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2-08 12:48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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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032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요즈음 기독교계는 세상과 적당히 보조를 맞추어 살도록 부추기는 평안한 복음들로 가득차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평안한 복음을 믿고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모든 것과 호흡이 잘 맞아 돌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은 세상이나 주위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충돌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살며, 날마다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열렬한 신앙과 스스로를 살피는 경건함 속에서 살아 갈 것이다.

A.W.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같은 목사님이 계셨던 것은 기독교계에 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다.

토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깊이 있는 말씀의 이해와 박식한 신학적 이해를 눈물의 기도로 반죽하여 개혁의 메세지로 전할 때에 많은 크리스천들의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써만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다. 그는 평생 교회와 크리스천의 삶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권의 명저들을 저술했다. 그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라는 복음주의 교단의 목사였다

그는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교회의 자본화”와, 그리스도인의 가야 할 길인 성화 대신 평안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오염된 신앙, 명예는 추구하지만 십자가는 부인하는 가짜 신앙,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을 기획하지만 성령이 메마른 교회, 신자 수의 증가를 위한 비지네스적인 영업법을 도입한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 체험은 있지만 신학이 없는 신앙과 죽은 정통만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감격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한 현 시대의 신앙의 허상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정직하게 파헤친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보자. - 편집실 -

 

1.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 철학 및 그 밖의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것들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역설적이며, 기독교의 신앙 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역설이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신앙이 필요 없다. 신앙은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다. 

십자가는 “자연인”,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완전히 대립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철학은 자연인의 사고와

정면 충돌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언했다(고전 1:18 참조).

그리스도인의 역설, 하나
그리스도인의 역설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믿지만 전보다 더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 땅에서 활동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앉아 있다.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듭난 후에는 더 이상 이 땅이 고향이 아님을 믿는다.

공중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땅에 내려오면 서툴고 보기 흉한 쏙독새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자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살아가는 방법들과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들 중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안전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며,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어버린다. 만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 낮아지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낮아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면 이미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강할 때가 가장 약하다.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부유해지면 그 능력이 사라진다.

그리스도인의 역설, 둘

남에게 가장 많이 주면 자신이 가장 많이 소유하게 되고, 가장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가장 적은 것이 남는다. 가장 낮아졌다고 느낄 때 가장 높이 있으며, 자신의 죄를 가장 많이 깨달을 때 가장 죄가 적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 가장 지혜로우며, 자신이 가장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믿을 때 가장 무지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이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장 멀리 가는 것이다.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으며, 슬픔 중에도 행복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지만, 장차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기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갖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망했다고 느끼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죄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지만,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알고는 괴로워한다.  

그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을 가장 사랑한다. 자신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분과 친구처럼 대화한다. 그는 자신이 본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치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에게는 가장 보배로운 존재인 것을 감사한다.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존재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비관주의자이며, 동시에 낙관주의자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는 비관주의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영광의 주님에게 쏟아진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적인 소망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낙관주의자이다. 십자가가 온 세상에 유죄선고를 내린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우주에서의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궁극적인 승리를 기다린다. 그렇다! 이토록 그리스도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참으로 놀라운 존재이다!

험한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렇다. 분명히 단점이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성도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신자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온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냐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삶은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2. 진짜는 솜사탕을 거부하고 가시 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생사의 문제

이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

와 어떤 관계를 맺는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이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의 세 가지 답을 내 놓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이다.

그리스도 영접은 만병통치약?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르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한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 비유를 들어보자.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 “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한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린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른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람을 안고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바람을 받으며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람이 불지 않는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비신자를 구원하겠다는 우리의 결의가 최근에 현대의 세일즈맨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교회에 들여와 사용하는 죄를 범하게 한 것 같다.

 세일즈맨들은 상품의 좋은 점들만 이야기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처럼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이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사업이 번창하게 해 주시고, 가정을 지켜 주시고, 언제나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첫 찬바람(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시련이나 어려움)이 몰아치면 그들은 떨면서 카운슬러에게 찾아가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해 줄 지를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진리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복음서에 보면 그분은 진리의 전모를 제시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엄격한 진리에 너무나 부담을 느껴 돌아설 때, 따라가서 장미빛 약속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을 아셨다. 또한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셨다.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에 몰아치는 바람을 역시 느낄 수 밖에 없다.

