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11 17:31
[3]아시아 일곱교회(계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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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576  

 

V.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계 3:1-6)

 

1. 부유했던 사데

 

 사데(Sardis)는 소아시아 반도의 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 서머나에서 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루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는 주전 1,200년경에 건설되었는데, 3면이 가파른 벽을 이루고 있어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였다. 이런 자연적 조건으로 사데는 크게 번창하였다. 주전 7세기에 루디아 왕국에 알리아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왕이 있었는데, 그가 57년간 통치하는 동안 루디아는 아주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의 아들 크로에수스(Croesus)가 왕이 되었을 때에 루디아는 전설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크로에수스처럼 부유한(as rich as Croesus)’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부귀와 영화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사치하고 방종하게 되었으며, 국력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자연적 지형만 믿고 경계를 게을리 하다가 주전 549년과 218년에 두 번이나 기습을 받아 점령당하기도 했다(3절 참조).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 교회처럼 혹독한 비판을 받은 교회도 없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뿐만 아니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2절).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떤 부위에 병이 있다면 그 부위만 치료하든지 도려내면 되지만, 영적으로 죽는 것은 마치 온 몸이 병들어 전체로 죽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데 교회는 외적으로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임과 각종 행사도 활발하고 많은 신앙의 모양들이 있었다. 외적인 신앙의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다. 내적 생명력, 참된 사랑, 성령의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데 교회에서는 거의 전반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무슨 문제로 서로 싸운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살아 있다면 그래도 가망은 있다. 과거에 한국 교회가 많은 싸움과 분열을 겪었지만, 그래도 영적 능력과 내적 생명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교회는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 비록 분쟁은 없다 할지라도 조용히 죽어 가는 교회는 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 이런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외형적으로는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풍부하고 활발하다. 주일의 공적 예배 외에 각종 성경 공부와 지회 모임, 새벽 기도회와 수요 기도회 및 금요 철야 기도회, 찬양과 율동 등 정신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나 각 개개인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 내적 생명력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갈급해하며, 메마른 영혼을 달래지 못해 방황하다가 지친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더 이상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잠자는 교회는 흔들어 깨우면 되지만, 아무리 부르고 외쳐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라면 이미 죽은 교회가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살아 움직이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3. 남은 바 죽게 된 것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처방을 내리시는가?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다(2절). 아직 죽지 않고 남은 것이 조금은 있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여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그것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것,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고, 침체에 빠진 우리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이 있다. 교회가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예배 형태를 완전히 바꿔 버리든지 또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든지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요즘 교회를 활성화시킨다고 해서 교회에 온갖 전자 악기와 드럼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그런 외적인 것들이 교회에 참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또는 강대상을 치워 버리고 멀티미디어 영상 매체를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린 예배’라는 이름 하에 전통적인 설교 대신에 연극과 쇼를 전개하는 경향까지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4. 처음 신앙의 회복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절). 처음에 기쁨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며 감격하던 그때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미이다. 복음성가가 없어도, 찬양과 율동이 없어도 얼마나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감격했었던지, 별스런 성경 공부나 프로그램이 없어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재미있고 은혜가 되었던지, 그리고 좋은 예배당 건물이 아니어도 마루 바닥에 꿇어 엎드려 얼마나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지, 그 옛날의 순수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고 굳게 하라는 말씀이다. 무엇이 우리의 그 뜨거웠던 열정을 빼앗아 갔으며, 무엇이 그 순수했던 믿음을 흐리게 만들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온 세계가 놀라고 온 세계에 자랑하던 한국 교회의 믿음과 열심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빼앗아 갔단 말인가? 우리는 각자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밝혀 내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온갖 요란한 대회나 행사에 앞서 한국 교회의 현 상태를 진지하게 진단하고 그 참된 원인을 밝혀 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을 회개하고 고쳐서 원래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여야 한다. 혹시 물질의 풍요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덜하게 된 것은 아닌지, 또는 텔레비전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교만해져서 어지간한 은혜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고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만이 참된 해결의 길이요,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다.

 

 5.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그러나 사데 교회에 남은 자들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아무리 죽은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남겨 두시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실망스런 모습들이 많지만 그래도 절망치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이다. 곧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이다. 그저 열심히 봉사하고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그저 시간과 물질을 바쳐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히 움직이면 믿음이 좋다고 하고, 세상의 죄와 타협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물량적으로 많이 움직이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죄악에 물들지 않느냐에 있다.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조용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는 자, 이런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자이다.

