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11 17:25
[1]아시아 일곱교회(계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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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361  

아시아 일곱교회(계2:1-3:22)

 

아시아 일곱 교회란 주후 1세기말에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서부 지역에 존재했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한다. 이 교회들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여행사를 통해 현지에 직접 가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나 굳이 많은 돈을 들여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지금은 가봐야 옛날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돌무더기와 약간 남은 파편들뿐이다. 차라리 앉아서 성경 말씀과 고대의 기록들을 통해 과거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I.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계 2:1-7)

 

1. 바울과 요한이 목회했던 교회

 

그러면 먼저 에베소 교회부터 가보기로 하자.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서쪽으로는 에게해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카이스터(Cayster) 강이 흘러 들어오는 교통 요로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중요한 상업,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주후 1세기에는 인구 25만 명을 가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 에베소에는 큰 운동 경기장(스타디움)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과 2만 5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극장이 있었다(행 19:29). 또한 에베소에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나 큰 아데미 신전이 있었다(행 19:27).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에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목회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2차 전도여행 때 잠깐 들러 복음을 전했으며(행 18:19), 3차 전도여행 때 와서 약 2년반 동안 이곳에서 목회하였다(행 19장). 그 당시 에베소의 인구와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복음 전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후에는 디모데가 와서 목회하였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목회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후에 이곳에서 오랫동안 목회한 중요한 지도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이 교회를 담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90년대 말,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이 교회를 맡아서 복음을 전한 마지막 사도였다. 그러다가 도미티안 황제 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93-94년) 그는 밧모(Patmos)라는 섬에 유배되었는데, 그때 그가 환상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한 것이 곧 요한계시록이다(계 1:9-11).

 

 2. 이단을 막아낸 교회

 

우리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가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먼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 칭찬의 핵심은 에베소 교회가 이단을 잘 막아냈다는 것이다(계 2:2-3).

 

정확히 언제 어떤 이단들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세기말에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서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이단들은 주로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색채를 띠는 것으로서,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과 혼합하여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요한일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보면 그때에 이단들이 에베소(또는 에베소 주변)의 교회에 들어왔으나 교회가 그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들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다(요일 2:19). 이들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서로 다르다고 하며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다고 한다(요일 2:22, 4:2,3).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당시 에베소에 들어왔던 이단은 ‘니골라 당’이라고 한다(계 2:6). 이 니골라 당이란 이름은 이레네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에서 온 것이라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여튼 이들은 그 당시 교회를 미혹하던 이단임에는 틀림없다. 이들은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버가모 교회에도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였다. 이 니골라 당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 발람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다(계 2:14,15).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런 이단들의 미혹과 시험을 잘 뿌리치고 막아내었다. 그들의 거짓된 것을 잘 드러내고 물리쳤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들에 대한 중요한 승리요 크게 칭찬받을 일이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아마 사도 바울에게서 3년간 성경을 잘 배워서 뿌리가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떠나면서 당부한 말씀을 잘 기억하고 흉악한 이리들을 잘 분별하고 막아내었을 것이다(행 20:29,30). 무엇보다도 사도 요한이 목회자로서 강단을 지키고 있는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3.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칭찬과 함께 책망을 받았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4절).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바울의 전도를 받았을 때는 은혜와 사랑이 충만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을 깨닫고는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을까?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혹 누구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고 덮어주고 등등 ··· 참으로 사랑이 풍성한 교회였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단들의 도전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 보니 그만 사랑이 식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걸핏하면 형제를 의심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따지고 들고, 여차하면 잘라내고 하다보니 그만 차고 냉랭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복음의 진리는 지켰지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받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하려고 애쓰다 보면 이래저래 충돌이 있게 되고 갈등과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와는 반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랑이 최고다”라고 하면 혹 교회는 평안하고 사랑이 있을지 모르나, 교회의 순수성은 없어지고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바르게 운영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자칫 사랑이 약해지기 쉽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아무리 교회를 순수하게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쌀쌀한 교회가 된다면 이것은 결코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러하였고, 이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받게 되었다. 

 

4. 처음 사랑의 회복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래도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5절) 첫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해결책이 여기 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먼저 할 일은 자기가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떨어졌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원인을 찾아내어야 한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무엇을 회개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회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약을 아무리 투여해 봐야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회개하여야 한다.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회개란 자기의 잘못을 자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실제로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그런데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사랑을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가졌던 그 기쁨, 가슴 뿌듯함, 물밀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 그 첫사랑의 기쁨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감정적인 사랑은 대개 처음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지 그후에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첫 사랑이란 젊었을 때 처음 사랑할 때에 있는 것이지, 결혼하고 나서 10년, 20년이 지나서도 그런 애틋한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한다고 할 때 그런 감정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그러한 ‘감정’의 회복이 아니다. 주님께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라는 의미이며, 또한 교회 안에 형제들을 사랑하며 돌보라는 뜻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면 형제의 잘못을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지 말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위로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참 사랑의 성숙이다. 아름다웠던 옛 시절은 추억 속에 고이 묻어두고 지금은 옆에 있는 남편(아내)과 자녀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이 참된 사랑의 회복이며 성숙한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예전보다 더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이다.

