마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최종상, <이방인의 사도가 쓴 로마서>; Chae, ‘Paul’s Apostolic Self-Awareness’, pp. 116-37. 또한 ewett(‘Ecumenical Theology for the Sake of Mission’, pp. 90, 110; Romans, pp. 80-91)은 선교적 목적이 로마서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주장한다.

5) 본고에서는 바울서신의 저작권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는다. 바울이 썼건 다른 사람이 바울의 이름으로 썼건 바울서신이 보여주고 있는 목회 모습을 넓은 의미에서 ‘바울의 목회’로 이해한다. 따라서 바울이 발신자로 되어 있는 3개 서신을 염두에 두고 다룬다.

6) 이 주제는 성경과 전통 사이의 우위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 혹자는 교회가 전통 속에서 사도들의 글을 정경으로 결정하였기에 전통이 성경에 우선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그때 존재하던 여러 전통(문서) 중에 어떤 전통이 사도들의 진정한 전통인지 따져 그것을 정경화한 것이기에, 전통의 절대 우위를 말할 수 없다. 똑 같은 이유에서 성경의 우위가 전통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바른 전통이 지켜져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곧 바른 전통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전통은 성경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7) Guthrie(The Pastoral Epistles, p. 17)에 따르면, D.N. Derdot이 1703년 처음으로 이 세 서신을 목회서신’이라고 불렀고, P. Anton이 1726년에 이 용어를 대중화시켰다고 한다.

8) 물론 ‘ἐκκλησία’라는 표현이 구약 70인역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총회를 말하는 것이기에,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지역 교회’와는 다르다. 마태복음에도 ‘교회’란 용어가 등장하지만(마 16:18; 18:17), 예수님 사역 당시에는 지역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9) 예컨대 마태복음은 그 복음서와 관련된 공동체의 목회적 필요를 고려하여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이 전달하고 있는 내용 자체는 교회의 목회적 지침이라기보다 예수 이야기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목회적 교훈을 얻으려면 어떤 해석적 방법이 동원될 필요가 있다.

10) 바울은 신학자이며 선교사였지만, 또한 이방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던 목회자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세윤(<데살로니가전서>, pp. 50-91)은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목회자로서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11) 로마서 16장에는 바울이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거론되지만,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롬 1:13-15는 분명하게 바울의 로마교회 방문이 처음임을 드러내고 있다.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바울 사이의 친분은 아마도 바울 사역의 광범위함과 당시 사회의 교통 상황, 또한 황제 칙령으로 인한 로마 교회의 교인 이동 등의 요인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12) 참조. O’Brien, Colossians, p. 15; Wright, Colossians, pp. 55, 158.

13) 참조. Lincoln, <에베소서>, pp. 113, 147; Best, Ephesians, pp. 1-6.

14) 참조. Liddon, Explanatory Analysis of St. Paul's Epistle to the Romans, p. vii.

15) 참조. Wright, Colossians, pp. 44-45.

16) 참조. Lincoln, <에베소서>, pp. 56-57.

17) 바울은 롬 1:2-4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정의한 후(기독론적인 정의), 그 ‘아들의 복음’(1:9)이 갖는 기능이 구원임을 롬 1:16-17에서 밝힌다(구원론적인 설명). 그리고 1:18이후 아들의 복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내용을 풀어 설명한다. 현대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롬 1:2-4에 등장한 복음의 기독론적 정의가 초대 교회의 전승을 바울이 편집한 것으로 보고 있다(예컨대, Dunn, <로마서 1-8>, p. 99; 박익수, <로마서 주석 I>, pp. 114-25). 하지만 ‘아들의 복음’에 대한 정의의 신학적 근원지가 바울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 점을 고려할 때 더 적절해 보인다. 1) 갈 1:16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영향력과 대비하며 자기 복음을 변호할 때 ‘아들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2) 갈 1:16에 등장한 소주제들은 (예컨대, ‘아들의 복음’,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 롬 1:1-7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3) 롬 1:1-7의 표현과 생각들은 롬 16:25-26에 다시 등장하는데 (예컨대, ‘선지자들의 글’, ‘믿음의 순종’, ‘모든 민족’, ‘예수 그리스도’, ‘복음’), 바울은 여기서 ‘나의 복음’이라고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을 일부 사용한다고 해도, ‘아들의 복음’을 신학화한 인물은 바울로 보아야 한다.