진짜 신앙이냐 가짜 신앙이냐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이다. 소위 “쌀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크리스천”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는가? 그분은 죄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신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바람이 싫고, 산허리의 양지 바른 곳이 좋다”라는 확신만 있을 뿐이다.

 

 3. 진짜는 주님의 “일” 보다 “주님“에 우선순위를 둔다.

하늘을 향하는 사고

사고하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다. 사고하지 않는 삶은 그림자 같은 삶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생각들은 사고의 결과로 생긴 것들이며, 우리의 생각들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르게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사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고 인도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리스도의 반응과 동일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한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삶이 달콤하게 변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한다. 프랑소와 마라발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하나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겨우 보답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의 사고는 먼저 하나님께 갔다가, 그분에게서 다시 그분의 피조물로 나아간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하늘을 향하는 사고를 해야 한다. 우리 마음이 성화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사고들을 주관하셔야 한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시대와 다양한 교리적 강조점들을 초월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진지한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주 오랜 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려면 우선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떠나서 그분을 찾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성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확신하기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활동주의의 희생자?

그리스도인은 안타깝게도 잘못 이해된 “활동주의”의 희생자들이다. 누군가 표현했듯이, 소위 “일(WORK)의 복음”이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밀어냈다.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중에 종종 우리는 “일의 주님”과의 접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을 탈진시킨다. 자신들의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은 주간과 야간의 여러 집회들과 행사들을 적어놓은 달력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목회자와 교인들이 잘못된 철학의 인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줄 뿐이다.

만일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죄인을 구원하고 신자를 온전케 한다면, 그것은 큰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관찰해 본 결과, 나는 “현재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 중 많은 것들, 아니 대부분의 것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이 땅 위에서 진정으로 실현하는데 어떤 면으로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독과 침묵의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활동들이 재편되어야 한다.

 우리의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들이 다 중지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그분은 당신의 마음 안에 거하신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여라.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이다.

  

4.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한다

참된 영성의 척도 

영성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다 서로 다르다.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또 어떤 모임에서는 열심있고 활기에 찬 사람, 또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영성있고 영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열렬한 간증, 빈번한 기도, 큰 찬양이 영성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 자체는 영성도 아니고, 영성의 증거도 아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 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욕구들은 언제나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욕구들로,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만큼 강력하다.

* 첫째/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욕구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갈망” 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 둘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한다.

* 셋째/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 넷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욕구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한다.

* 다섯째/ 의로운 삶에 대한 욕구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산다.

* 여섯째/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 일곱째/ 시간을 초월하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다. 신앙에 의해서 세상의 풍조와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그는 마치 이미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운다. 이런 사람은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무료 교환 

기독교의 교리의 뿌리는 “대속의 교리”이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진리는 진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죄가 의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르다. 그분은 기존의 것들을 꿰매어서 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신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하신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가장 강한 상태에 있는 가장 순수한 성도조차 그의 회심 전과 마찬가지로 약하다. 회심을 통해서 일어난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강함“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들어온 것일 뿐이다.

  

 5.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세상을 살다보면 참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각(판단)과 행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민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혼미함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수단들은 기도, 신앙, 꾸준한 성경말씀의 묵상, 순종, 겸손, 진지한 사색, 성령님의 조명이다.

올바른 기도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신앙, 또 깨우침과 지식을 주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또한 겸손은 아주 중요하며, 교만하면 진리를 떠나기가 쉽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많은 진리가 저장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은 진지하고 사려깊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당연시 한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다. 우리는 결코 그분 없이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즉 “자아 인식”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들을 잘 모르며, 또 자신의 영적 상태도 잘 모른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도덕적 및 영적 상태를 드러내실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마 7:1~5), 심지어 자신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4:3 참조). 그러나 성령님과 협력하여 우리 스스로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의 자기 발견을 위해 제시한 질문들로 자신을 살펴 보라. 이 질문은 당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인지를 말해 줄 것이다.

1.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2.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의 은밀한 보물” 주위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각들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보물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마 6:21 참조).

3. 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우리가 자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4.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자신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5.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찾아가는 곳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말해준다.

6.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7.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유머감각과 경솔한 웃음은 다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경박한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A.W 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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