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11 17:27
[2]아시아 일곱교회(계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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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853  

 

III. 발람의 교훈을 지킨 버가모 교회(계 2:12-17)

 

 1. 양피지의 생산지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65 km쯤 올라가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아시아’ 주의 행정 수도인 버가모가 나온다. 서쪽의 에게해에서 약 15 km쯤 떨어진 내륙 지방에 위치한 버가모는 해발 약 300 m의 뿔 모양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로마의 문필가였던 플리니(Pliny)는 이 도시를 가리켜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도시’라고 불렀다. 버가모는 주전 3세기에 많이 발전하였으며, 주전 2세기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꽃’으로 불리었다. 이 도시에는 20만 권이 넘는 책을 가진 도서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버가모는 양피(羊皮) 종이의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예전에는 나일강 유역의 갈대 껍질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전 2세기에 양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고급 종이로서 인기가 있었으며, 주후 4세기 이후에 성경을 필사할 때에 많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런 양피지(羊皮紙)를 독일어로는 ‘페르카멘트(Perkament)’라고 하는데, 이는 곧 ‘버가모(Pergamum)’라는 지명에서 나온 말이다.

 

 2.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

 

이 도시의 윗 부분에는 여러 종교적 건물들이 있었다. 제우스 신의 제단이 있었고, 치료의 신이라고 하는 뱀 모양의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신당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고 했다. 곧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주전 29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이곳에 자기를 위한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 신전에 끌려가 “가이사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이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한다(12절). 이것은 버가모의 로마 총독이 사람들을 마음대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 소위 ‘칼의 권한(ius gladii)’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육신의 목숨을 주관하는 이가 로마 총독이라면 사람의 생명을 참으로 주관하시는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다.

 

3. 충성된 증인 안디바

 

이런 주님께서 먼저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을 칭찬하신다. 어려움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먼저 위로와 칭찬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 여기서 말하는 안디바(Antipas)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후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디바는 1세기 말 도미티안 황제 때 놋쇠로 만든 황소 모양의 솥에 집어넣어져서 서서히 구워서 죽임 당했다고 한다. 참으로 잔인한 죽임이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도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참으로 귀한 신앙이었고 진짜 신앙이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4.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이렇게 굳건한 믿음을 가진 버가모 교회였건만 잘못하는 것이 또한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믿음이 좋으면 잘못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믿음이 아주 좋은 교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하는 게 있을 수 있다. 버가모 교회도 순교할 만큼 믿음이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셨다(14절). 그것은 곧 그들 가운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14절). 발람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거짓 선지자였다. 그는 모압 왕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멀리서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발람 선지자가 꾀를 내어 모압 여자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제물을 함께 먹게 하고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회중에 하나님의 큰 진노가 임하게 되었다(민 22-25장).

 

주후 1세기에 버가모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니골라 당’이라고 불리었는데(15절), 에베소 교회에도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켰던 이단들이다. 이 니골라는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초대 교회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다고 한다. 그는 원래 이방인이었는데 나중에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타락하여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다 우상 숭배와 음행을 합한 타협주의 노선이었다. 기독교인도 얼마든지 우상에게 제사 드릴 수 있고 음행해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자 버가모 교회의 믿음이 옅은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이 가르침에 미혹되었다.

 

5.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

 

 이런 자들, 곧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16절). 긴 말이 필요 없다. 오직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을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리셨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의 무서운 심판이 속히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끝까지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17절). 여기서 ‘감추었던 만나’란 것에 대해 너무 신비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생하도록 내려 주시는 하늘 양식을 뜻한다. 곧 주님을 끝까지 잘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흰 돌’이란 것에 대해서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면 안 된다. ‘희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 또는 승리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새 이름’은 믿음으로 승리한 자의 이름을 뜻한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졌듯이 주님을 끝까지 믿어 이긴 자들에게는 승리의 새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다.

 

 6. 이기는 자들

 

버가모 교회는 한편으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잘 지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용납하고 말았다.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서 용납한 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해야지, 그들을 용납해 줘야지 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도무지 참으실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순교도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용납하였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도 버가모 교회 성도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죄와 더불어 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좋은 게 좋다”, “편하게 살자”는 식의 신앙이 만연해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너무 관심이 없다. 그저 좋은 대로 생각하고 그저 편한 대로 움직인다. 이런 식의 주관적, 인본주의적 신앙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죄악을 과감하게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순수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준비하고 계신다.

