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2-08 12:25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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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76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사탄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참 신앙이 아닌 거짓 신앙의 구조를 살펴보면,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막아놓고 신앙생활의 나머지, 즉 전도, 봉사, 선교 등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풀어 놓는다. 이것을 발견하면 사탄의 교묘함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사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것들이 있다. 그 방법들을 살펴본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편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가운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특별한 사람만이 듣는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요 10:27, 각주참조) 하나님의 음성은 특별한 사람만이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면 누구나 반드시 들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하는 이러한 사탄의 전략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선입견에 의하여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사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을 신비주의로 몰아붙이고 이단이라고 몰아붙여 자신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시킨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일종의 말씀에 대한 편견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하나님의 의도하심, 즉 다림줄을 나타내는 성경의 로고스 말씀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레마의 음성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성경 이외에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이 없는 곳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분명히 알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가 아닌 인격체로서 주고받는 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특별한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하면 누구나 듣는 것이다.

 

2. 신학적 편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두 번째는 신학적 편견이다. 이 신학적 편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세대주의 신학의 입장으로서 “성령의 은사는 초대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의 논리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해명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 이들은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답을 해야 한다.

 

우선, 어린아이의 질문이다. 이 시대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를 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주관하고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을 하신다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는 언제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사가 중지되었다면 지금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은사가 중지되었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사라졌다는 것인데, 귀신의 활동도 중단되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능력은 중지되어 있고 귀신은 활동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초대교회를 끝으로 사라졌고 사탄은 지금도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고 있다면 믿는 자가 예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든 것은 다 동일한데 성령의 능력, 즉 은사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인가? 성령의 은사가 초대교회 시대로 끝이 났다면 성경에 은사에 대한 기록들은 무엇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인가? 요한계시록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관한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지금은 은사가 중지되어 있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은사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인가?

 

지금 시대에는 은사가 없다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경험했더라면 이런 주장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대판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신들의 우매함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성경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엇다.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기록들은 지금 시대에 은사가 중지되었다면 우리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때문에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 것이다. 그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어 지금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록을 읽고 묵상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으로써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의 내용대로 삶에서 일이 이루어진 것을 한 번이라도 경험을 했다면 이런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병원에서 포기하여 더 이상 소망이 없는 환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손을 올려라. 내가 그를 살려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 사람이 치유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였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관자이심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신앙심이 좋아서 주일예배,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를 빠지지 않았고 십일조와 헌금,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매년 1월 1일이 되면 점쟁이에게 찾아가 점을 보고 일 년의 운세를 살펴보았다. 이 사람의 신앙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고 성경의 내용을 자기 멋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 즉 살아계신 인격체로서 인간을 만드신 분에 관한 것이고, 다른 종교는 인간이 만든 신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수 없이 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그 신들에게 누가 이름을 붙이고 누가 만들었는가? 모두 인간의 공상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간이 만든 것이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다른 신과 비교될 수 없다. 살아계신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불가사의한 학문이다.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그들의 집요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지 않으시면 단 한 구절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사사로이 푸는 것이 아니다.(벧후 1:20, 각주참조)

 

신앙은 삶이지 이론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떠나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이다.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전혀 배우지 못하셨다. 제자들 중 문벌 좋은 자가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고전 1:26, 각주참조) 분명히 베드로는 랍비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대학 졸업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고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15 유대인들이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혀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글을 아는가?”라고 하더라“(요 7:15) [한글킹]

 

그런 그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자 필요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요일 2:20, 각주참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이고 그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알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다.

 

“27 그러나 너희가 그분께로부터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동일한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은 진리요 거짓말이 아니니,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너희는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 2:27)

 

성령의 은사가 초대교회 시대에서 끝이 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분석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으로 배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기름부음으로 배운 경험이 있다면 은사가 초대교회 시대에서 끝이 났다는 주장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은사 중지론자들이 답해야 하는 것은 오순절의 성령의 세례가 왜 일회적이었는가를 답해야 할 것이다. 왜 사도들이 경험한 은사를 우리는 경험하면 안 되는가를 답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해 상세한 것은 필자의 책 ⌜그리스도의 영⌟ PartⅡ. 13. 성령님과 은사를 참조하라.)

 

3. 신앙생활에 대한 편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가운데 세 번째는 신앙생활에 대한 편견이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지 성경책에 의한 삶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성경 말씀을 토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즉 계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말씀에 터를 잡고 말씀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말씀을 연구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신앙생활을, 성경 말씀을 연구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신앙생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절대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면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과의 대화 가운데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부모님들과 상의를 하고,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듯이 내 앞에 처한 삶의 문제를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공부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자식의 문제가 성경 어디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내 아들의 이름이 성경 어디에서 거론되는가? 그렇게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속내를 비치신다. 다윗의 경우, 아말렉군과의 전투에서 두 명의 부인이 잡혀간다. 부인이 잡혀갔으면 당연히 쫓아가서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해야 될 일을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어 본다. 쫓아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여쭙는다.(삼상 30:8, 각주참조) 그리고 응답을 듣고 추격하여 부인들을 되찾아 온다. 하나님의 응답을 얻은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행한다는 것은 이미 답을 얻고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신앙생활이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하시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더는 신앙생활이다. 이런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생활의 본질을 망각하고 말씀을 연구하여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고 배워 그렇게 생활한 것이다. 신앙생활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하나님의 언어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편견이다.

 

4.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의 제거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다양성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에게만 모든 집중이 될 때 가능하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게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특히 내면 상태의 정리를 말하는데, 이 문제까지도 주님께 올려드리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모두 영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중을 방해하는 내적인 산만함을 제거하려면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등 사탄이 주는 생각들을 정리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나사렛 선포 외에는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한 환경의 분주함도 제거되어야 한다. 즉, TV, 수다, 알콜, 니코틴, 카페인, 포르노, 게임 등 중독성 있는 모든 것들이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정리는 우리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면 상태의 정리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내면 상태를 정리하고자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조급함이다. 조급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철저히 방해한다. 조급함의 폐해는 어떤 것을 단정 짓는 데 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으로 단정 짓고 결론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심대한 장애를 초래한다.

 

[회복시리즈 02. 신앙의 본질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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