 

 사데 교회도 우리 한국 교회처럼 외적으로는 활발하게 움직였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대부분 죄와 타협하고 말았다. 마치 그들의 많은 활동이 그들의 죄를 보상해 줄 수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많은 활동은 돌아보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이 있었으니, 주님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시고 “흰옷을 입고 자기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서 결코 흐려지지 아니하며, 또한 주님께서도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신다(6절). 왜냐하면 천국은 ‘깨끗한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VI.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3)

 

 1. 형제를 사랑한 빌라델비아

 

 빌라델비아는 사데를 지나 서쪽의 에게해로 이르는 긴 계곡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요 무역로의 요충이 되었으며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로마의 우편 도로가 이곳을 지나 페르시아로 통했기 때문에 ‘동으로 향하는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빌라델비아(형제 사랑)로 붙여진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주전 2 세기에 아탈루스(Attalus) 2세는 자기 형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소문이 거짓임이 판명되고 형이 그리스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는 곧 왕위를 내어 주었다. 또 한 번은 로마 당국이 그에게 형을 무너뜨리고 대신 왕이 되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는 이것도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Philadelph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여기서 ‘빌라델비아(Philadelphia)’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2. 말씀을 지킨 교회

 

 이런 형제 사랑의 미덕을 가진 빌라델비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께 칭찬받은 아름다운 교회였다. 이 교회가 칭찬받은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8하).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적은 교회였다. 성도들 수도 적고 부요치 못했을 것이다. 학식도 많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권세가 별로 없는 미약한 교회였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칭찬하셨다. 왜냐하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따랐다. 곧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신다(10절).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다. 인내가 없이는 결실하지 못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을 믿고 그 결실을 보려면 인내해야 한다. 끝까지 주님을 잘 믿어야지, 좀 어렵고 환난이 닥친다고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잘 지켰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3. 계명을 지키는 신앙

 

요즘 우리나라 교회는 이 점이 소홀히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어떤 교회는 아주 뜨겁다고 한다. 손뼉을 치며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또 온갖 전자 악기와 드럼을 동원해서 떠들썩하게 예배 드린다. 이런 소란스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다가 바깥에 나오니 갑자기 기분이 썰렁해진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한 잔 하고 가자”면서 술집으로 향하거나 또는 나쁜 곳으로 향하면 그 뜨거웠던 예배가 다 허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얼마나 뜨거운 예배를 드렸느냐, 얼마나 찬송을 힘차게 불렀느냐를 보시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보시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뜨겁다” 또는 “은혜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이것은 ‘내 마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 혼자 가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지키느냐 하는 데 있다.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1). 사도 바울도 다음과 말하였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계명을 지키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요 주님이 칭찬하시는 신앙이다. 그저 ‘뜨겁다’든지 ‘은혜롭다’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주님 앞에 칭찬받을 것이 못된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요 내 마음이 기뻐하는 것이지, 아직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열린 문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급을 약속하셨다. 우선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는 뜻이다. 곧 구원받는 성도들을 계속 보내주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 대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어떤 목회자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교인들을 끌어 모아 놓고 나중에 교육시키겠다고.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먼저 나의 말을 지켜라. 그러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겠다고.

 

다음에 9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나타내 주겠다고 하신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의 성도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 중에서 몇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온갖 욕과 비방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법정에 고소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유대인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단의 회’라고 낙인찍혔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빌라델비아에 일어났다. 이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해 특별히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시험의 때’란 아마도 주후 113-114년의 트라얀(Trajan) 황제 때의 핍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는 것은 원어상 “시험의 때에 지켜 주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할 때에도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켰으므로 주님께서도 그 교회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지켜 주신다. 특히 환난 날에, 시험 당할 때에 우리를 지켜 주신다.

 

5. 권면과 약속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11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은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에 이어 세 번째 나오는 말씀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굳게 잡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잡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에게 계시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할 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이다(12절).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의 구원이 확실함을 말한다. 그러한 자를 주님께서 확실하게 구원하시고 높은 자리에 앉히시겠다는 뜻이다.

 

6. 참된 성도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렇게 과분한 칭찬과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성도들의 수가 많아서인가? 재정이 넉넉한 교회라서 그런가? 아니면 권세 있는 성도들이 많아서인가? 아니다. 오직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극한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기 때문”이다. 곧 순교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적은 능력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켜 나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며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외적인 모양은 요란하지만 참된 신앙이 희박해져 가는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참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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