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7-02 15:57
[1]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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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338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 한정건, 현유광 -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 크게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비록 신약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게 보이지만(마23:23, 눅11:42),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주장은
전혀 없는 만큼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이 없이 십일조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셋째는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이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도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교회가 필요할 때에는 각자의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는 원리가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 보고서에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십일조의 유래와 그 실례(實例)들을 살피고(I), 그 실례들을 기초로 하여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practices)를 밝히겠다(II). 그리고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율법의
유효성 문제와 함께 다루어 본다(III).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성경적인 헌금관을 제시한다(IV).


I.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유래(由來)

1.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

1) 족장들의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18-20이다. 북부지역 네 왕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의 영접과 축복을 받는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의 관습은 셈족
이외의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종 보이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각주1. C.L. Feinberg, "Ti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제5권, p.756.)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당시의 습관을 좇아서 드렸다고 보아야 할까? 비록 아브라함 이전에 십일조의 관습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500여년 후에 율법이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박윤선 박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로 주고받은 것을 보면, 이 제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각주 2박윤선,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문제,” 『신학정론』 제6권 제1호 (1988, 7), 148)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린 것이었다.
②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적을 완벽하게 격파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드린 헌물이었다. (각주 3. 김영철, “십일조의 성경적의미,”
『신학정론』 제4권 제2호
(1986, 11), 335)

이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의 서원에서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박윤선 박사는, “그것은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계시에 의해 그 가정에서 지켜오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각주 4. 박윤선, 앞의 책)

아브라함의 가정이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대대로 지켜왔는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라고 한 말에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십일조가
자발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여기에서 추가해야 할 십일조의 중요한 원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이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이다.

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

족장 시대에는 십일조가 앞에서 본 것처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각각 한번씩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부과된 의무가 되었다. 모세의 율법에서 보면, 십일조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레위기 27:30-33에 나오는데, 땅의 소산과 소나 양의 십분 일을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허락하신 소산 중 십분의 일을 벌칙까지 부과하시면서 요구하신다.
둘째로, 민수기 18:20-32에 나타난 십일조다. 민수기에서는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의 용도가 부각된다. 하나님은 레위지파
사람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으셨다. 레위지파 사람들 중 제사장들은 제사를 주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 드릴 때에 보조하는
역할과 성막을 간수하는 일에 전념했다. 따라서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나머지 11지파의 사람들이 책임을 졌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 자손에게 주어 그들의 생활을 도우셨다. 민수기 18:26에서는
레위인들의 십일조가 나온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얻은 것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거제로 드려서 제사장 가족들을
공궤한다.

셋째로, 신명기 14:22-29을 보면,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서
먹고 즐기도록 하신다. 또 매 삼년(안식년 후 제3년과 제6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 사용하라고 하신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원리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십일조가 드려지지만, 그후 십일조는 레위 지파를 위해 사용되어지는 수평적인 성격을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에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다.

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침이 마땅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에 상당한 애착을 보이신다. 즉 십일조를 변개할 때에 주어질 벌칙까지도 부과하신다.

②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드려졌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하며
경축(celebration)하는 경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십일조는 생활이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졌다.

3)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십일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그들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도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사사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 길을 찾아 배회하며, 우상까지도 섬기며, 한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삿17:7-10,
18:18-20).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레위인들의 사명의식이 흐려지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에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에 따라, 생활고를 레위지파 사람들 스스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무엘이 십일조를 삼상8:15이하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왕정(王政)이 이루어질 경우 백성들의 소득의 십분의 일이
왕가(王家)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으로 징수될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서 헌금과는 무관하다. 그 후 다윗이나 솔로몬 왕 시대에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윗의 경우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물을 한 사람이다. 역대상
29:14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헌금의 원칙을 천명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모든 것이주께로부터 왔고, 그 중에서 일부를 주께 드리는 것뿐임을 밝혔다.

솔로몬보다 약 200년 후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했던 아모스가 십일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모스
4:4에 나타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면서 겉모양만 남은 십일조를 지적한다. 그 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르러,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하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시행하게 한 사실이
역대하 31장에 나타난다. 히스기야 왕의 십일조와 관련한 조치는, 십일조를 통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스기야 왕 이후 북왕국과 남왕국이 모두 멸망하기까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구약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4) 포로시대와 예루살렘 귀환 후의 십일조

이스라엘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있는 때에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금 십일조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때는 느헤미야와 말라기가 활동했던 시기이다.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 후 그는 예배의식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에
정한대로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한다(느10:38, 12:44 등).

주전 430년경,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었고, 드린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하였다. 이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또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총독에게 하는 것만큼도 하나님께 하지 않는다고 책망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전적
헌신의 표시로서 십일조 특히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깨우치신다(말3장).

여기에서 십일조의 원리를 볼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는 필수적이었으며, 십일조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못하였을 때에 종교가 타락하게 됨을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본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

1)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

예수님은 십일조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바가 없다. 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십일조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셨다(마23:23, 눅11:4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있어서 매우 꼼꼼하게 계산하여 시행했으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눅18:12).

이런 형편에서 주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 곧 사람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함을 깨우치신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헨드릭슨은 이 말씀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계속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주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기까지만 십일조가 유효한 것을
밝힌 것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음으로 십일조에 관한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각주 5 W. Hendriksen, Exposi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Baker, 1973), p. 832)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성경본문에
부정시상(aorist)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3:23에서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시상으로,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시상이 사용되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 쓴다면 “이것도 행하고(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고) 저것도(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 이전에만
국한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 아니다. (각주6은 길어서 아래 미주처리)

마태복음 10:9-15에서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함을 밝히신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자비량할 수도 있지만, 또한 복음 사역의 협력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도 합당하게 보셨다.
심지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약속하시고,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경고하기까지 하신다.

예수님은 헌금의 원리에 대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해 가르치신다(눅21:1-4).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돈의 액수의
다소보다는 최선을 다해 드리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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