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13 16:34
경교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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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511  

최근 중국의 개방과 더불어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열이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언제부터 중국에 전달되었을까? 어떤 역사가들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한(東漢) 시대에 벌써 중국에 왔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들이 미비한 형편이다. 명말(明末) 경교비의 발견으로 당사나 시대에 벌써 기독교가 전래되었던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비록 경교는 200여 년 만에 자취를 감추었지만, 경교가 채택한 여러 가지 선교정책은 중국선교에 관심있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한국 교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경교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교의 유래 
 

경교(景敎)는 네스토리아학파에 속한 기독교의 일파이다. 창립자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로 안디옥(Adtioch)출신이며 A.D.428년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박식한 학문을 겸비하고, 언변이 좋은 기독교인으로 안디아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라이다. 

 당시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알렉산드리아파와 안디아파 두 파로 크게 나뉘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파와 안디아파는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하여 크게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파는 예수는 출생 때부터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상당히 존경하였다. 안디아파를 대표하는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로부터 출생한 예수는 인성만 갖고 있었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면서 신성과 인성이 우의적으로 결합하였다는 ‘우의결합론(友誼結合論)’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성모화하여 숭상하는 것을 반대할 뿐 아니라, 성상숭배(聖像崇拜)도 반대하기 때문에 예배당 안에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연옥설(煉獄說)과 성찬식의 화체설(化體說) 등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신학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은 A.D. 431년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의 학설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그의 주교직을 파면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추종자 열 일곱명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페르시아 왕의 보호와 지지를 받으면서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A.D. 498년 기독교와 정식 분리하여 스스로 ‘앗수르 기독교’ 라고 자칭하였다. 이들이 이후 당나라 때 중국에 전래되면서 경교라고 불리웠다. 경교란 광명정대의 종교라는 뜻이다. 

경교의 중국 전래에 관한 역사적 자료 


경교비의 발견 
비록 경교가 당 시대에 전래되기는 했지만, 명말 경교비가 발견되기 전에는 아무도 경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비록 「당회요(唐會要)」, 「당서(唐書)」같은 고전에 파사승(波斯僧: 메시야)등의 명칭이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은 경교가 불교의 일파라고만 생각하였다. 

 당대로부터 근 천년이 지난 명말(天啓 5년) 1625년, 중국 산시(陜西)성 서쪽 근교에서 큰 비석이 발견되었다. 그 비석은 높이 약 270 센티미터, 넓이는 약 1미터, 폭 30센티미터, 무게가 2톤 정도이며, 비석 위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비명이 새겨져있다. 경교비 정면은 전부 1,695자로 경교의 교리와 경교의 중국 전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양 측면에는 68명의 경교 선교사의 성명과 직위가 시리아어와 중국어로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비문 작자 경정(景淨: 페르시아인), 글쓴이 여수엄(呂秀嚴: 중국인)의 이름과 이 비석을 제작한 연대(唐德宗 建中2年1月7日: A.D. 781년 2월 4일)가 기록되어 있다. 후에 학자들의 고증을 통하여 경교가 기독교의 일파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뚠황 석실의 문서자료 
 중국과 서역의 교통 요지였던 뚠황(돈황)은 상업과 각종 종교들이 발달하였으나, 송대 서하(西夏)의 침략과 해상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점점 몰락하였다. 서하가 송을 침략할 때 값진 예술품과 보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굴속의 석실에 감추고 그 석실을 봉해버렸다. 약 천년이 지난 1900년 청나라 때, 우연히 동굴을 청소하던 왕씨 도사에 의해 값진 보석은 물론 1,130묶음의 귀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 중에 동진(東晋,A.D. 410년)에서 북송(北宋, A.D. 1028년)까지 600여 년 동안의 불교, 도교, 경교, 마니교, 유태교, 유교 등의 종교서적과 역사, 언어, 사회, 법률, 의약, 천문에 관한 서적들이 상당수 있었다. 

 뚠황석실에서 발견된 문서 중에서 경교에 관한 서적은 겨우8종에 불과하지만, 경교의 중국 전래를 증명하는 데 충분했다. 그 서적들은 「一神論」,「序聽迷詩所經」,「大秦景敎宣元至本經」, 「大秦景敎三聖通眞歸法讚」, 「志玄安樂經」, 「大秦景敎三威蒙 度讚」, 「尊經」, 「經敎徒畵像」등 이다. 이 자료들 이외에도 「唐會要」, 「長安志」, 「西溪叢話」, 「貞元釋敎錄」, 「僧史略」, 「釋門正統斥僞志」, 「州府元龜」, 「新唐書」등 중국 고전 문헌에 경교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이 있다. 
 

