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11 17:32
[4]아시아 일곱교회(계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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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958  

VII.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

 

1. 부유한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 요즈음은 에스키 히사르(Eski-hisar)라고 불린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가는 무역로와 버가모에서 남쪽으로 가는 무역로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에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주후 60년에 지진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라오디게아가 로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재건한 것을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도시에는 은행이 발달하였으며 유명한 의학 학교도 있었다. 특히 귀에 바르는 약과 눈에 바르는 안약은 이 도시에서 생산하는 유명한 의약품이었다고 한다.

 

이 라오디게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아마 에바브라가 전도하여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골 4:12 참조). 그런데 이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심한 책망과 징계의 말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권면과 아울러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2.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다”는 것이었다(15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데는 재미있는 지리적인 배경이 있다. 라오디게아 북쪽으로 10 km 쯤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Hierapolis)라는 도시가 있었다. 여기에는 지금도 유명한 야외 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수는 평평한 고원 지대를 흘러서 라오디게아 맞은 편에 떨어졌다. 그런데 처음 히에라볼리에서는 뜨겁고 미네랄 성분이 많던 물이 흐르는 사이에 식어서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미지근한 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사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차다’는 것은 영적으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신선한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을 뜻하며, ‘덥다’는 것은 열심을 내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가 신선하게 되든지 뜨겁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희랍어의 ‘차다(프쉬크로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바람은 19절에 있는 대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심은 덥게 되는 것이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하려면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치우든지 하라”고 했을 때 부모의 본심은 ‘열심히 하는 것’이며 ‘치우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3.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교회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이렇게 미지근한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17절에 있는 대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교회였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교회였다(17하).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사실 이 말씀은 권면이라기보다 책망에 가까운 말씀이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역을 통해 부요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로 연단한 진짜 금을 사서 진짜 부자가 되라는 말이다. 그리고 “흰 옷을 사서 입어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까운 같은 겉옷(trimita)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만든 안약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짜 안약을 사서 발라 자신의 참 모습을 보라는 의미이다.

 

4. 사랑하는 자를 책망함

 

그 다음에 또다시 주님의 권면이 나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신다(히 12:6 참조). 따라서 책망과 징계도 사랑의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징계가 없으면 죄의식이 없어지고 예사로 죄를 짓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책망과 징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것이다. 별다른 수가 없다. 열심을 내고 회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다.

 

5. 문밖에 서서 두드림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사영리 책자의 제일 끝에 나오는 ‘영접’ 촉구의 말씀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원래 본 구절의 의미는 ‘불신자’에게 영접을 권유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다. 그렇지만 조금 원용해서 불신자에게 예수님 영접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님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원문에 의하면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 두드리신다고 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끈질기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전파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이다.

 

6. 축복된 교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신다(20하).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축복된 교제를 말한다. 주님과 함께 가지는 친밀한 교제를 말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친밀한 교제가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며 즐겁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가시면 우리는 허전하고 외로우며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자기의 아집과 교만한 마음과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된 삶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나와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우리 주님을 잘 믿고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 마음의 숨은 생각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피할 수도 없고 거짓으로 속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가 아닌지? 착각 가운데 살아온 나의 인생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문을 열자.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자. 다른 사람의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거기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하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축복스런 주님의 교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큰 권세와 영광에 함께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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