18) 바울이 반대하는 율법주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전통적으로는 바울이 유대교의 ‘공로주의(legalism)’를 반대했다고 이해했지만, Sanders가 Paul and Palestinian Judaism(1977)에서 제 2 성전기 유대교의 성격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제기한 이후에는 (특별히, pp. 422-23) 바울이 유대교의 ‘우월주의(particularism)’이나 ‘민족주의(nationalism)’을 반대했다는 주장이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참조. Dunn, ‘New Perspective on Paul’, pp. 183-214; Wright, Paul: Fresh Perspectives). 자연히 로마서를 읽는 시각에도 분명한 차이가 생기고 있다. Dunn(<로마서 1-8>; <로마서 9-16>, WBC)과 Wright(‘Romans’, NIB; <로마서 1>; <로마서 2>) 등은 후자의 입장에서 유대교 율법주의를 이해하려 하고, Moo(Romans, NICNT)와 Schreiner(Romans, BECNT) 등은 전통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이 두 입장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국 학자들 사이에도 입장 차이는 존재한다. 예컨대, 권연경(<로마서 산책>)은 전자의 시각을 반영하여 로마서를 이해하려 하고, 최갑종(<로마서 듣기>)은 전통적 시각을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서 본문을 해석하려 한다.

19) Jervell(‘The Letter to Jerusalem’, pp. 51-64)은 로마서의 논의 내용이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과의 논쟁에 필요한 내용이고, 로마에 편지를 보낸 것은 그런 내용에 대한 지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 56). 하지만 이 입장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Jervell은 예루살렘에서 감당할 논쟁과 로마서 내용이 결국 같은 뿌리에 있다는 점을 지나치게 한쪽으로 과장했다고 판단된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미 이방에 있는 유대인 회중과 교회에까지 미쳤고, 그 영향력으로 인해 로마교회는 신학적으로 정리가 될 필요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낫다(참조. Lee, “The Law of Faith in Romans”, pp. 209-212).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내재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회자의 심정과 연결된다.

20) 12:1-15:13을 요약하는 방식은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예컨대, Dunn,<로마서 9-16>, p. 326은 ‘일상의 표현 속에서 재 정의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복음의 외보[sic.]’[외보(外堡)는 번역자의 오역이라 판단된다. ‘성취’라 번역하는 것이 낫다.], 박익수,<로마서 주석 II>, p. 237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라 표현한다.), 그래도 여러 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는 본 문단이 서신 앞부분에 기초하여 로마교회에 필요한 점에 대해 권면한다는 점이다.

21) 이러한 문단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하라. Lincoln, <에베소서>, pp. 46-47, 56-57; Wright, Colossians, pp. 44-45. 아마도 저자가 이런 점들을 부각해서 편지를 쓴 이유는 1) 수신자(교회)가 처해 있는 잘못된 사상의 공격을 염두에 두면서, 2)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 바람직한 교회의 목표와 방향을 전달하기 위함인 듯 보인다. 하지만 수신자와 저자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 두 서신의 배경과 목적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Lincoln, <에베소서>, pp. 102-22; O’Brien, <골로새서 빌레몬서>, pp. 38-50을 참조하라.

22) 참조. Lincoln, <에베소서>, pp. 56-58.

23) 참조. Wright, Colossians, , pp. 44-45.

 

 

이런 바울의 모습은 목회자가 교회의 어려움과 문제를 적절히 인식하여 바른 권면을 제대로 해야 함을 적절히 제시해 준다.



3.3. 교회 정치와 목회 전략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앞에서 다룬 서신들이 보여주는 목회의 특징과는 좀 다른 면을 보여준다.38) 로마서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목회의 본질과 방향을 말하고 있고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후서가 교회의 구체적 문제와 목회의 실제적 처방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정리되고 일반화된 목회 방식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 이런 관심은 네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다.39)

첫째, 이 두 서신은 바울이 직접 목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40)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목회를 보여준다.41)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와 그레데섬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적절한 목회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다(딤전1:3; 딛 1:5). 따라서 목회 현장에 있는 세부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적기보다 목회하는 방침을 제시하는데 치중한다.

둘째, 이 서신들은 교회 정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딤전 3:1-13; 딛 1:5-9). 두 서신 모두 디모데나 디도 자신의 역할 뿐 아니라 함께 목회 지도력을 행사할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디모데나 디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하고, 이들이 교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목회 지도력이 교회 정치라는 틀로 나타나는 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다.