경교의 중국 전래와 발전 

 

당대의 시대적 배경 
 1) 당과 돌궐과의 관계: 당나라 초에 서돌궐(Western Turks)이 동로마제국과 연합하여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동돌궐(Eastern Turks)도 이에 가입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중국과 서역과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당태종은 정관(貞觀) 4년(A.D. 630) 이정(李靖) 장군을 파견하여 동돌궐을 평정하고 서돌궐도 당에 항복하여 서역과의 교통이 다시 부활되었다. 

 2) 페르시아는 당과 아라비아 제국과의 완충지대: 당나라가 중앙아시아를 제압하고 있었지만, 마호멧을 계승한 아랍의 회교도들이 중동을 제패하고 계속 동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은 이를 견제하고 국제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의 각국, 특히 페르시아와의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해야만했다. 또한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는 회교도들의 강력한 위협 속에서 당나라와 같은 강력한 국가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3) 당나라 황실의 대외 문화에 대한 태도: 당나라를 창건한 이연(李淵)의 모친은 돌궐족이며 네스트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태종은 정국의 안정과 국제사회의 진출을 위해 적극적인 문화 포용정책을 시행하여 외래문화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진취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처럼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만큼 개방적이며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나라를 찾아볼 수 없다. 

경교의 중국 전래 
경교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의하면, 당 태종 9년(A.D. 635)에 경교 선교사 아라본(Alopen, 阿羅本: 아브라함의 중국명)이 21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장안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태종은 아라본의 중국 방문을 매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아라본이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에 도착했을 때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서문 밖에까지 나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종교 지도자에 대하여 전무후무한 예우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아라본 일행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태종은 문무백관들을 모아서 아라본의 설교를 경청하도록 하고, 아라본에게 경교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분부하기도 하였다. 

 3년 후 태종은 경교의 교리가 심오하고 실용적이며,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고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에 마땅히 천하에 전하여 백성들에게 이를 행하도록 장안의 중심지인 의녕방(義寧坊)에 경교 사원의 건립을 허가하였다. 

경교의 발전 
 태종의 이와 같은 배려와 보호 아래 경교의 선교활동은 순조롭게 전개되면서 계속 발전하였다. 태종의 세자 고종도 부친의 대업을 받들어 경교를 계속해서 장려하였다. 경교비의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아라본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모시고 전국 각지에 경교 사원을 건립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고종 재위 시 낙양(洛陽)에 경교 사원을 건립했는데, 이 때문에 불교와 도교 지도자들이 항의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A.D. 714년 경교의 중국 대주교를 임명하고 그들을 왕궁에 초청하여 설교를 들었다. 경교비에 “法流十道, …寺滿百城”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행정구역으로 구분하여 그 명칭을 ‘도(道)’ 라고 하였다. 당 현종(玄宗)은 친히 경교 사원에 가서 단을 세우고 대장군 고력사(高力士)를 통하여 오대 선조대왕의 초상화를 경교 사원에 보내어 그것들을 사원 안에 걸어 놓도록 하였다. 경교는 본래 사원 안에 십자가 외에 어느 것도 설치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초상화를 사원 안에 설치했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숙종(肅宗) 재위 시에 영무(靈武) 등 5개 군에 경교사원을 재건하였다고 경교비에 기록되어 있다. 대종(代宗)은 성탄절 때마다 많은 예물 등을 하사하여 성탄절을 경축하였다. 덕종(德宗)이 즉위하면서는 경교에 대하여 더욱 우호적이었다. 유명한 경교비는 덕종 즉위 2년만인  A.D. 781년에 설립되었다. 

 이상과 같이 당대 초기 태종에서 덕종에 이르는 6대의 제왕 모두 경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덕종 이후 경교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무종(武宗)의 불교 폐지령을 통해 볼 때 경교가 불교와 백중한 세력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교의 선교정책 
그렇다면 외래 종교인 경교가 어떠한 선교방법을 통해서 이토록 순조롭게 당에서 선교할 수 있었을까? 

경전 번역 
당 태종이 아라본을 맞이하면서 경전 번역을 부탁하였을 때 아라본이 어떤 경전을 번역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경전 번역은 경교 선교사가 당에서 제일 먼저 착수해야 할 선교사업의 하나였음은 틀림없다. 경전 번역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선교사는 경정(景淨)으로 바로 경교 비문을 쓴 작가이다. 제경목록(諸經目錄)의 기록에 의하면 경정은 30권의 경전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는 또 반약(般若)과 함께 불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의료선교 
 의료선교는 자고 이래로 기독교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시한 분야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의술에 정통한 선교사들이 많았는데, 경교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헌종의 동생 헌(憲)이 병이 났을 때 경교 선교사 숭일(崇一)이 그를 치료해서 현종이 이를 크게 기뻐하고 관복을 하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환(社環)의 「경행기(經行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大秦善醫眼與痢, 或末病先見, 或開腦出蟲(대진 선교사는 눈병과 이질 등을 잘 치료하고, 병이 발생하기 전에 먼저 이를 알고 예방하며, 뇌를 수술하여 벌레 등을 제거했다.)” 