 

 

 

II. 죽도록 충성한 서머나 교회(계 2:8-11)

 

1. 로마에 충성한 서머나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0여 km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마치 우리 나라의 태안반도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온 반도의 남쪽에는 에베소가 자리잡고 북쪽에는 서머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서머나는 옛날 루디아(Lydia) 왕국 때부터 중요한 무역도시로 발전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 도시에는 스타디움과 도서관이 있었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공극장이 있었다. 대서사 시인 호머(Homer)가 바로 이 도시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머나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이었다. 수차의 카르타고와의 전쟁 때 서머나는 로마 편에 서서 지원하였으며, 로마 황제를 위한 신상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서머나는 무엇보다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이 도시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사진 곳에 세워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파구스(Pagus) 언덕의 거리는 ‘황금의 거리’라고 불리웠다. 그 거리의 양쪽 끝에는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사시사철 신선하고 시원한 기후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도시는 ‘이즈미르(Izmir)’라고 불리는데,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 현존하는 유일한 도시이며 오늘날 터키의 유명한 관광휴양지로서 구라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2. 유대인들의 훼방

 

이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아마 서머나가 상업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으며, 로마의 관청에 열심히 고소하였다. 그러니 동족이 동족을 고소하는 그런 꼴이 되었다. 로마 사람이 볼 때에는 같은 유대교끼리 서로 싸우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글라우디오 황제는 주후 49년경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로마를 떠나라고 명하기도 했었다(행 18:2 참조). 서머나에서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괴롭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비방하기도 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압력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특히 핍박 때에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관리들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주님께서는 먼저 위로하셨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라고 하신 ‘팔복’의 말씀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진정 복 있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님 때문에 ‘찌들리고 박해받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곤고한 자들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로 이들을 위해 천국을 예비해 두셨고 또한 현세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정체를 말씀해 주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내가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할례 받은 것은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상은 ‘사단의 회’라고 하신다. 무서운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도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실상은 ‘사단의 회’인 것이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참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저 유대인들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참 유대인이요 참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며, 이 세상 어디서든지 주의 뜻을 행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3. 10일 동안의 환난

 

주님께서는 이러한 서머나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 교회가 앞으로 당할 환난을 미리 가르쳐 주셨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절). 여기서 ‘10일 동안’이란 꼭 문자적으로 10일을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10일’이란 ‘끝이 있는 한정된 기간’을 뜻한다(Greijdanus). 길지 않은 짧은 기간을 뜻한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를 포함한 소아시아는 93-94년 도미티안 황제 때에 큰 핍박을 받았고 또한 113년-114년 트라얀 황제 때에도 큰 핍박이 있었다. 그 당시 핍박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로마제국의 ‘결사 금지법 위반’이었고, 둘째는 ‘국가 제의 불참’이었다. 이 ‘국가 제의’는 황제를 ‘주(主)’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며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4. 죽도록 충성하라

 

이 모든 어려운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 나라 교회의 장로 장립식이나 권사 취임식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래서 대개 “죽도록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라” 또는 “죽는 날까지 쉬지 말고 열심히 봉사하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열심히 교회 예배와 모임, 회의 등에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교회 일 열심히 하고, 또한 물질적으로도 있는 힘을 다해 섬기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사실적으로는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본문의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원어의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면 “죽음까지 충성스러워라”가 된다. 이 말은 곧 죽음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신하가 한 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곧 변절치 말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라는 임금을 섬기는 신하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심지어 죽음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충신(忠臣)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며 곧 순교신앙이다. 예수 우리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충성이다.

 

 5. 생명의 면류관

 

주님께서는 이렇게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10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잠깐이지만 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은 영원하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생명을 주신다. 이것을 그 다음절에서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생명을 조금 연장받은 사람은 죽어서 영원한 불못에 던지우지만(계 20:15), ‘죽도록 충성한 자’ 곧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킨 자에게는 이러한 둘째 사망의 고통이 없으며 우리 주님과 더불어 영원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킨 교회였다. 2세기에 이 교회를 맡아서 목회했던 지도자는 폴리갑(Polycarp)이었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충성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맡아 섬기던 폴리갑은 155년경에 핍박을 받아 순교하였다. 화형장에 끌려갈 때에 로마의 총독이 그에게 다시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놓아주리라.”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 왔는데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나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구주이신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 그의 왕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위협과 어떠한 협박도 그의 충성을 바꿀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화형대의 불은 한 시간 정도 타다가 꺼지고 말지만, 주 예수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신하들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 이런 왕이 우리에게 계심을 기뻐하고 이 왕을 믿고 섬길 수 있게 된 것을 우리 모두 감사드리자. 그리고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이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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