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2-08 12:42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치유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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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84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치유하셨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시유 은사와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적 은사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엄청난 치유의 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질병도 많았었다. 의술이라는 것은 아주 조잡했고 한계가 있었다. 지금 이 시대 보다는 당시에 치유할 수 없는 병들이 더 많았다. 전염병들이 전체 도시를 휩쓸기도 했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증명하시기 위해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치유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나타난 6가지 중요한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나 안수함으로 치유하셨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서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ㅝ 하는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다(6-7절).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에게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지만 백부장은 사양하고 예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하인이 낫겠다고 했다(8절).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빋음에 놀라셨는데, 특히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로마 군인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예수께서 그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자 그 하인이 즉시 나았다(13절).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하루 종일 무리 중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셨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치유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수천 명은 될 것이다. 숫자야 어떻든 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말씀 한마디로 고치셨다. 과장된 몸짓이나 특별한 분위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접촉을 통해 치료하기도 하셨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25-34을 보면 단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혈루증이 고침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 경우이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즉시 치유하셨다.

백부장의 하인은 “그 시에”(마 8:13) 나았다고 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즉시”(막 5:29) (개역성경에는 “이에”나았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열 명을 길을 가는 도중에 즉시 낫게 하셨다(눅 17:14). 또, 다른 문둥병자를 만지셨는데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눅 5:13)고 했다. 베데스다 연못의 불구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요 5:9).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도 가서 씻으니 즉시 나았다. 물론 이 경우에는 예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그 기적을 두 단계로 행하셨다. 하지만 그 치유는 분명히 즉각적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나는 치유받았고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점진적”인 치유를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께서 즉시 치유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자연적인 경과일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고치셨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 나가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 거기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열병을 꾸짖으시니” 즉시 그녀는 완쾌되었다(39절). 그녀는 일어나서 그들을 수종들기까지 했다. 회복기가 따로 없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뜨거운 물에 꿀을 조금 타서 마시고 몇 주간 안정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증세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미듬으로 병고침 받았다고 외치라”라고 그녀를 독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완쾌되었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치유는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완전한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역사이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을 모두 고치셨다.

요즘의 신유 은사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망한 채로 휠체어에 실려서 돌아가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비행기 시간이나 텔레비전 시간표에 쫓겨서 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신유 집회나 프로그램에서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4:40에 보면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9:1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기관상의 질병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을 돌아다니시면서 기껏 허리의 통증이나 두근거림, 그 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 따위를 고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관상의 질병임이 분명한 환자들을 고치셨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 손 마른 사람, 소경, 중풍병자 등인데, 이런 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기적이다.


여섯째,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누가복음 7:11-16을 보면 예수께서 나인성에 계실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나셨다. 어떤 과부가 자기의 독자를 묻으러 가는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행렬을 멈추게 하신 후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다. 마가복음 5:22-24, 35-43을 보면 예수께서는 또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신유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이나 장례 행렬, 혹은 묘지에서 그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지금도 때때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경우들과는 전혀 다르다. 수술대에서 살아 있다는 신호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사람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나흘 동안 무덤에 묻혀 있다가 무덤에서 나온 사람이나(요 11장) 혹은 장례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눅 7장). 이것들은 의심할 수 없는 부활의 사건이다. 오늘날 그런 일들을 한다고 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이야기가 근거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고 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기적을 시시껄렁한 것으로 만드는 죄를 짓고 있다. 왜 텔레비전 방송에서 행한 기적들은 그렇게도 죄다 눈에 띄지 않는 증거가 없는 것들뿐인가?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신유 은사는 진정한 은사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장,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리고 신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하셨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당신께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한 방편이었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사와 이적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고 하였다(요 20:30-31).


신유 은사는 끝났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치유하신다.

신유 은사는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의 메시지와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사도들의 공동체에 부여하신 기적적인 역사 중 하나였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된 이후에 그 표적들은 사라졌다. 기적적인 표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사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정당성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한 강한 표적으로 병고침의 기적을 행하였을 뿐이다.

빌립보서 2:25-27에 보면 바울은 그의 좋은 친구 에바브로디도가 여러 해 동안 심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바울은 전에 병고침의 은사를 발휘한 적이 있다. 왜 그는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낫게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그 은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바울은 단지 그 은사를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은사를 남용하려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하는 것은 신유 은사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은사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건강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일 뿐이다 .

디모데후서 4:20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경우를 보게 된다. 거기에서 바울은 드로비모를 병들었으므로 밀레도에 남겨두었다고 했다. 왜 바울은 아픈 그의 친구를 그냥 두었는가? 왜 그를 고치지 않았는가? 그것은 신유 은사의 원래 의도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5:23; 고후 12:7).

병고침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기적적인 표적 은사였다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기위해 영원히 주어진 은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애초부터 기독교인들이 병들게 하시는가?

이 세상에서는 신자들도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데 왜 고통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하게 잘산다면, 만약 화목의 유익이 완전한 건강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의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시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을 육체적인 혹은 일시적인 병 치료를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존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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