 위의 기록을 통해 경교 선교사들이 안과, 내과, 외과와 예방학까지 겸비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구제사업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복음 전하실 때 굶주린 자, 불쌍한 자, 그리고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도우셨다. 그래서 구제사업은 기독교 선교활동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경교 선교사들도 구제를 매우 중요시 했던 것 같다. 경교비에는 “오는 사람마다 밥을 주고, 궁핍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옷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타협정책 
 경교는 전도의 효과를 위해 중국 본토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경교 사원 안에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장식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지만, 현종 때 선조 5대 황제의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그리고 경전 번역에 있어서도 불교와 도교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성령’을 ‘玄風’, ‘창조’를 ‘造化’, ‘교당’을 ‘寺’, ‘교사’를 ‘僧’, ‘주교’를 ‘大德’, ‘선지자’를 ‘法王’, ‘천부’를 ‘天尊’ 으로 번역 하였다. 

상류층 선교 
 경교는 당나라에 전래되면서부터 고위층과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다. 태종을 비롯하여 초기 역대 황제들의 지지와 보호 속에 경교는 순조롭게 발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황실과 지배 고위층이 경교의 선교 대상이 되었다. 방현령(房玄齡), 위징(魏徵), 고력사(高力士), 곽자의(郭子義) 등 당나라의 유명한 재상들의 이름이 경교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경교의 적극적인 상류층 선교를 더욱 증명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곽자의가 경교 신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교의 몰락 
경교가 당나라에 전래되면서 200여 년 동안 순탄하게 발전했지만, 무종(武宗) 때에 이르러 큰 타격을 받고 당나라에서의 선교 활동을 종식해야 했다. 경교가 몰락한 원인을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나누어 분석해 본다. 

 회창멸법 
 도사 왕귀진(王歸眞)은 불교가 너무 번창하는 것을 시기하여, 불교는 외래종교이며 또한 승려가 너무 많아 국가 경제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불교를 치리할 것을 상소하였다. 무종은 이를 받아들여 회창 5년 (A.D. 845)불교 폐지령을 반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회창멸법(會昌滅法)’ 이다. 회창멸법의 주 대상은 불교였지만, 외래종교인 경교도 그 화를 피할 수 없었다. 많은 경교 선교사들과 신도들은 몽고나 서장(西藏: 티벳) 등 변방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교통단절 
 당나라 말기 계속되는 내란으로 정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서장을 중심으로 발전한 토번(吐蕃)이 중국 서북지역을 점령하고 비단길을 장악하여 동서교통의 요새가 또 다시 이민족의 관할하에 놓이면서 동서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경고는 선교사들을 계속해서 중국에 파견할 수 없었다. 

중국인 지도자 양성의 부재 
 경교비문이나 그 밖의 자료들 속에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은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중국인 경교 지도자들의 이름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경교는 당에서 20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현지 지도자들을 양성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외래 종교가 현지인들의 참여없이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만 운영될 때 그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과분한 타협정책 
 경교는 전래 초기부터 타협적인 정책을 취하여 중국 토착문화와 별다른 충돌없이 순조로운 선교의 효과를 거두었지만, 지나친 타협으로 대량의 토착문화를 수용해야 되었기 때문에 경교 스스로의 특성을 상실하는 과오를 범했다. 비록 중국의 각종 고전문헌 속에 경교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경교비가 발견되기까지 천 년 동안 대다수 중국인에 의해 경교가 불교의 일부라고 여겨졌던 것만 보아도 경교의 타협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류층 선교문제 
 경교는 정치, 외교적인 여러 복잡한 배경 속에서 당나라에 전래되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상류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또 자연히 그들을 주요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상류층의 지지를 받으며 매우 순조롭게 중국선교의 문을 열었고 또 계속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상류층의 지지가 사라졌을 때 민중의 기초가 없는 경교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무종은 불교 폐지령을 반포하고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를 계승한 선종(宣宗)은 불교 폐지령을 철폐하고 불교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불교는 다시 계속 발전하였지만, 민중의 기초가 없는 경교는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그 잔여 세력은 중국 변방지역으로 쫓겨 나가게 되었다. 
 

강인규 | 타이완 중위안대학(中原大學)교수∙ 중국교회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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