 

 

 

IV.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1. 동업조합의 도시

 

 도아디라(Thyatira)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약 60여 km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였다. 두아디라는 셀류커스(Seleucus) 1세에 의해 군사 요새로 건설되었으며, 주전 19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로마 치하에서 이 도시는 공업 및 상업 도시로 번창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자주색 천이 유명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난 자주 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성 출신이었다(행 16:14). 이 도시에는 또한 각종 동업조합(同業組合, guild)이 발달하였다. 그 곳에는 모직 조합, 직조 조합, 염색 조합, 제혁 조합, 도기 조합, 제빵 조합, 대장장이 조합, 노예매매 조합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동업조합은 각 조합마다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각 회원들은 그 조합에서 가지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야 했으며,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음란한 행사가 이어졌다. 그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이 동업조합에 가입해야만 했고, 그러면 우상제물을 먹고 음행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두아디라 성도들은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 먹고살자니 조합에 가입해서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자니 먹고살기가 힘들고 ···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나라 성도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2. 거짓 선지자 이세벨

 

  이럴 때 사람들은 수를 찾게 된다. “무슨 좋은 수가 없나?” “신앙도 지키면서 장사도 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런 비법을 찾고 있을 때 해결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세벨’은 원래 옛날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였다. 그는 원래 시돈 왕의 딸로서 아합 왕에게 시집 와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크게 퍼뜨린 자였다(왕상 16:30-33, 왕하 9:30-37). 그래서 ‘이세벨’은 우상 숭배를 퍼뜨린 사악한 여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아디라에 있던 거짓 선지자 이세벨도 이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을 섬기게 하고 죄를 짓게 하였다.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20하). ‘가르침’이 미혹의 수단이었다. 요즘의 이단들도 가르침을 주요한 미혹의 수단으로 삼는다. 무슨 재미있는 성경 공부나 무료 신학교 운영 등을 통해 솔깃한 가르침을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한다. 성경 공부도 좋고, 무슨 과정도 좋지만 우리는 거기서 그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판단하여야 한다.

 

 아마 이 여자 이세벨은 영지주의(靈知主義)에 속하는 이단이었던 것 같다. 영지주의란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가르침으로 그 당시 소아시아 일대와 지중해 연안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사상이었다. 이 영지주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육체는 악하다 하여 금욕하고 절제하는 고행주의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는 원래부터 악하니 어쩔 수 없고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반(反)율법주의 계통이었다. 아마 이 이세벨은 이 두 번째의 것으로 영혼과 육체는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몸으로 무슨 죄를 짓든 영혼의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에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었다. “그럼 그렇지, 구원이란 영혼의 문제인데 부득불 육체를 좀 더럽혔다고 해서 구원에야 지장이 있겠나? 게다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니까 할 수 없이 세상과 좀 타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며 위로하였을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일제 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국가의례라고 변명하면서 신사 앞에 절하던 모습과 비슷하다. 이 세상에서 말씀 그대로 다 지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 않은가? 적당히 조금만 타협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을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느냐?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상 앞에 절하고 죄를 지었을 것이다.

 

3.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간계를 다 아신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그냥 가만히 두시지 않으신다.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23절) 여기서 ‘뜻’이란 말은 원어상으로는 ‘신장’ 즉 ‘콩팥’을 가리킨다. 이것은 또한 사람의 ‘기질’ 또는 ‘성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와 감각의 근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신다. 그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속이고 변명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벌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다(21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침상에 던지시겠다고 하신다(22절). 곧 병들어 눕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 비문 조각들에 보면 그 당시에 음행을 인하여 벌받아 병든 사실이 적지 않다고 한다(Moffat). 그리고 그 여자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다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겠다고 한다(22절). 이것은 곧 시행될 임박한 심판을 말한다. 간음과 같은 큰 죄에 대해서는 현세에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때가 많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시겠다고 하신다(2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하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때때로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며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심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4.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는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도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고 말한다(24절). 여기서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아니한”으로 번역해야 더 정확하다. 이들은 소위 ‘사단의 깊은 것’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가르침을 ‘깊은 것’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깊은 진리’요 ‘심오한 깨우침’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도 이단들과 타종교들, 또는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깊고 심오하다고 주장한다. 감히 범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깊고도 심오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양 자랑한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다고 비웃는다. 세속적인 지식인들은 경건한 성도들을 비웃고, 세상의 철학자들은 성경을 따르는 신학자들을 비웃는다. 이런 것들은 다 옛날부터 있어 온 사단의 기만이요 조롱이다.

 

5.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그러나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아니하고 그 죄에 동참하지 않은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소위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깊고 오묘한 이상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게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25절). 그렇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잡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신앙이란 자꾸만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이란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앙, 이미 있는 신앙을 굳게 붙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작정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무슨 ‘새로운 성경 공부’니 또는 ‘기성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너무 현혹되면 안 된다. 우리는 ‘새롭다’, ‘앞서간다’, ‘깨었다’, ‘탁 트였다’는 말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유혹과 이단의 미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아주 그럴 듯한 말과 가르침으로 우리를 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자,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 자는 거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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