셋째, 교회 조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다. 바울은 디모데나 디도가 목회 지도자들을 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고 그들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딤전 3:1-7, 8-13; 5:22; 딛 1:5, 6-9). 장로(감독)와 집사의 역할과 임직 기준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두 서신은 교회 목회가 어떤 조직적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넷째, 두 서신은 가르침의 전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두 서신이 가르침의 내용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서신은 특별히 교인들을 가르치는 방식과 전략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한편으로는 문제의 사람들을 잘 막는 방법을 설명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을 전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처럼 바울은 이 두 서신에서 목회 방식을 일반화해서 설명하기에, 목회자들은 이 두 서신을 통해 바울이 가르치는 목회 방식을 좀 더 쉽게 습득할 수 있다.

3.3.1. 디모데전서: 목회 훈수

디모데전서는 디모데의 목회에 대해 바울이 훈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에 없고,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바울 대신 목회를 한다(딤전 1:3; 3:14-15).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교회에서 어떻게 목회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42) 이런 점에서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목회 훈수라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직접 목회하는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디모데가 목회해야 할 내용을 서술한다. 하지만 바울이 직접 목회하는 내용과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하는 내용이 사실상 다른 것은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더라면 곧 했음직한 목회 내용을 디모데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3:14-15). 따라서 디모데전서가 보여주는 내용은 한편에서는 바울이 지향하는 바울의 목회라고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가 보여주는 바울의 목회 훈수는 크게 네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하라고 전한다(딤전 1:3-20). 목회자가 감당해야하는 목회에는 사실 싸움이 전제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문제의 사람들과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바울은 크게는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 이런 싸움을 감당했고, 작게는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에서조차 이런 싸움을 감당했다. 그런 그가 이제 후배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런 싸움을 감당하라고 권한다. 그 싸움은 선한 싸움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목회자가 감당해야 하는 목회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것이다.

둘째, ‘믿음의 선한 싸움’은 함께 하는 싸움이라는 점이다(딤전 2:1-15). 선한 싸움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승리하는 싸움이다. 그런데 이런 싸움은 목회자 혼자만이 감당할 싸움은 아니다. 온 교인이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각양의 사람들과 부딪혀야 하는 싸움이다. 남자들은 믿지 않는 세상 권세자들과 부딪힐 수 있고(딤전 2:1-8), 여자들은 믿지 않는 남편들과 부딪힐 수 있다(딤전 2:9-15). 하지만 이들이 함께 붙들어야 할 원칙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것이다.

셋째, 더 나아가 바울은 디모데가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 싸움을 감당할 것을 주문한다(딤전 3:1-13). 그래서 감독(장로)들을 바르게 세우고, 집사들을 적절하게 세워야 한다. 혼자서만 힘들게 목회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로들과 함께 감당하며, 집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이런 권면은 목회 현실에 있어 매우 적절하며 실제적이다. 진정한 목회는 사실상 복수 지도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넷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침의 중요성과 전략을 훈수한다(딤전 3:14-4:16; 5:1-6:2). 바울은 디모데가 가르침에 전력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가르칠 것인가를 훈수한다.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가르침의 책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지적한다. 이미 다른 서신들에 반영되어 있던 가르침의 강조가 목회 훈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 훈수를 잘 담고 있다. 목회 현실 앞에서 고민하던 디모데에게 이 편지는 적절한 지침이 되었을 것이다.43)


2.3.2. 디도서: 목회 전수

디도서는 바울의 목회 방식을 디도에게 전수하는 서신이다. 디도서도 디모데전서처럼 바울이 전달하는 목회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디모데전서가 목회 훈수라면, 디도서는 목회 전수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사역해야 하는 디도에게 어떻게 목회해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전수하고자 한다. 디모데전서가 에베소교회에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어떻게 목회하는가를 돕고자 했다면, 디도서는 그레데 섬에서 디도가 어떻게 목회하여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전수하고자 한다(딛 1:5). 따라서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에 비해 바울이 가르치는 목회의 조감도를 보다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목회의 조감도는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바울은 가르침을 목회 방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으로 강조하고 있다. 디도서는 사실 전체적으로 가르침의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지 본론의 대부분은 가르침의 문제를 다루고(딛 1:10-3:7), 편지의 뒷부분은 다시 그 가르침의 주제를 반복하여 정리한다(딛 3:8-11).44) 바울이 전수하려는 목회에 있어 가르침의 문제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바울이 전수하려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가르침이다.

둘째, 바울은 그 가르침이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잘못된 가르침을 막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바른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극적 측면에서는 잘못 가르치는 사람을 막아야 하고(딛 1:10-16), 적극적으로는 진리에 합당한 바른 가르침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전해야 한다(2:1-3:7). 바울은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야 한다. 가르침의 목회는 양면으로 진행되어야 한다.45)

셋째, 이러한 가르침의 목회는 복수지도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가르침의 목회를 전수하지만, 그것은 디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디도와 함께 할 지도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 처음부터 그레데 섬 각 성에 함께 할 장로들(목회자들)을 세우라고 지도한다(딛 1:5). 그 장로들은 엄격히 세워져야 하며(1:6-9), 그들이 해야 할 최고의 책임은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이다. 그들과 함께 디도는 잘못 가르치는 그룹을 막고 바른 가르침에 힘써야 한다(딛 1:9). 복수의 목회자로 이루어지는 복수지도력은 바울이 디도에게 전수하는 목회의 기본 조직이자 패턴이다.46)

이처럼 디도서는 바울이 전수하고자 하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점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가르침의 목회에 힘쓰라는 것이고, 복수의 목회자(장로)와 동역하라는 것이다. 바울이 전수하는 목회를 한 마디로 하자면 ‘복수지도력으로 바른 가르침에 힘쓰라는 것’이다.


3.4. 목회자의 본분과 개인적 권면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점은 목회자 개인의 본분과 목회자의 개인적 권면이란 주제이다. 디모데후서와 빌레몬서는 이런 주제에 대한 목회적 지침을 적절히 담고 있다. 이 두 서신은 주로 목회자 개인과 관련된 점을 다룬다. 물론 편지 내용이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거나 이 편지들을 공동체가 읽었을 수 있다. 하지만 편지 자체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측면에서 쓰였다. 이러한 특징을 크게 두 가지 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두 서신이 목회 방식을 전수하기보다 목회자 개인과 관련된 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목회자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본분을 개인적으로 권면하는 서신이고, 빌레몬서는 바울이 목회자 개인의 신분으로 오네시모라는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는 서신이다.47) 두 서신 모두 개인적 측면이 강하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인적 서신이 결국 그 뿌리에서는 목회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은 곧 목회자 디모데를 온전히 세우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전한 내용은 곧 바울이 목회자의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서신 그 밑에는 항상 목회라는 뿌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개인적 서신이지만 목회와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디모데후서와 빌레몬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이지만, 큰 시각에서 보면 목회의 뿌리에 결국 연결되어 있는 목회서신인 셈이다.

 

3.4.1. 디모데후서: 목회자의 본분과 사명

디모데후서는 목회자의 본분과 사명을 가르치는 서신이다. 디모데전서가 목회 방식을 훈수하고 디도서가 목회 방식을 전수한다면, 디모데후서는 그런 목회 방식을 이끌어가야 하는 목회자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후에 교회를 이끌어갈 차기 지도자로 디모데를 생각하며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어떤 모습을 견지해야 하는가를 디모데후서에서 전달하고 있다.48) 바울은 크게 세 가지 점을 권면하고 있다.

첫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한다(딤후 1:8-2:13). 교회는 고난에 휩싸여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인 디모데는 고난을 회피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지도자이자 목회자로서 디모데가 흔들리지 말고 온전히 서 있어야 교회 공동체가 설 수 있다. 바울은 교회 앞에 서 있는 목회자 디모데가 흔들리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둘째, 또한 바울은 목회자의 철저한 영적 자기 관리를 요청한다(딤후 2:14-26).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강하게 말한다. 목회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키며, 사역 이전에 영적 자기관리가 먼저임을 드러낸다.

셋째,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한다(딤후 3:1-4:8). 목회자는 자신의 영적 성찰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의 영적 성찰과 안정이 결국 교회 성도에게 나아가야 함을 말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는 이 권면을 ‘엄한 명령’으로 규정한다(딤후 4:1-2). 이 말은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사명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임을 천명한 것이다. 디도서가 가르침의 목회를 전수했다면, 디모데후서는 그 목회를 감당할 목회자의 사명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임을 확고히 한다.

이처럼 디모데후서는 목회자의 본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차세대 지도자인 디모데에게 권면했다면,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 등장하는 차기 목회자들은 항상 이 권면에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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